불교사찰과 불교기도문, 부처와 보살의 모습

2020. 5. 10. 19:37불교기도문

불교사찰과 불교기도문, 부처와 보살의 모습 

 

(본 블로그는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큰 글씨의 “컴퓨터”로, 편하게 읽어 보시길, 권장드립니다. 또한,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블로그에, 11개의 블로그 글이, 똑같이 게제되어 있고, 그 제목, 내용도 모두 똑같으므로, 편한 사이트를 선택하세요)

(참고~불교기도문, 천수경기도문인, "신묘장구대다리니경" 원문 해석은, 별도 블로그 글로 구성하였으므로, 참고하세요)

이 블로그의 글이, 너무 길어 부담스러우면, 영험한 기도처와 각 사찰의 영험 설화를 제외한, 아래 블로그 리스트 중, (①번 요약 발췌분) "불교사찰,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절에 가고 싶으면, 누구나 마음에 드는 절에 그냥 가시면 됩니다. 몇번 다녀 보다가, 그 절에 계속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면, 종무처에 신자등록을 하시면 법회일자나, 행사일정을 알려 줍니다. 교리등은 스스로 터득하셔야 합니다. 아무도 가르쳐주거나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역학은 자연의 이치에 근거한 것입니다). 믿든, 믿지 않든, 자연의 이치는 당연한 것으로, 존재하는 그대로가 바로 진리이므로, 믿어라 강요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자연의 이치인 진리를 굳이 믿어라 강요할 필요 있을까요? 믿든 믿지 않든 물은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를 뿐입니다. 그런 자연의 이치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시키고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불교에서는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깨달아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교리를 알고 싶으면, 그 절이나 포교당에서 실시하는 경전공부방에 별도의 돈을 주고 배워야 합니다. 또, 절에는, 출석부도 없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곳입니다. 법당의 출입은, 항상 옆문으로 하며, 들어가면서 반배, [방석을 펴고 각 부처님께 삼배, 기도(주문, 진언, 염불, 108배, 독경, 참선등 선택 / 바쁜 사람은 삼배만)후 삼배, 방석 정리], 나오면서 반배를 하고 문닫고 나오면 됩니다.

 

천수경의 첫 발원 문구~

무상심심미묘법~ (불법은 더 이상 위가 없는 “무상정득정각”의 경지이므로), 불법은 매우 깊고 깊은 “미묘한 법”임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백천만겁난조우~ (이렇게 매우 깊고 깊은 불법은), 수천 수만의 윤회를 거듭하여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아금문견득수지~ (그처럼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이제야 인연이 되어), 금생의 내가 드디어 불법을 듣고, 보고, 받아 지니게 되었습니다.

원해여래진실의~ (이번 인연을 놓치지 않고), 제가 반드시, 부처님 말씀의 진실한 뜻을, 알수 있도록,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을 올림니다.

 

* 사홍서원 ~ 불자가 가져야 하는, 네 가지의 큰 서원

​①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이 끝이 없어도 다 제도하겠습니다.

② 번뇌무진서원단~ 번뇌가 다함이 없어도 다 끊겠습니다.

③ 법문무량서원학~ 법문이 한량이 없어도 다 배우겠습니다.

④ 불도무상서원성~ 불도가 위없이 높아도 다 이루겠습니다.

 

불교기도문이자, 천수경기도문인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사찰에 따라 3번반복하거나 길게 하게 되면 7번을 반복하여 읽게 됩니다. (절에서 주문을 외우거나, 절을 할때는 기본이 3번이며, 더 하고 싶으면 7번, 21번등 7의배수로 하며, 그다음은 100번 또는 108번, 1000번, 3000번등으로 진행합니다) 이렇게 소리의 울림으로, 밀교적 기도(교종,선종중 조계종은 선종임)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으면 불교의 (욕계,색계,무색계)삼계의 불교교리 전체구조를 를 이해해야 합니다.

천수경 기도시 맨처음,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방내외 안위 진언,,,"의 주문은 이제 모든 주변을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께 진언을 올리니, 사방의 잡귀, 귀신들은 놀라지 말고 물러가라는 내용이며, 그 다음의 주문들은 부처님을 초청하는 주문이며, 그 다음에 부처님께 올리는 신묘한 주문인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외우게 됩니다. 이어서 관음청,지장청등을 하고, 그 이후에 자신이 원하는 발원문(축원문)을 스님이 주소, 이름, 출생년도 등을 낭독해 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순서로 진행되는 어떤 목적의 법회나 축원 기도는 본인의 참석을 원칙으로 하지만, 참석이 어려울때는 종무소에 발원문(축원문)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인의 참석이 없더라도 축원카드에 의하여, 주소, 성명을 부처님에게 불러 올리게 됩니다. 사찰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축원문을 읽을때나, 적을 때는 어버지 이름을 ​​건명,어머니를 곤명이라 적고, 신자를 부를 때는 아버지를 대주님, 어머니를 보살님이라 부름(건명, 곤명의 유래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 리스트중 "사주, 사주팔자 풍수지리"의 방위 참조).

 

축원카드의 낭독을 원하는 사람은, 각각의 절에서 정한 얼마간의 축원카드 접수비가 있으며, 그 이외의 헌금은 사찰에 비치된 헌금함에, 각자 알아서 투입합니다(교회나 성당처럼 헌금이나 봉헌금을 내는 시간이, 사찰에는 따로 없음). 축원카드접수비(일반법회1회용은, 보통1-2만원이며, 기간기도인 3일기도, 21일(삼칠)기도와 100일기도등은, 기도기간, 기도 성격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고, 금액도 사찰마다 다르지만, 보통, 기도의 기간에 따라, 5-30만원 정도입니다(종무소에, 축원카드를 접수하지 않아도, 법회 또는 기간기도 참석에는, 누구나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축원카드를 접수하지 않으면, 기도 마지막에, 기도공덕으로 축원하려는 가족의 주소, 이름을, 스님께서 부처님께 불러 올리지 못할 뿐입니다. 축원카드를 접수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도, 접수된 카드에 의해, 스님께서 부처님께 축원할 가족의 주소, 이름을 불러 올리게 됩니다).

 

수계, 법명~ 수계는, 부처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마음을 모은 사람에게 “계율”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승(부처님, 불법, 스님)에 귀의 하기로 결심하고, 불교에 입문한, 재가 신도는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를 받게 됩니다. 사미(예비 남자승려)와 사미니(예비 여자승려)는 10계, 비구(남자승려)는 250계, 비구니(여자승려)는 348계를 받게 됩니다.(비구니에게 계율이 더 많은 이유는 남녀차별이 아니라, 비구니 승려이전에, 여자로서 더 조심할 사유가 많기 때문입니다)

 

(출가~ 고졸이상 학력, 빚이 없고, 미혼 또는 이혼 6개월 경과, 만50세이하(천태종은 만45세이하), 단, 은퇴자 출가는 만65세이하.  사찰에서, “행자”생활(대개 1년이상)을 하여, "스님이 될 자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종단에 “사미계”를 접수 → “사미계 교육”을 수료하면, “사미승”(예비승려)이 됨 → 불교대학, 승가대학에 입학, 졸업(또는, 4년 안거 수도) → 승가고시(조계종) → 정식스님. 각종단 홈페이지 "출가문의코너" 참조) 

 

평생 한번 받는, 재가 신도의 수계는, 해당 사찰의 종무소에 접수를 합니다(사찰의 규모나 사정에 따라, 수계법회를 실시하는 사찰과, 일반 법회 후, 별도의 수계식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수계의식에는 “연비”라는 절차가 있습니다. “연비”는 약한 “향불”을 팔뚝에 살짝 터치하므로, 약간 따금할 뿐입니다. 이를 견디는 간절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계를 마치면, 법명”이 부여된 “수계증을 받게 됩니다.

 

법명~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계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주는 이름 또는 재가 불자에게 지어주는 이름을 말한다. 스님들의 법명은 “승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남자불자는 두글자, 여자불자는 세글자를 지어 주게 됩니다. 법명은, 부처님의 명호, 스님의 명호 또는, 진리의 뜻을 담고 있으므로, 다들 법명은 다르지만, 법명처럼 살아 가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 의미의 깊은 뜻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불교의 진언

~부처에게 귀의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불교의 진언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위대하게 여기는, 신성한 음절이다. 불교에서는 "옴"을 우주 태초의 소리로서, 우주의 모든 진동음을 응축한, 기본 음으로 본다(오으음처럼 3음절로 길게 발음한다). 그러므로, 육자대명왕 진언(옴마니반메흄), 천수경 기도문(신묘장구대다라니경)같은, 불교 모든 진언은, 우주 근본 에너지인 진동을 의미하고, 계속하면 다양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옴마니반메흄 (육자대명왕진언) ~옴(거룩한),마니(구슬, 보석같이 빛나는),반메(연꽃),흄(이여~). 지혜(연꽃에 비유)=반야=우주의 본성, 우주의 지혜. 해석하면, "온 우주에 충만하여 있는 지혜와 자비가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 그대로 실현될 지어다"라는 뜻.

 

불교기도문 진언 ~ 정구업진언(입으로 지은 죄를 씻어내는 진언/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항마진언(온갖 마구니를 항복받는 진언/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아나야 훔 바아밤 바아라 훔바탁), 참회진언(자기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않겠다는 진언/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아 사바하), 육자대명왕진언(옴 마니 반메훔) 광명진언(아래 참조), 등이 있다.

광명진언 ~ "비로자나불 대관정 광진언"의 줄임말.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이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말), 아모가 바이로차나(중앙의 비로자나여래의 힘), 마하무드라(동방 약사여래의 힘), 마니(남방 미륵여래의 힘 = 일명 보생여래), 파드마(서방 아미타여래의 힘), 즈바라 프라바를타야(북방 석가여래의 힘), (악을 멸하는 힘)으로, "5방위 모든 부처님의 힘"을 뜻한다. 이 진언은,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깨달음을 빨리 이루기를, 기원하는 진언이다. 

그외 일부를 소개하면, 대원성취진언(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훔), 멸업장진언(업장소멸진언/옴 아로늑게 사바하), 백련화수진언(공덕성취진언 / 옴 바즈라 비라야 스바하), 월부수진언(관재소멸진언/옴 비라야 비라야 스바하), 보병수진언(권속 화합진언/ 옴 그리 삼맘염 스바하), 백불수진언(모든 장애소멸진언 /옴 바드미니 바가바제 모하야, 자가 모하니 스바하), 여의주진언(가택안락진언 /옴 바아라 바다라 훔 바탁), 보회향진언(여러 공덕을 회향하는 진언/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마라 자거라 바라훔) → 그외에도, "범어 관세음보살 42수 진언"을 인터넷 검색하여 참조하시고, 범어의 한글 표현은 조금씩 다를수 있음을 참고로 하세요.

(진언도 중요하지만, 불교의 핵심은, 자신을 성찰하며 자아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성찰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 불교의 핵심교리는 맨 아래 블로그 또는 우측,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을 참조

 

자연의 법칙이 심판자입니다 ~ 하늘의 복은 누구, 누구를 가려서 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인 평등으로 모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하늘(조상, 보살등)은 만인 모두에게 차등없이 복을 주는데, 만인의 모두에게 주는 복을 마음의 업으로 인하여 스스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누구를 가려서 비추는 것이 아니듯이, 하늘은 만인 모두에게 복을 주려 모두에게 태양빛을 비추어주고 있는데, 마음이 업으로 그늘이 만들어져서 또는 스스로 그늘로 들어 감으로서, 복을 스스로 받지 못하게 업을 짓고 나쁜 행동할 뿐입니다.

 

마음에 새겨진 선업도 마음의 업이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자연적 법칙으로 이에 상응하는 보상의 복덕이, 악업을 행하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마음의 자연적 법칙으로 이에 상응하는 고통이 주어지므로서, 마음의 업이 해소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어떤 나쁜일을 행하였을 때, 현실 세계에서도 형벌이 주어지지만, 이것으로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업은 해소되지 못하고, 이승이든 저승이든 이러한 업의 해소를 위해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즉, 자연의 법칙이 심판자입니다)

 

인과응보~ 누구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되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선천적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난 이후, 자신의 잘못에 따라,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잘못 없이, 사람은 출생부터, 선천적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집안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안에, 어떤 사람은 신체적 불구로, 어떤 사람은, 수명이 짧기도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생기는, 선천적 “불평등은, 자신의 전생의업보”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생기는 선천적 "불평등과 운명”은, 윤회에 의한, 장기적, “인과응보”의 결과라 생각될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운명~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전생업”에 따라, 사람마다, “불평등하게, 차후 환생을 한다”고 합니다. (살았을 때의 기록은, “행위”마다, 마음 깊숙히 있는, 아뢰아식에 기록되고, 죽게 되면, 육신은 없고, 마음뿐이므로, 마음만 가지고, 저승에서 살다가, 육신을 받아 환생하므로), “이승”에서는, 마음에 기록된 “업”에 따라, 중간에 선업이 있다면, 복덕로, 악업이 있었다면, 고통을 받게 되므로서, “전생의 업”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자신의 무의식(제8식, 아뢰아식)에 새겨져, 자신의 죄를 절대로 숨길 수 없는 죄업이 되고, 공덕은 선업이 됩니다. 이것이 이승에서, 전생과보가 됩니다. 그래서, “전생업”이 “현생의 운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계적으로 파악한 것을, 사주팔자, “사주 명리학”이라 합니다).

 

전생기억은, (죽게 되면, 육신은 없고, 마음뿐이므로, 마음만 가지고, 저승에서 살다가, 육신을 받아 환생하므로), 대부분, 마음에 기록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모든 전생을 기억하게 된다면, 오히려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이승에서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행복은, “전생과보”에 의한 것이므로, 소위,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인가?”라며, 느닷없는, 큰 행운을, 빗대어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숙명론과 불교~ 대대로 누적된, 자신의 "전생 업보"때문에, 불평등하게 태어 났지만, 그것을 현재의 공덕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이고, 변화시킬수 없다는 것이 "힌두교"입니다. 불교는 현재에 짓는 "공덕과 업보"는 "내생의 거울"이 되므로, “죄업을 짓지 마라”는 것이, 주된 가르침입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출생부터, 인간 불평등을 만들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창조주라면, 그 존재를부정해야 하지요?)

 

윤회 ~오온을 통한 생각과 느낌은 나의 본체가 아니고, 그 생각과 느낌을 감지하는 그것, 그 자체가 나의 본체이다. 나의 오온이 소멸해도(육신의 소멸, 죽음), 나의 본체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저승이다. 혹시, 나의 본체가 미망으로, 이승에 미련과 집착과 원한등을 가지며, 이승에 간섭하려 하고, 이승에 머룰려고 집착하는 영혼이, 집착령, 원혼령등의 귀신이다.(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목숨을 끊게 되면, 그 속마음은 이승에 대한 원한이 깊어, 그런 것이므로, 이승에 원한이 있는 일종의 원한령이다). 이들이 천도재의 대상입니다.

 

이들중 산사람의 몸에 들어와,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방언도 하는 것을 빙의라 말하는데, 이러한 빙의한 귀신은 강한 집착력을 보이므로, 천도보다는 원력있는 스님, 법사, 무속인에 의한 퇴치의 대상일 뿐입니다.한편, 이승에 대한 원한과 집착을 버리고, 다음생을 기다리며 살게 되는 곳을 저승이라 하며, 이런 저승의 삶에서 업의 소멸을 위하여, 인연법으로 다시 이승에 오게 되는 자연현상을 윤회라 말함.

 

[인연법으로, 마음뿐인 저승에서, 육신을 받아 이승으로 올 때, 마음에 새겨진, 모든 기억은, 마음의 제일 깊숙한 곳 즉, 무의식(제8식 "아뢰아식")에 저장됨과 동시에, 모든 기억은 잊어버리게 되며, 새로 받은 육신에 의해, 과거의 업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승의 삶(역학에서는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사주"라 하고 있음)]  사후세계의 도표, 저승의 모습은, 블로그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후반부 참조

 

윤회와 아뢰아식 ~인간은 "안,이,비,설,신,의"라는 6가지 감각기관(눈,귀,코,혀,몸,의식)이 있는데, 6번째의 "의식"을 흔히 마음이라 부름니다. 이 제6 "의식"을, 불교에서는 다시 세분하여, 제7식을 "마나스식",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 말 합니다. 현대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제6식을 "의식"의 세계라 하고제7식과 제8식을 "무의식"의 세계라 분류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제8식인 "아뢰야식"을, 마음의 가장 근원적인 무의식의 종자 라 말합니다. 이것이 유식사상 입니다. (마음의 근원~ 유식사상).

 

즉, 이 아뢰야식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선과 악을 분별없이 포용하고 접수하여, 선업이나 악업이 되므로, 우리마음의 가장 근원적인 무의식의 종자이며, 업의 종자라는 것입니다(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자신의 무의식(제8식, 아뢰아식)에 새겨져, 자신의 죄를 절대로 숨길 수 없고, 이것이 업보가 된다. 그러므로, 평소 자신의 행위에서, 악업을 멀리하고, 항상 선업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든 행위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다는 자연적 원리를 이용한 수사가 바로, "최면수사"입니다.

 

즉, “최면수사”란, 최면에 들게 하여, 자신의 내면에, 무의식 상태로 새겨진, 불교에서 말하는, 제8식 “아뢰아식”을, 마음 깊숙이 들여다 보게 하므로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최면을 통한 수사를 말합니다(최면을 통하여, 연령 역행의 방법으로, 전생을 알아 보기도 하는데, 여러 전생의 무의식이 뒤섞여, 정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최면을 통하여, “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 기억을 정정하거나, 지우는 방법으로, 원인 치료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즉, 아무런 이유가 없이, 공포심과 두려움이 있다면, "아뢰아식"에서, 공포심의 전생 원인을 정정하여, 치료에 응용하는 방법입니다)

 

윤회의 증거~ 자연적 원리인, 근원적인 무의식의 종자인 아뢰아식은, 누가 가르쳐 준적이 없음에도, 동물들이 태어나면서 젖을 찾는 행위나, 좋으면 꼬리를 흔드는 행위도, 대대로 훈습된, 무의식인 아뢰아식 작용이 아닐까요? 만약, 생명이 DNA유전자로 프로그램된, 단순한 물질만의 모음이라면, 그 물질에 무의식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모든 생명에는 대대로 훈습된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이것이 윤회의 증거가 아닐까요? 즉, "진화론"은 자연의 법칙인, "윤회"를 바탕으로 성립됩니다(만약,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면, 무엇으로 생명체 후손 진화가 이루어지나요? 과학자들은 “우연히” 유전자 DNA변이가, 발생하여, 적자생존 원리에 의해, 진화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천, 수만번의 “윤회”를 거듭하며, 아뢰아식에 새겨진, 적자생존 “욕망”이, 유전자 DNA변이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 “우연히”보다 합리적 아닐까?)

 

우주와 별 ~우주에는 약 수천억개 이상의 은하가 있고, 각 은하마다 약 수천억개 이상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지구가 속하는 은하의 수천억개의 별중의 하나가 태양이며 그 태양의 혹성이 바로 지구입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센타우리 프록시"라는 별로, 빛의 속도로 4.24년(4.24광년)이 걸리곳에 있으며, 눈으로 보이는 "센타우리 알파A와B"라는 별은 빛의 속도로 4.37년(4.37광년)이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윤회는, 이러한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의 항하사 모래알만큼 많은 세계, 삼천 대천세계의 자연현상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욕망)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불행의 경)

 

* 우리 우주나이 138억년(우주에는, “안드로메다 은하” 같은, 약 수천억개 이상의 “은하”가 존재하고, 각각의 “은하”에는, 약 수천억개 이상의 “별”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우리 은하”의 약 수천억개 이상의 별 중, 하나가 태양이고, 지구는 태양의 혹성일 뿐입니다.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빛의 속도로 3만년정도 걸리는 3만광년 거리에 있다. “우리 은하”의 크기는 약10만광년이며,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로 부터, 약220만 광년의 거리에 있습니다. 접시형 은하는 비교적 신생 은하이고, 구형 은하는 비교적 오래된 은하라 합니다. 거리는, "1a형 초신성 밝기"를 기준으로, 그 "은하"에 존재하는 "변광성"별의 색상 변화에 근거하여 측정하게 됩니다. 현재, 우주 탐사선의 목표는, 태양계를 벗어나, 0.01광년의 거리에서, 다른 행성과 비교를 위해, 태양과 “생명체”가 있는, “지구행성”모습을 찰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 태양탄생 50억년전→지구탄생 45억년전

 

* 우리은하~ “우리 은하”의 모습은, 납작한 나선형 팔을 가진, 접시형 모습의 “나선 은하”이다. 우리가, “우리은하” 속에 있으면서, 지구에서 보는, “은하수”가, 바로, “우리은하”의 단면 모습이다. "우리은하"의 중심부에는 초 거대질량을 가진, 블랙홀 "궁수자리A"가 있다. “우리은하”의 단면(은하수)에 대하여, 수소원자 분포도를 측정하거나, 단면(은하수)에 보이는, 별들을 적외선으로 찍어, 그 색상 분포도를 통하여, “우리은하”의 모습을 파악하게 되었다(“우리은하”에서, 생명체 존재가능성이 가장 높은 별(항성)은, 1997년 발견된, 태양과 비슷하게, 7개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는, “물병자리”방향으로 40광년정도 떨어진, 적색 왜성, “트리피스-1” 항성이다).

 

* 태양계밖 “우리은하”에서, 지구와 비슷한 행성~

① 제임스피블스(미국), 미셀마요르(스위스), 디디에켈로(영국)등 3명은, 우주속 수많은 은하의 분포와 양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이론적 도구를 만들어, 우주진화와 구조에 대한, 해명에 기여하였다. 또한, 태양계밖에 있는 태양과 비슷한, “페가수스51”별(“헬베티우스” 별)에 있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발견한 공로로, 201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② “헬베티우스”라는 별은, “페가수스” 별자리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50.45년이 걸리는 거리(50.45광년)에 있는, G형, “준거성”으로, 이 별이, (자체 빛을 내지않는)“행성”을, 거느리고 있음을 1995년 최초로 발견하였다. 이를 도화선으로,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수많은 외계행성 발견”에 기여 하게 되었음. 즉, 지구처럼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행성은 발견하기 어려운데, 항성(별)과 행성은 각각의 중력을 가지고 있고, 항성(별)이 큰 궤도를 돌때, 작은 궤도를 가진 행성과의 상호간 중력 작용인, 도플러효과(중력의 영향으로, 빛의 색이 변함)를 이용하여 행성의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③ 1997년 발견한, ‘물병자리”방향으로 40광년 떨어진, “트리피스-1”항성을, “도플러 효과”와 “통과측정법”(행성이 항성을 돌 때, 빛의 밝기가 변하는 것)으로, 측정하여, 이 별이 태양과 비슷하게, 7개의 행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7개의 “행성”중에서 4번째, 5번째 “행성”에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이 행성들은 자전을 하지 않아, “행성”의, “항성”쪽 방향으로는 극심한 고온, 반대쪽은 극심한 저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삼천대천세계 ~ 한 부처님이 계시는 세계를 1세계라 말하는 데, 이런 1세계가 1천개가 모인 것을 소천세계라 말한다. 이런 소천세계가 1천개 모인것을 중천세계라 말하고, 중천세계가 1천개 모인것을 대천세계라 말한다. 즉, 대천 세계는 10억개의 부처님세계이다. 이런 10억개의 부처님세계인 대천세계가 3천개가 있으니, 3조개의 우주세계를 이르는 말이 된다. 이것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수도 없이 많은, 무한한 우주세계를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그 무한한 우주세계가 모두 불국토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사바세계 ~불경에서, 우주에는 수도없이 많은 불국토가 있다고 말합니다. 즉, 지구에만 인간과같은 고등 생명체가 살고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승신주",남쪽에 "남섬부주", 서쪽에 "서우화주", 북쪽에 "북구로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구전체가 속하는 세계를 "남섬부주", "염부제", "사바세계"등으로 부름니다.

 

수미산~광대한 우주를 표현하는 불교적 우주관에 기인한, 특정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말한다. 즉, 수미산은 특정 우주에 있어서의 그 중심을 의미하는 상상의 산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부처님의 “교화와 설법의 대상”인, 중생으로 본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저승세계의 영혼, 갈길을 몰라 구천을 떠도는 미혹한 영혼, 자신을 버리지 못하여, 열반에 알지 못하는 “신”등,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중생으로 보며, 이들을 모두 부처님의 설법과 교화의 대상으로 본다)

 

영의 세계에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 ~ ①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이 존재하므로서 중력이 발생하고, 그 중력이 질량주위의 시간과 공간의 경로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미시적 세계인 “원자이하의 세계”에서도 중력이 존재하기에, “양자역학”이라 합니다. ② 영의 세계가, “비유비무”의, “미시적 세계라면, 그곳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인, “사바세계”의 시간과 공간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저승의 세계”나, 부처님 계시는 “적멸의 세계에 있어서의 그 시간과 공간은, 사바세계와 비교하기 힘든 시간과 공간일 것입니다.

 

아승지겁~ “아승지”는 헤아릴수 없는 정도로, 많다는 뜻. “”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무한한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승지겁”이라는 말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무한한, “겁”의 시간이,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의 시간을 말한다.

 

”의 시간~ “1겁”은 “잡아함경”에서 ① 가로, 세로, 높이 15Km정도의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채우고, 100년마다 1알씩 꺼내어, 그 성안의 “겨자씨가 전부없어지는” 정도의 시간을, 넘는 정도의 시간 ② 가로, 세로, 높이 15Km정도의 “큰 바위”를, 누군가 100년마다 한번씩 스쳐지나가며, 마모될때, 그 “바위가 모두 마멸되어 없어지는” 정도의 시간”을, 넘는 정도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겁”을, “1소겁”이라 하고, “소겁” 20개가 모인 것을, “1중겁”이라 합니다. “1중겁”이 4개가 모여, “1대겁”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1대급”은, “4중겁”이며, “80소겁”이 됩니다. “1대겁”은, 하나의 우주가, 생기고, 마모되며, 소멸되는, “성”, “주”, “괴”, “공”이라는, 성립되고(성), 머물고(주), 무너지고(괴), 비어지는(공), 과정인 4개 과정["성"(20소겁),"주"(20소겁),"괴"(20소겁),"공"(20소겁)]을 거치게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별(또는 하나의 은하)이, 성립되고(성), 머무르며(주), 무너지고(괴), 비워지는(공) 과정에서, 소요되는, 상상조차 힘든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불교의 “대겁” 개념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저급하여, 오직 동물적 생각뿐인, 식욕, 음욕, 수면욕만을 가지면서, 자신의 동물적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차후, 동물로 환생할수 있습니다. 일반적 사람은, 식욕, 음욕, 수면욕 외에~~~재물욕과 명예욕을 가지므로, 대부분 인간으로 환생합니다.

 

* 진화론과 윤회론~ ① (인과) → (발생) 영혼, 육신  (수천, 수만번의 윤회 순환으로) 영혼은 점차 성숙(윤회론), 육신은 점차 진화(진화론)  (윤회 순환) ② 영혼이 성숙하여, 인과를 짓지 않으면(즉,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면), 인과소멸 → 인과가 소멸하면, 영혼은, 육신으로 인한, 생사윤회의 고통이 없는, “진여”에 도달(성불)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 이세상 모든 우주를 통털어서도, 자기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다.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즉, 이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이렇게, 세상 무엇보다도 존귀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갈고 닦으면, 삼계의 모든 괴로움도 당연히 없어지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집착 ~ 정당하게, 스스로 노력하여 이루어지는 재물이 자기의 것이지, 정당하지 않고, 자기 것이 되지 않는 재물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을 탐욕이라 합니다. 또, 만남도 인연으로 생겼고, 헤어짐도 인연이 다했기에 헤어진 것입니다. 죽음도 이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기에, 저승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이 다한 것에 집착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무소유~ 마음의 무소유를 의미한다. 부처님 말씀에, “고정된 실체가 없는 ‘나의 소유’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임을 관찰하도록 하여라”(사념처 중 '법념처'를 관할 때). 즉, ‘자아’의 실체는 있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다(무아). ‘자아’의 실체가 고정된 것이 아닌 데, ‘나의 소유’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므로, ‘모든 나의 소유’는, ‘무소유’임을 관찰하여라’는 부처님 말씀입니다('나의 소유'라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닌, '무소유'이다). * 색즉시공 = 비유비무 = 공 = 제행무상 = 양자역학 → 모든 존재는, 영속적 실체가 없으며, [① (불교) 인과, 연기~ ② (양자역학) 관찰자~]와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양자역학에 의한,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논리)

 

탐진치~탐욕(), 성냄(),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탐진치는 지혜를 어둡게 하고, 악의 근원이 되므로 "삼독"이라 함.

(탐진치 삼독 줄이기)~() 당장 눈앞의 갖고 싶은 재물에 얽매이는, 욕심을 부리지 말며 ()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화내지 말고 (치)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낮추고, 항상 옳은 판단을 위해, 선지식을 배우려 노력한다.

 

오계 ~불자의 생활규범으로, 이유없는 살생을 하지 마라(①불살생),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 하지 마라(②불투도), 음행하지 마라(③불간음), 거짓말을 하지 마라(④불망어),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을 절제하라(⑤불음주)의 5가지를 오계라 한다. 불법승(부처님, 불법, 스님)에 귀의 하기로 결심하고, 불교에 입문한, 재가 신도는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를 받게 됩니다. 사미(예비 남자승려)와 사미니(예비 여자승려)는 10계, 비구(남자승려)는 250계, 비구니(여자승려)는 348계를 받게 됩니다.

 

* 부처님은, 열반하시기전, 마지막 설법지 "베살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비구들아, 내가 열반에 든 뒤에는 “계율”을 존중하되,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이,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은 듯이, “계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계율”은 너희들의 큰 스승이며, 내가 세상에 더 살아있다 해도 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계”는 해탈의 근본이니라. 이 “계”를 의지하면, 모든 “선정”이 “계”로부터 나오고,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가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는 “청정한 계를 범하지 말라. 청정한 계를 가지면 좋은 법을 얻을 수 있지만, 청정한 계를 지키지 못하면 온갖 좋은 공덕이 생길 수 없다”. “계”는 가장 안온한 “공덕”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라."

 

십선업과 십악~인과법에 의해, 나쁜 과보를 물리치고, 자신을 좋은 과보(선업)으로 이끌어 주는 10가지 행동 준칙을 10선업이라 말한다. 십선업은, 신(몸), 구(입), 의(생각)의 "삼행처"로 부터 비롯되는, 10가지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십선업이라 말한다.

 

1. 몸(신)으로 짓는 3가지 악업  → 몸으로 짓는 3가지 선업

① 살생 ---------------------------- ① 불살생 (아무런 이유없이, 살아있는 생명을 살생 하지 않는다)

② 투도(도둑질)------------------- ② 불투도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③ 사음(음행)--------------------- ③ 불사음 (부정한 음행을 하지 않는다 / 남의 부녀자를 탐하지 않는다)

 

2. 입(구)으로 짓는 4가지 악업 → 입으로 짓는 4가지 선업

④ 망어(거짓말)------------------ ④ 불망어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바른 말을 한다)

⑤ 양어(이간질)------------------ ⑤ 불양어 (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⑥ 악구(험담)-------------------- ⑥ 불악구 (남을 괴롭히는 험담이나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⑦ 기어(꾸밈말)------------------ ⑦ 불기어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밈말로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3. 생각(의)으로 짓는 3가지 악업 → 생각으로 짓는 3가지 선업

⑧ 탐애(욕심)--------------------- ⑧ 불탐애 (허황된 탐욕을 버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⑨ 진애(성냄)--------------------- ⑨ 불진애 (성내지 않고, 상대방을 언제나 자비롭게 대하고, 자비심을 가진다)

⑩ 치암(어리석음)---------------- ⑩ 불치암 (그릇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언제나 지혜로서 슬기롭게 대한다)

 

* 십악참회 (천수경의 십악 참회 기도문)

①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② 사음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③ 기어중죄금일참회, 양어중죄금일참회,

④ 악구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

⑤ 진애중죄금일참회, 치암중죄금일참회,

 

⑥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제 :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죄도, 부처님을 의지하며, 일념으로 마음을 닦으면, 모두 없앨 수 있으니,

⑦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 (마음을 닦으면)마른 풀이, 눈 깜박할 사이에 불에 타서 없어지듯, 모두 멸하여, 조금의 남김도 없어 진다.

 

⑧ 죄무자성종심기 : 죄는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죄는 무자성이니, 마음 따라 일어난다)

⑨ 심약멸시죄역망 : 마음이 소멸하면, 죄도 역시 없어진다(마음의 “공”함을 비추면, 죄도 "공"하여 없어진다)

⑩ 죄망심멸양구공 :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소멸하여, 두 가지가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아라,

⑪ 시즉명위진참회 : 이것을 일러 진실한 참회라고 말한다.

참회 ~부처님, 보살님앞에,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 즉, 부처님, 보살님전에 과거 자신의 탐욕,성냄, 어리석음(탐진치)으로 인한 잘못을,절을 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는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음을 다짐하는 것을 "사참"이라 한다. 사참을 한후, 죄의 본질은, 인과없이 스스로 홀로 존재하지 않아, “자성”이 없고, 마음따라 죄의식이 생기므로, 부처님을 의지하며, 일념으로 마음을 닦아, "공"함을 비추어 보아, 자신의 죄의식을 소멸시키는, “이참”을 해야 한다. 이것을, 진정한 “’참회”라 말한다(즉, 진실한 사참을 한후, 참선으로 이참을 하는 것을 참회라 말합니다)*108참회경을 읽으며, 1개읽고 한번절하고, 그 다음 1개읽고 절하면서, 108개를 모두하게 되면, 108참회가 된다).

 

무재칠시 ~ 재산이 없어도, 돈 들지 않고, 남에게 베풀수 있는 7가지 선업을 쌓는 방법을 말한다.

① 몸으로~무의탁 노인 돌보기, 남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행위

② 마음으로 ~사람을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기

③ 눈으로~마음을 안정시켜 일희 일비하지 않고, 좋은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④ 말로서~남에게 늘 칭찬과 격려의 말하기를 실천한다.

⑤ 행동으로~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선의의 경쟁을 하되, 상대에게 우선권을 양보한다.

⑥ 얼굴로~항상 따뜻한 얼굴로 남을 대하기

⑦ 상대에게~상대의 겉모습에 좌우되지말고,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준다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것 ~살면서 자신이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재산은 죽음과 동시에 미련없이 자신을 떠나고,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가족도 무덤까지만 자신과 동행을 해주며, 육신 몸뚱아리 조차도 백골이 진토될때 결국은 자신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업식(선업+악업) 자신이 지옥을 가든, 어디를 가더라도 늘 함께 하며, 다음 생애까지도 함께 하면서 운명 행로를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장 먼저 버리는 재산이 제일 소중할까? 아니면, 자신을 영원히 따라 다니며, 이승과 내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업식(아뢰아식)이 더 소중할까?

 

평소 사찰에는 스님이 매일 새벽예불(오전4시), 사시예불(오전10시),저녁예불(저녁5시)을 신자가 있던 없던,혼자서 천수경 예불을 하고 있습니다.이때 그 시간에 맞춰, 스님뒤에서 스님따라 예불을 올려도 무방하고, 아니면, 그 시간을 피해, 혼자서 절을 하거나, 마음공부해도 됩니다. 모두 자유스럽게 하므로, 누구의 간섭도 없습니다. 또 108배 할때는 염주알이 108개 있는 염주를 구하거나, 사찰의 바구니에 비치된 108염주를 이용하여, 절1번하고 염주하나 돌리고, 계속하다보면 염주알이 한바퀴 돌면 108배를 한것이 됩니다.

 

* 염주~ 절횟수를 세는 용도의 “108염주”와 손목에 차거나, 손에 가지는, “단주”가 있습니다. 모든 염주에는 "옴마니반메흄"의 “샨스크리트”글씨(범어)가 쓰여 있다. 또 염주는 불자라는 표식인데, 마귀의 침입이 있을때, 불보살님을 부르면, 호법신장이 보호해 줍니다. 염주는 재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므로, 큰 사찰이나 불교 용품점에서 고르시면 됩니다.

 

주문이나 진언을 외는 방법 이외의 기도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보살님의 명호를 반복하여 외우는 방법(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이를 "염불" 또는 "정근"이라 말함)과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절을 올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람끼리 인사는 (손바닥을 아래로)1번의 절, 죽은 망자에게는 (손바닥을 아래로)2번의 절, 깨달은자인 부처님에게는 (절하는 마지막에, 손바닥을 위로, 즉, 부처님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절할 때 마다, 3번 모두, 손바닥을 위로 하는 것입니다. 일반 제사때는 모두 손바닥을 아래로 합니다)3번의 절을 하는 것이 옛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예법입니다].

 

대략의 기도 방법 ~ ①일반 기도 ~ 분향(이미 분향이 있으면 생략) →3배 → 발원 → [108배, 1천배, 3천배 등등 자신을 낮추고 절하기 ⓑ1천번, 3천번, 1만번 등등 염불하기 (정근. 해당하는 전각의 부처님, 보살님, 나한님, 신령님, 산신님 이름을 적당한 시간 반복하여 부름), ⓒ경전 독경하기 (사찰에 비치된, 경전으로 천수경과 함께, 신묘장구대다라니경 부분을 3번, 7번, 21번등 독경), ⓓ참선하기(적당한 시간)등 / ~ 중에서 선택하여 실시하기] →회향 → 반야심경 봉독

② 약식 기도 ~ 3배→ 발원→ 108배 → 발원(회향) → 3배 ③ 약식 기도 ~ 3배→ 발원→ 3배  약식 기도 ~ 3배(법당이 번잡하고 복잡할 때, 절하면서 발원도 함께하면서 마무리). 

 

일반적 기간기도 방법~도량이 청정하고, 기도자의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 그곳이 바로 영험한 기도처 입니다. 기간기도는, 사찰에서 실시하는 기간기도에 참여하거나, 스님에게 개별적 기간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법회나 축원 기도는 본인의 참석을 원칙으로 하지만, 참석이 어려울때는 종무소에 발원문(축원문)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본인의 참석이 없더라도 축원카드에 의하여, 주소, 성명을 매번 부처님에게 불러 올리게 됩니다.이때 적어도, 입재일과 회향일 만은 참석하는것이 좋습니다), 여의치 않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기도 기간을 정하여 집에서 할 수도 있음.

 

① 입재~ 공양미, 향, 초, 3가지 과일 + 불전(기도비)를 올림니다. -처음 기도일

② 기도기간~ 21일, 49일, 100일, 1000일등의 기도기간을 정한다(입춘, 동지, 칠석, 백중등 특별 기간기도는, 회향일을 역산하여 맞춘다)

③ 기도시간~ 매일 일정한 시간에 기도한다(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루 2번이상)

④ 기도 내용~ 천수경+신묘장구대다라니독경(독경 횟수를 3번, 7번, 21번 등으로 결정한다)+해당 보살님의 이름을 1천번(정근)+발원문 낭독

⑤ 입재와 화향일을 제외한 기간의 공양물~ 향, 다기물(또는정한수)+불전(기도비)를 부처님전에 올린다.(집에서 할 때는 깨끗한 "상"에 올린다)

⑥ 회향~ 입재와 마찬가지의 공양물을 올린다(마지막 기도일).

 

*자신이 정하여, 집에서 기도할 때, 모두 집에서 해도 되지만, ①번 입재와 ⑥번 회향은, 절에 가서 하고, 나머지 기도일은 집에서 기도하면 효과가 더 좋다고 합니다. 집에서 할 때, 그동안 올렸던 불전은 모아서 회향일에 사찰의 불전으로 부처님께 드린다.

회향(여러가지 공덕을 타인, 인연있는자에게 돌려주는 공덕-기도나 염불후, "이 기도나 염불의 공덕을 000에게 돌려드립니다"라고 말하는것)

 

참선 ~ 자신의 인생관 또는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찾는 것"을, "참선"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참선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법성을 꿰뚫어 보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다. 즉, 자신의 본래 면목인 자신의 참모습을 보기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고요함에 들어감으로서,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종교적 실천수행법.→ 마음의 본래자리(진여, 본래면목)를 보기 위해 고요함에 들어간다.→ 마음을, 번뇌가 없는 기초마음인, 원래자리로 돌아가는 "리셋"을 한다.(텅빈 마음상태로, 마음을 비운다)

* 참선방법~ “템플스테이”, “단기 출가”와 함께,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 실시하고 있고,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신청가능한 “시민선방”, “참선선원”이, 전국 여러 사찰에 많이 있다. “선방”에서는 절대 묵언을 해야 하며①좌정→ ②조신→ ③조식→ ④조심 순서로 하게 된다.

 

①좌정~의복, 허리띠를 헐렁하게 하고, 쪼이는 양말등은 벗고,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정한다. 장소에 따라, 대면법과 면벽법이 있다. ②조신~(자세)좌표에 서서, 약간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한 다음, “결가부좌”(아래 참조)의 자세로 좌표에 앉는다. ③조식~체내의 공기를 모두 토해 낸 다음, 자연스럽게 공기를 들여 마시는 것을, 2~3차례 반복한다. ④조심~여러 방법이 있지만, 주로 “수식관”을 하는데, "수식관"은, 숨을 들이면서 “하나”, 내쉬면서 “둘”과 같이, 숨을 들이 쉬고, 내쉬면서(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호흡에 집중하며), "하나","둘"하며, 수를 세고, 다시 “하나”부터, “둘”까지, 수를 세는 행위를 50분정도 계속하고, 10분정도 휴식하는 방법이다. ⑤기타~ 선방에서는 절대 묵언 해야 하며, 졸리거나, 자세가 흐트려지면, “경책”을 자청한다.

 

*결가부좌~ⓐ왼쪽 넓적다리에, 오른쪽발를 얹은 다음, 왼쪽발을, 오른쪽 넓적다리에 얹는다. ⓑ손바닥을 위로 하면서, 왼쪽손을, 발위에 놓고, 오른쪽 손과 가볍게 쥔다. ⓒ어깨 힘을 빼고, 등을 꼿꼿이 세우면서 꽁무니뼈에 힘을 주며, 허리를 세운다. 아랫배를 자연스럽게 내밀며, 상반신을 꼿꼿이 한 채, 턱을 당긴다. ⓓ혀는 넓적하게 펴서 입천장에 붙이고, 입을 가볍게 붙인다. ⓔ눈은 반쯤 뜨고, 시선은 1미터 정도 앞에 두면서, 몸을 앞뒤,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중심을 안정시킨다.

 

부처는 어디 계실까? "비유비무"이고, "비상,비비상"의 세계이며 "공"의 세계인, 적멸의 세계( 적멸 ~번뇌, 망상의 세계를 떠난, 열반의 경지)에 계신다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모든 부처는 사바세계의 모든 번뇌를 떠난,적멸의 세계에 계시기에, 번뇌를 가져야하는 사바세계에 대하여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비상,비비상의 세계, 적멸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아래의 "반야심경원문 뜻해석" 블로그 참조)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까? 과거세의 여러 부처님은 홀로 깨친후, 적멸의 세계에 가버렸지만, 석가부처님은, 왕자의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무소유로서 수행하며, 고통받는 중생을 위한 큰 자비심으로, 기꺼이 가르침을 주고, 적멸의 세계에 가셨음. 그래서, 불자는 석가부처님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그 가르침을 따르지만, 기도는 "부처됨을 미루고, 사바세계 중생을 돕겠다고 서원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여러보살, 나한님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즉, 부처님은, 중생에게 가르침을 주신 영원한,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부처님을 좌우에서 보좌하고 있는 "보살님"이나, "나한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찰은 그냥 자기 가고 싶은날 가면 됩니다.(불심이 깊은 신자는, 기본법회는 모두 참석하고, 마음에 두는 보살기도 1~2 정도 더 참석)

[한달중에 기본법회(매월 음1일 초하루법회, 매월 음15일 보름법회, 사찰에 따라 일요법회가 있는 곳도 있음) → (각 사찰의 전각에 따라 실시하는 기도일) → 음3일 신중(화엄)기도 -법당의 중단에 있는 신들을 신중이라 함. 즉, 여러 화엄신들을 말함/ 음6일 나한기도/ 음8일 약사기도/ 음15일 미타기도/음16일 산신기도/ 음18일 지장기도/ 음24일 관음기도/음25일 미륵기도/등이 있는데, 그 중 1달에 기본법회(일요법회) + 각 전각법회 1~2번정도 마음에 드는날 참여가 적당한데, 더 다녀도 무방합니다/ 다니는 절에서 법회날자를 알려줌.

 

기타특별(기간)기도~불,보살,나한기도(~정한기간/제반시험,각종 소원, 사업성취 발원기도),입춘기도(~입춘일/복맞이기도),산신기도(~정한기간/소원,사업성취 기도),독성기도(~정한기간/제반시험 원만합격발원,소원성취기도),칠성기도(~정한기간/소원, 사업성취,무병장수기도), 칠석기도(~음7.7일/무병장수,가내안녕발원기도,수명과 자녀를 위한기도, 인연,만남,재회기도),백중기도(~음7.15일/우란분절: 선망부모,조상영가, 친족영가, 태중영가(수자령), 유주무주고혼영가를 위한 합동49재천도기도),동지기도(~동지일/액운소멸기도)등이 있음]

 

불교 법회일을, 양력으로 하지 않은 이유 2가지는 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적 명절인, 설날과 추석도 음력을 사용합니다. 사찰의 법회일도 이런 전통에 따라 음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② 역학적 논리에 의하여, 이승은 “양”의 세계이고, 저승은 “음”의 세계입니다. 불,보살님이 계시는 저승세계는 “음”의 세계이므로, “음력”을 기준으로 법회일을 하고 있으며, 저승에 계시는 조상님 제사도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연등, 인등~ 연등의 의미는,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신, 석가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번뇌와 어리석음으로 인한, 무명으로 가득찬 세상에 “지혜의 등불”을 밝힌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처님 오신날(음4.8일)에는 연등을 밝히는데, 1~3일간 밝히는 일일등(1~3만원정도)과 1년동안 각법당에 밝히는 1년연등(각 법당에 따라 5만~15만원정도)이 있음. (망자를 위한 "영가등"은, 서방극락 세계를 의미하는 “흰색”등을 달게 됩니다. 영가등은, “망부 000, 망모 000, 자 000복위”, 그 옆에, 복위자(올린 사람)의 주소를 씁니다. 또, "연등"과 "영가등"은 “부처님 오신날”이 지나더라도, 연중 언제든지 달 수 있습니다). 또한, 삼신각의 삼신중에서 나반존자(신선,신령님)을 모신, 독성/신령님전에는 매년초에 “인등”을 접수받아, 밝히고 있습니다(월5천원정도).

 

연등의 유래는, 석가께서, 사위국의 어느 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 석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여러 사람들은 각자의 신분에 알맞은 공양을 올렸다. 인도 “사바티”의 “난타”라는 여인은, 모처럼 부처님을 뵙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아무런 공양을 올릴 수 없다며, 한탄하였다. 여인은 온종일 구걸하여 얻은 “한푼”의 적은 돈으로, 등불을 밝힐 기름을 사려 했으나, “한푼”으로는 기름값에 턱없이 모자랐다

 

이를 가엽게 여긴 기름집 주인이, “한푼”값의 몇 배나 되는 기름을 주었고, 여인은 이 기름으로, 정성껏 등불을 밝혀 석가에게 바쳤다고 한다. 밤이 깊어가자, 등불들은 하나 둘씩 꺼졌는데, 유독 “난타” 여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홀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부처님의 제자가 이상하여, 부처님께 여쭈어보니, “그 등불은 조금의 거짓도 없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밝힌 등불이라 꺼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한다(이것을 “빈자일등”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빈자일등”에서 보듯, 자랑이나, 과시를 위한 연등의 공덕은, 그 공덕의 의미가 “미미”하다는 뜻입니다. 시주한 연등 값은, 부처님의 법에 따라, 전각도 짓고, 사찰의 보수와 운영에 쓰일 것이므로, 부처님께 시주하였으면, 시주하였다는 사실도 잊어야 진정한 보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사찰을 돌며, 연등을 달기도 하는데, 자신의 신분이나, 분수에 맞게, 적정하게 정성을 다하여, 달면 되는 것입니다. 또 기도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므로, 엄격히 말하면, 원칙적으로 영험도량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질수 있고, 불보살님의 위신력 또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가지므로, 그 기도의 장소가 어디든, 그곳이 청정도량이면, 충분히 여러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소규모 사찰이더라도, 재정이 어려운, 청정도량에 하는, 연등시주 공덕의 의미는,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공덕의 쌓는 법 :①방생(죽게된 생명을 살려 주는 공덕) ②보시(어려움에 처한 사람,병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공덕) ③지계(5계와 십선업을 잘 지키는 공덕) ④염불, 기도(불경을 독송하고, 염불을 하며, 자신을 닦는 공덕) ⑤회향(여러가지 공덕을 타인 또는 인연있는자에게 돌려주는 공덕-기도나 염불후, "이 기도나 염불의 공덕을 000에게 돌려드립니다"라고 말하는것)

 

교종과 선종 ~교종과 선종의 기본적 교리는 같습니다. 다만, 깨달음을 이루는 방식에 따라, 교종과 선종를 구별합니다. 즉, 교종은 연기설등 여러 논리적 교법에 따라서~~, 선종은 오직 무상무념의 참선이나, 화두에 의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교종은 "교법"을 우선시 하면서 "참선"을 하며, 선종은 "참선"을 우선시 하면서 "교법"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목적이 같으므로, 교종과 선종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에게 선종만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논리를 잘모르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종이 주를 이루므로, 불교의 논리를 알리는데 소극적입니다

 

신라 5교9산~신라 중엽과 신라말에 형성된, 교종 5교파와, 선종 9산문을 말한다. 그후, 고려 중기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새로 성립되고, 그 후, 선종9개 산문은, 조계종으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교려시대에는, “5교 양종”이 형성되었다. (즉, 교종 5교파와, 천태종과 조계종의 양종)

교종5교파~①계율종(차후, 남산종. 자장율사) ②법상종(차후, 자은종. 진표율사) ③법성종(차후, 중도종. 원효) ④열반종(차후, 시흥종. 보덕) ⑤원융종(차후, 화엄종. 의상대사) 선종9산문~①가지산문(장흥,보림사) ②동리산문(곡성,태안사) ③봉림산문(창원,봉림사) ④사굴산문(강릉,굴산사) ⑤사자산문(영월,흥령사.현,법흥사) ⑥성주산문(보령,성주사) ⑦수미산문(해주,광조사) ⑧실상산문(지리산,실상사) ⑨희양산문(문경,봉암사)

 

고려 전기에,의천은, (중국의 천태 "지의스님"을 법통으로 하여) "교종"으로 "천태종"을 창종하였다.

고려 후기에, 지눌은, (중국의 육조 "혜능스님"을 법통으로 하여) "선종"으로 "조계종"을 창종하였다(선종 1대 달마, 2대 혜가~6대 혜능).

현재, 조계종(금강반야경을 기본경전으로 함)의 총본산은 조계사, 천태종(법화경을 기본경전으로 함)의 총본산은 구인사, 태고종의 총본산은 선암사.(조계종과 태고종은 원래 하나의 종파였으나, 기혼승에 대한, 승려인정 여부에 따라, 종파가 갈라짐)

 

* 한국 천태종~ 중국 천태 “지의”대사를 “종조”로하고, 고려 “의천”대각국사를 “개창조”로 하였으나, 천태종은, 조선시대에서 그 맥이 끊겼다. "상월원각" 대조사는, 단양 구인사 자리에서 1945년 초가로 시작하여, 콘크리트형 사찰을 짓고, 500년간 맥이 끊긴 천태종을 되살린다는 의미로, 1966년, “대한 불교 천태종”을 창종하였다. 단양 “구인사”는, 전국에 있는, 천태종140여 사찰을 관할하며, 낮에는 논밭을 갈고, 밤에는 기도를 하는, "관음기도" 위주의 종파이다. 부산 “삼광사”는 천태종 제2위 규모 사찰이다(여러 부처님뿐만 아니라, 천태종의 여러 종조 법사들도 모신다).

 

* 조계종과의 차이점~①한국 천태종 → ⓐ기혼승은 인정않고, 비구승만 인정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머리를 깍지 않는 것은 인정한다. 닭고기를 제외한 육식과 음주는 허용한다 ⓑ천태종 사찰에는, 한민족 고유 신앙인, “삼신각”이 없다. ② 태고종 → 출가하여도, 세간과 출세간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원융하므로, 독신인 비구승과 기혼승을 모두 인정한다(현재, 태고종 승려의 약 1/3이 독신인, 비구승이다)

 

하안거 동안거 ~ 평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지내는 수행승이, 여름이나 겨을의 3개월동안, 선원등 일정한 장소에 머물면서, 외출을 금하고 참선을 중심으로 마음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옷 한벌, 양치만 허용되고, 하루 10시간씩 묵언수행을 하면서 무문관(문없는 문을 뚫는 다는 의미)의 수행에 들어간다. 이런 안거로서, 정법을 수호하고 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청정수행의 가풍을 재정비하는 것이라 함.하안거(음4.15~음7.15까지 3개월), 동안거(음10.16~음1.15까지 3개월)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 끝내는 것을 "해제"라함.

 

대처승과 비구승 ~남자승려중에서, 결혼하여 아내와 가정을 둔 승려를 기혼승(대처승)이라 하고, 계율을 지키며 독신인 승려를 비구승(여자는 비구니승)이라 한다. 옛부터 우리나라에는 기혼승(대처승)이 없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대처승이 크게 늘어났다.(일본은 1872년 공식적으로 대처승을 허용함). 이에 해방후인, 1954년 "대처승은 일본의 잔재이므로, 물러나야 한다"는 이승만대통령의 유시 발표가 있었고, 그 결과,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종단에는 기혼승이 전혀 없으나, 여타 종단에는 일부 기혼승을 허용하는 종단도 있다

 

서울 북한산 문수사

 

3대 사찰~ ① 해인사(법보사찰~팔만대장경 보유), ② 통도사(불보사찰~진신사리를 모심), ③ 송광사(승보사찰~16분의 국사를 모심)를 3대 사찰이라 하고, 여기에 부산 "범어사", 구례 "화엄사"를 포함하여, 5대 사찰이라 부르기도 한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법보사찰)~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신라 왕실의 도움으로 창건되었다 한다. “해인”이라는 사찰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해인사는, 화엄근본 도량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국보32호/2007년 유네스코지정)과 장경판전(국보52호/1995년 유네스코지정)을 보존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 사찰이다. 해인사 사찰은 신라시대에 지어졌지만,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장경판전은 조선시대에 지어졌다. 1398년(태조7년)에,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해, 판전을 짓고,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것을, “지천사”를 거친 후, 이듬해 해인사로 옮겼다고 한다

 

해인사를 방문하여도, 예약이 없으면, “대장경”을 장경판전 문틈으로만, 볼 수 있다. 예약은, 해인사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1인,1일당1회,1명만 예약가능/매주 토,일요일, 하루 두차례 오전10시, 오후2시 개방, 한차례 20명씩, 예약자에 한하여 입장/슬리퍼,반바지,민소매등 노출 심한 의상은, 엄격한 문화유산 관리자에 의거, 입장불가) 해인사 사찰마당 바닥에는, “해인도”(만다라)가 그려져 있다(일명 법계도. 깨달음의 세계를, “미로”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원래 명칭은, "화엄일승법계도"). 또 누르면, “부처님 말씀 한마디”가 나오는 “윤장대”, 그리고, 신라시대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선생 동상”이 있다(경북 의성 “고운사”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중창했다 하여 “고운사”라 칭함.  말년에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이 블로그 아래, “알려진 영험한 지장보살 기도처” ⑥경북 의성 “고운사” 부분 참조). 해인사 주차장에는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해인사 인근에는, 유명한 “홍류동”계곡이 있다

 

국보32호인 팔만대장경은,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준비기간을 포함하여 16년간(실제 판각은 1237 ~1248년 12년간)의 국가적 대역사끝에 만든 대장경인데, 그 판수가 8만1258판으로, 8만4천개의 경전말씀이 실려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매일 10판씩 읽어도 모두 읽으려면, 22년이 걸린다는 광대한 분량이다. 한편 거란 침입을 계기로, 고려때인 1010년에 새긴 대장경판을 "초조 대장경판"이라하는 데("초조 대장경판"은,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에 불타버렸다),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린 후 제작한 것이므로, 이를 “재조 대장경판” 또는 “해인사 고려 대장경판” 이라 한다. 대장경~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장”, 계율인 “율장”, 연구 해석서인 “논장”을 “삼장”이라 하고, 이런 “삼장”의 모든 서적과 주석서를, 통털어 집대성한 것을 “대장경”이라 한다.(더 자세한 것은, 이 블로그 끝 부분에 있는 “팔만대장경” 참조)

 

화엄세계~ ① 기세간(유기적 물질세간), ② 중생세간(번뇌로, 윤회되는 세간), ③ 지정각세간(번뇌가 소멸되어, 윤회되지 않는, 지혜 세간)이라는, 3세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를, “일심법계”, “화엄세계”라 한다. 번뇌가 소멸된 부처의 눈에는, 각 중생마다 달리 보일 수도 있는, 유기적 물질세계인 기세간, 윤회되는 (영계를 포함한)중생세간은, 전부 '업'과 '인과'의 총체적 모습이다.

 

* 화엄세계~ 해인사 이름의 유래인, “해인”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하고(), 바다의 거친 파도처럼, 끝없이 파도치는, 번뇌망상이 멈출 때, 비로소, 한없이 깊은 바다 속이, 훤히 비춰 보이는, 경지()”를 “해인”이라 말한다. 즉, 번뇌망상이 멈춘, 여실한 세계가 “진여”의 모습이며, 이러한 고요한 “진여”상태에 들어간 것을 “해인삼매”에 들었다고 말한다. 해인삼매에 들어, 어리석음의 바람과 번뇌의 물결이 잠잠해지면, 참 지혜의바다()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현현하게 된다. 이렇게, 일체 번뇌가 끊어진 가운데, 나타나는 삼매(三昧)는, 과거. 현재. 미래의,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있는, 모든 법이 마음속에 확연하게 나타나므로 해인정(海印定)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부처의 경지이고,  해인삼매(海印三昧)이다(일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 자리는, 무색계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이렇게, 온갖 번뇌의 물결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된 해인삼매의 눈, 참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고, 화엄세계이다. 일심법계, 화엄세계 물질적 유기세계(기세간), 사후세계를 포함한  중생들 세계(중생세간), 참 지혜의 세계(지정각세간)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 모든 법이, 마치 흡사 도장을 찍듯이(),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심법계”, “화엄세계”는,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이며, 객관적 사실의 세계이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룬 경지이고, 우리들의 참된 근본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본래 모습이라고 한다

 

* 모든 존재의 본래적 모습~ “비유비무”(공) 의 모습(저승세계와 귀신을 볼 수 없는 이유 -색즉시공, 비유비무)  (석가 말씀) 영혼은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물질도 아닌것이 존재하므로, 공도 아니다. 즉, 물질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합니다. 즉, 모든 물질의 본질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석가말씀).

 

② (현대물리학) 불확정성의 원리~ⓐ현실적 거시세계 = 위치o+질량o = 물질 측정이 가능. ⓑ물질의 본질인, 미시세계는 = 위치o+질량x 또는 위치x+질량o= 측정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물질이라 말할 수도 없다(위치를 측정하면, 그 질량을 알 수 없고, 질량을 측정하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불확정성의 원리 공식에 의하면, “위치x운동량”이라 되어 있지만, 운동량은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측정이다. 운동량= 질량x속도. 그런데, 보통 말하는 물질 개념은, 움직이던, 움직이지 않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위치+질량이 특정되고, 위치와 질량이 있는 것을, "물질"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불확정성 원리 공식의 운동량 중에서, 속도를 빼면, 질량만 남는다. 즉, 물질은 “위치+질량”이다. 이것이 동시에 측정되어야 “물질”이라 부른다.

 

즉, 미시세계에서는, 물질이라 규정할 수도 없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개념과 일치. 즉, 석가와 하이젠베르크의 물질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 동일함. 이것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음. 즉, 현대물리학에서는, “관측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 색즉시공 = 비유비무 = 공 = 제행무상 = 양자역학 → 모든 존재는, 영속적 실체가 없으며, [① (불교) 인과,연기~ ② (양자역학) 관찰자~]와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양자역학에 의한,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논리)

 

 “눈”이라는 "물질"을 통하여, “비유비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영혼”(귀신)이나, “물질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영혼의 눈, 즉, “영안”이나, “열반"을 통하여, 저승세계, 귀신들 세계, 화엄세계를 볼 수 있다. 즉, “눈”이라는 “물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저승세계이며, 귀신들 세계이다. 나아가, “영혼”의 눈에서, 온갖 번뇌를 제거하여, “진여”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일심법계이며, “화엄세계”이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의 물결이 깨끗이 사라지고, (반야심경의 “조견오온 개공도” → “오온”이 “공”하다는, “비유비무”의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는)진실된, “해인삼매”의 눈, “참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고, 화엄세계이며, 부처의 세계이다. (ⓐ욕계~욕망으로 가득찬 이승과 저승세계. 욕망을 가지고 있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색계~욕망은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무색계~”색”을 버리고, ”비유비무”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신”과 “천인”들 세계).

 

* 중생의 지식 수준과 이해도에 따른 분류는 왜 있나요?~ 초등학생이 곱셈 나눗셈을 배우면, 곱셈, 나눗셈이 전부인 줄을 알게 됩니다. 그 초등학생은, 그 뒤에, 곱셈, 나눗셈 기반의 인수분해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초등생에게 아무리 인수분해를 설명해도 알아 듣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깊은 지혜는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무아"는 인과에 의해, 변동하는데, 번뇌가 없어지면, “무아”는, 소멸한다. 단지 이렇게 이해한 초등생은, 번뇌가 없어져도, “무아”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무아”가 변동되어, “자아”의 기반으로, 비로소, “진여”가 보이게 된다는 것을 모름니다.

 

소승처럼, 번뇌의 소멸로, “무아”도 소멸된다면, 무엇이 존재하여 부처를 이루나요?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음에도, 소승은, 오직, “무아”(번뇌)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면서,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하고, “대승”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을 넘어선, “대승”은, 번뇌가 소멸된, “자아”를 기반으로 현현되는, “진여”를 바탕으로, ① “무아”와 “진여”, ②무지와 깨달음, ③부처와 중생이, 본래 “하나”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이런 본래 ”하나”라는 “진여”의 마음이, 바로, “대승의 보리심”이며, “부처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소승의 “무아”를 기반으로, “무아”와 “진여”가 본래 “하나”였다는 지혜로서, 소승에서 더욱, 발전된 불교가, 대승불교 입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지식 수준차이 입니다. 누구든 처음에 모두 다를 알 수는 없고, 어떤 방법으로든, 배우고 익히면서 스스로 알게 되면, 일승으로 회귀하여, 무지와 깨달음,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하나임을 알게 되고, 본래 “하나”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일심이, "대승"의 보리심이고, 하나라는, 일심의 마음이, 바로 “일심법계”이고, “화엄세계”이며, 그것이 자신의 “본래 마음”이며, “부처의 본심” 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수준 차이를 9가지로 분류하여, 각기, 중생의 근기 수준에 따른 설법을 하였습니다. 이런 분류는, 중생을 각 단계에 알맞게 설법해야 모두 구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 블로그, 부처님 수인, “아미타 구품정인” 부분 참조)

 

적멸보궁 : 적멸보궁은 부처님상을 모시지 않고, 세상의 운행이치인 법 즉, 부처님 진신사리을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불상이 없음)

5대 적멸보궁 ~ 636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산서성 청량산(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와 정골을 나누어 봉안한, 5곳을 말한다. 자장율사(594 혹은 599년 출생 ~653 혹은 655년 입적)

 

① 설악산 봉정암 ② 오대산 상원사의 중대 사자암 ③ 영월 사자산 법흥사 ④ 태백(고한) 태백 정암사 ⑤ 양산 통도사의 5곳이다. 이외에도, 자장율사가 봉안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러 사찰에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나, "사리탑"이 많이 있다. (오대산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5개 산봉우리가 있어 오대산이라 함. 중대에는 "사자암", 서대에는 "수정암", 북대에는 "미륵암", 남대에는 "영감암"이 있다). 최초의 적멸보궁~장흥 천관산 탑산사 (전남도 지정문화재인 "금동여래입상"이 있다

 

5대 적멸보궁과 진신사리~ 자장율사가 5개사찰에 봉안했다는 부처님 진신사리 위치. ①설악산 봉정암(적멸보궁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보물1832호, 5층석탑에 봉안) ②오대산 사자암(적멸보궁안는 방석만 놓여있다. 적멸보궁 뒤, 나즈막한 언덕에 봉안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름), ③사자산 법흥사(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봉안. 정확한 위치는 모름), ④태백산 정암사(적멸보궁 밖에서 보이는, 국보332호, 수마노탑에 봉안), ⑤양산 통도사(대웅전 또는 적멸보궁이라 불리기도 하는, 전각뒤, 국보290호, 금강계단 사리탑에 정골사리를 봉안). 자장율사는 5대 적멸보궁을 지었다. 중국에서 귀국한 643년에, 오대산 월정사를 짓고, 같은해,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경주 황룡사 9층목탑도 건축했다 한다. 황룡사 9층탑은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 설악산 봉정암~ 643년(선덕여왕12년)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며 창건하였다. 이곳 연화대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왼편으로 용아장성이, 오른편으로는 공룡능선이 펼쳐지고, 바로 그 아래 골짜기에 자연석탑을 쌓은 듯한 바위들이 수없이 쌓여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을 세우려 하자, 봉황이 날아와 지금의 자리를 잡아 주었다 하여, 봉정암이라 하였다. 연화대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인, 5층석탑(보물1832호)은, 법당에서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데, 부처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 적멸보궁으로 불리는 주불전은 원래 오층석탑 아래에 있었으나, 석탑이 보이는 맞은 편 언덕으로 새로 불전을 지어 옮겼다. 원효, 보조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17)에는 “원효”스님이, 1188년(고려 명종18)에는 “지눌”스님이, 1623년(인조10)에는 “설정”이 중건하는 등 625이전까지 7차례 중건하였다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봉정암은, 불자라면 평생 한번은 가야 한다는 불교순례지이다, 봉정암 숙박 기도접수는 봉정암 홈페이지 안내를 참조하고, 인제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가는, 마을버스 시간 안내는 033-462-3009. 백담사에서 평지길 도보로, 3시간~3시간30분(휴식포함) +오르막30분정도, 합3시간30분~4시간 정도 소요. 차량으로 갈수 없는 봉정암은 방문객에게 점심공양을 무료 제공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쌀등은,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신심있는 불자가 봉정암기도시, 베낭에 공양물인 쌀을 조금씩 넣어 가지고 산을 오르는, 많은 공덕으로 제공되고 있다.

 

* 양산 영축산 통도사~ 646년(선덕여왕14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석가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영축산과 통한다 하여, 영축산이라 하였다. 통도사라는 절의 이름은,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통도”라 하였다.”삼보사찰”중의 하나이며, 부처님 진신사리가 안치된 금강계단(적멸보궁)이 있어, “불보사찰”로도 불린다.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창건하며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였고, 금강계단을 쌓아 승려의 규범을 관장하고, 법식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하였다고 한다. 이후, 통도사는 신라5교9산중의 하나인, “계율종”(차후, 남산종. 자장율사)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1년(선조 34)에, “유정”대사(사명대사)가 중건하였고, 1603년(선조 36)에 “송운”대사가 증축하고, 다시 1641년(인조 18)에 “우운”선사가 중건하였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한국의 산사- 산지 승원”에 선정된, 7개사찰 중의 하나이다.

 

통도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영축산이 위치하였고, 왼쪽에는 계곡이 바짝 붙어있다. 계곡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제일 서쪽의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총 65동의 건물이 경내에 있다. “대웅전” 및 “금강계단 자비보탑”은, 국보290호인데, 전각 “남쪽” 현판은,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북쪽”은 “적멸보궁”의 편액이 걸려있다. 적멸보궁 쪽에,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봉안한, “금강계단 불사리탑”이 있다. 그러므로, “적멸보궁” 격인, 대웅전(1645년건축) 안에는 불상이 없다.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한다. 문수보살은, 자장율사에게,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과, 불두골, 손가락뼈, 염주와 경전 등을 주면서,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석가모니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영축산 기슭에, 9마리 독룡이 거처하는 연못이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어 비바람을 일으키고, 곡식을 상하게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물, 바람, 불로 인한, 삼재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라고 말했다.

 

자장율사는, 그것을 들고 신라로 귀국하였고, 연못에 와서 독룡 아홉 마리에게 설법을 하니, 독룡 아홉 마리는 곧 교화되었다. 그 중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곡동으로 날아갔는데, 오직 한 마리만이 남아서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율사는 그 용의 청을 들어 통도사에 남도록 했다고 한다. 마지막 한 마리 남은 용이 있는 곳이, 지금의 “구룡지”라 한다(동쪽의 대웅전을 돌아, 서쪽 대방광전 앞에는 “구룡지”가 있다. 이 “구룡지”는,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통도사에서는 이 용을 모시는 “가람각”을 세워 두었다) 자장은, 독룡 아홉 마리가 살던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세우고, 그 안에 진신사리를 안치하였다.

 

입구쪽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박물관인, “성보박물관”을 지나면, 매년 2월중순~3월초에 만개하는, 홍매화가 있다. 더 나아가, 천왕문을 통과하면, 사진찰영으로, 유명한 “홍매화”와 “백매화”가 있다(“자장매”라고 말하기도 하는 데,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하여, 스님들이 이 매화나무를 심고, 이름을 “자장매”라 하였다). 통도사에는 동백꽃도 있다. 매화는, 3월말~4월초에 피는, 벚꽃보다 일찍 핀다. 소장 문화재는, “대웅전 및 금강계단”(국보290호)의 국보1점외, 보물로는, 동제은입사향로(보물334호), 용화전 앞에 있는 “봉발탑”(보물471호), 영산전 “벽화”(보물1711호) 천왕문(2024년 보물지정)등, 보물22점, 지방유형문화재 46건을 포함해, 문화재 약 3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 영월 사자산 법흥사~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이곳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라 하였는데, 1902년 대원각 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신라후기인 886년, 징효대사가 이곳에 선문을 열게 되어, 법흥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이 되어 선종의 법문을 크게 일으켰다. 법흥사는, 큰 금강송이 많아 소나무숲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조계종 33관음 성지의 하나이며,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신, 법흥사 극락전 오른쪽 언덕에는, 징효대사 보인탑(보물612호), 징효대사부도(강원도 유형 72호)이 있다

 

극락전을 지나 적멸보궁에 이르러, 적멸보궁 전각안에 들어가면, 아무런 부처상이 없으며, 대형 “사리함”으로 추정되는 것만 있다(뒤쪽 “창”을 통하여, 언덕 위쪽 부분이 보이는 구조이며, 이 언덕에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말한다. 법흥사에는 대웅전이 따로 없다). 적멸보궁 뒤로 돌아가면, 강원도 유형 73호인, 사리를 봉안 했다는 “부도”(또는 “사리탑”)과 석분(토굴)이 있다. 석분(토굴)은 자장율사가 가시덤불을 두른 채, 수행했던 곳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석분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법흥사 산신각에는 사자산, 구봉대산, 백덕산의 3분 산신님을 모시고 있는데, 특히 백덕산 산신님은 여 산신님이라고 한다.

 

법흥사 인근에 있는, 주천강 계곡은 여름철 유명 계곡 피서지이며, 이곳 저곳 캠핑장이 많다. 인근 관광지로는, 주천강 계곡에 있는 “요선정 돌개구멍"(계곡의 바위들이, 자갈처럼, 몽글몽글한 낮은 큰 바위돌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월 선돌”(기암괴석으로, 선돌 전망대에 오르면, U자형으로 탁트인, 영월 서강의 풍경 함께, 일출과 일몰의 명소이다), “영월 한반도지형(선암마을)”, “영월 청령포”(단종 유배지, 배를 타고 들어감)가 있다

 

* 태백(고한) 태백산 정암사~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는, 황룡사 구층탑과, 통도사 금강계단을 건립하고, 문수보살의 게시를 받아, 태백산 갈반지에 “석남원”(지금의 정암사)을 창건하였다.정암사 뒷편 언덕에 있는, 국보332호 “수마노탑”은, 신비스러운 푸른 빛이 감도는데, 그 탑속에 부처님 진신사리, 가사, 염주등을 봉안하고 있다. 탑은, 정암사 뒤, 정암산 언덕에 있다. 정암사 경내 중앙에는 문수전이 있고,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궁은 수마노탑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지었는데, "적멸궁"안에는 불상이 없으며, “수마노탑”형상의 금박액자를 걸어 놓고 있다. 적멸보궁에서 10분정도 계단을 오르면, “수마노탑”이 있다. 수차례 보수가 이어졌고, 현재의 탑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1972년에 탑을 해체하고 수리, 보수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부처님 사리, 장엄구등과 함께, 정암사 사적 기록이 발견되었다 한다. 사적 기록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마노석” 조각을 주며, 탑을 세워 줄 것을 부탁하였다고 한다(마노는 석영에 속하는 푸른빛 암석인데, 물에서 나는, 푸른 보석이라는 뜻에서, “수마노”라 한다). 그러므로, “수마노탑”은 용궁에서 나온, 푸른 보석의 불탑을 의미한다. 수마노탑은, 상부 금속 상륜부와 그 상부에 달린 풍경이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완벽한 탑의 균형미와 아름다운 자태를 갖추고 있다.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으로, “정암사 수마노탑”은, 국보332호로 지정되었다. 정암사는, 정암사를 기준으로, 서북쪽으로, 고한읍과 사북읍(정선카지노/강원랜도)이 있고, 동쪽으로는, 태백시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만항재와 함백산 그리고 태백산이 있다.

 

정암사에는 자장율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했던 길을, 함께 해본다는 의미의 열반길(둘레길)이 있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한번 더 만나기 위해, 열심히 수행을 했으나, 순식간에, 변장하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뒤늦게 이를 깨닫고 문수보살을 뒤쫓아 갔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된 후, 입적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암사 열반길은, 자장율사가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는 “적조암”과 자장율사 유골을 안장했다는 "뽀족바위", 함백산 만항마을을 지나, 야생화 쉼터가 있는 함백산 만항재 쉼터로 이어지는 길이다(하늘숲 정원이라 불리며, 차량으로 갈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 높이의 도로에 있는, 만항재 쉼터에는 해마다, 7월말~8월초에, 야생화 축제가 열린다). 더 직진하면, 태백시의 남측이다. 태백시에는, 매년 7월 중순~8월 중순까지, “백만송이 해바라기꽃” 축제를 하고 있으며, 태백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역인 "추전"역이 있다.

 

정암사 사찰옆으로 흐르는, 지장천계곡은 1급수에만 살고있다는 열목어 서식지이다(정암사 열목어는 천연기념물 73호. 열목어는 너무 맛이 없어, 벌금을 감수하고 맛보기는 아깝다고 한다). 정암사 마당에는, 자장율사 “주장자나무"라는 주목이 있다. 자장율사가 1300여년전, 정암사를 창건하고, 그 신표로 평소에 사용하던 "주장자"를 마당에 꽂았는데, 그 가지의 일부가 회생한 주목나무라고 한다

 

가평(포천) 운악산 현등사(대선급제사)~ 신라불교는, 눌지왕(411~457)시절, 육로를 통하여,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와, 고구려에서 온, 동진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파하였지만,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이차돈의 순교로, 순교 이듬해인, 527년(법흥왕14년)에 국교로 공인되었다. 가평 현등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후, 불과 9년뒤인, 536년에 인도의 승려인 "마라가미"를 위해 지었다는 천년고찰이다(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서역의 승려는 “마라난타”이다). 일반적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사찰은, 그 진신사리를 탑속에 모시고, 그 탑이 보이는 곳에 적멸보궁을 짓고 있다. 하지만 현등사는, 부처님 진신사리 2점을 탑속에 모시지 않고, 극락전에 모시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런 "현등사"의 또 다른 이름은 "대선급제사"라고 한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에 “현등사”에 들렸던 사람이, 아무런 노력이나 성의없이, 과거급제 만을 바라며, 공물을 올렸고, 과거에 낙방한 후, 다시 들려, 부처님의 위신력을 모욕하였는데, 그날밤 꿈에 9척 신장이 나타나, “타인을 위한 아무런 공덕이나, 급제를 위한 피나는 노력도 없이, 공물 하나로, 성공을 바라며, 감히 부처님을 모욕하느냐”며, 그사람을 죽일 듯이 짓밟고, 혼내며 꾸짖었다고 한다. 이런 꿈이야기를 들은, 그의 부모는 “너가, 부처님과 인연이 깊어 그런 것”이라며, 아들을 위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을 내어주며, 현등사의 중수를 돕게 하였고,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올리며, 3년간 “현등사”에 머물면서 공부하여, 드디어 장원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급제 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영조임금은, “현등사”에 "대선급제사"라는 절의 이름을 내리고, 그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대적광전, 대광보전 (비로전): 비로자나라는 말은, 우주의 진리의 모습인 법신(법성, 불성)을 말하고, 이를 줄여서 비로라 말합니다. 사찰의 대적광전은, 가운데에 법신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법신불), 좌우에 노사나불(보신불) 석가불(화신불,응신불)을 모시고 있는데, 금강산의 최고봉, 오대산의 최고봉, 소백산의 최고봉, 치악산의 최고봉의 이름은 비로봉으로, 이는 그 산의 최고의 높은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대적광전에는, 가운데 비로자나불, 좌우에 보신불로 아미타불 또는 약사불응신불로 석가불 또는 미륵불을 모심.

 

삼신불  법신불 (법성, 불성 = 비로자나불/대일여래)~어떤 경우도 변하지 않는, 본래적 진리의 모습으로의 부처님입니다("비로자나”는 "진여"(법성)을 뜻하는 데, 이를 “의인화”한, 상징적 용어이다).  보신불 (노사나불)~수행과 함께 쌓은 수많은 공덕과 서원이 완성 됨으로 얻어지는, 과보의 결과로 얻어지는, 서원이 완성된 이상적 모습의 부처님입니다. ,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③ 화신불 (응신불)~ 중생구제를 위해, 중생의 몸과 같은 범부의 모습이나, 시대나 지역, 상대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시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과거불 석가불 미래불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석가는, 전생에, 이미 완성된, “호명보살”로서,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 설법하셨고, “자비심”으로, 중생교화를 위해, 오셨기에, 쉽게 깨침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경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생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몸으로(화신), 오셨기에 당연히 “육신”의 제한을 받아, 태어남과 죽음의 고통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대웅보전, 대웅전 ~ (동방)약사불, (중앙)석가불, (서방)아미타불의 삼계불(3개의 방위별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대웅보전" 이라 하고, "석가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모신전각을, "대웅전"이라 한다(일반적 삼계불~약사,석가, 아미타/ 타방불~방위별 다른세계 부처님).

 

대웅전 :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다를 수있지만, 대체로 좌우에, 중생의 모든 환난을 구제하고, 중생에게 이롭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으로 중생을 돕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찰에 따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기도 함. 법당의 상단에는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 중단에는 화엄신을 모십니다(이분들을 신중 또는 화엄신이라 말합니다)

 

만다라~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를 5방위의 그림으로 나타낸것(깨달음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것을 "화엄일승법계도"라 말한다)금강계 만다라(금강정경을 중심)와 태장계 만다라(대일경을 중심)가 있다

          

대일여래- 법계체 성지(있는 그대로, 본래적 법성, 불성을, 체험하는 경지)-중앙- 비로자나불

          아촉불- 대원경지(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청정의 경지)- 동방- 약사여래

          보생불- 평등 성지(자타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경지)-남방-미륵불

          무량수불-묘관찰지(일체 현상을 관찰하여, 자유자재로 가르치고, 중생 의구심을 끊는 경지)-서방- 아미타불

          불공성취불- 성소작지(중생구제를 위해, 해야할 것을 모두 성취하는 경지)-북방- 석가여래

 

사방불 ~ 풍수사상과 결합하여,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사방불이 조성되었다.초기에는 중앙 비로자나불, 동방 관세음보살, 서방 아미타불, 남방 지장보살, 북방 석가불이 조성되었고, 8세기 이후에는, 중앙 비로자나불,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미륵불, 북방 석가불로 변천되었다. 미륵불과 석가불은, 북방 또는 남방으로, 그 방위가 바뀌어 혼용되어 조성되기도 하였다

 

신중(호법신중)과 신장(호법신장)신중(호법신중)은, 항상 설법을 들으며, 불법을 찬양하며, 불법을 옹호하는 “신”들을 말한다. 주로 욕계”천상의 신들이 해당한다(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낙변화천, 타화자재천등, 욕계 천상의 신들-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 중, 사후세계 도표 참조). 이들 “호법신” 중에서 “무력으로 불법을 옹호하고, 불자와 스님을 수호하는 “신”을, 특히 “신장”(호법신장)이라 말한다(그러므로, “호법신중”은, “호법신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신장”(호법신장)은, "신중"(호법신중)에서, "무력"을 사용하기도 하는, 범천왕, 도리천의 제석천왕, 사천왕, 인왕(금강역사), 팔부신중, 등이 있는데, 그 중 최고신은 “범천왕”과 ‘제석천왕”이다

 

* 범천왕~범천왕은, “허공계”의 최고신으로, “사후세계 도표”에도 나와있지 않는데, “범우주를 의미하는, 범천의 왕”이다. 범천왕은, 힌두교 이전의, 브라만교의 우주창조신 “브라흐마”를 의미하며, “브라흐마”의 한역이 “범”이다(인도 우주 창조신 “브라만”은, 성경에서,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지구중심적, 천동설을 말하는, 가짜 창조신, “야훼”(여호와)가 아닌, 범우주적 창조신으로의, “범신”을 의미한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는 범천에 대하여, "이 "겁"(이번 우주)이, 처음시작될 때, "광음천"에 살던 어느 “신”이, "행"이 다하고, "복"이 다하여, 색계 "광음천"에서 목숨이 끝나, 윤회하여 “허공계”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가 보니, “허공계”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 “신”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홀로, 저절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아무도 나를 창조한 자는 없다. 나는 모든 중생 아버지로서, 자유자재하며, 이 “허공계”에서, 나 뒤에 나타나,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은, 모두 나의 미묘하며 자재로운 조화로, 내가 창조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신” 뒤에 나타나 존재하게 된 자는, “태초부터 허공계에 존재하는, 저분은 자재하며, 중생 아버지로서, 미묘한 능력을 가진, 우리들의 창조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바라문”들은, “태초, 허공계에, 존재하는, 그 분은, 무한한 존재이고, 그 분의 조화로 우리들이 창조된 것이므로, 우리들은, 유한한 존재이다”라, 생각하고, 무한한 존재라 생각하는, 그를, “창조주”라 믿게 되었다결국, 창조주, 브라흐마 “범신”은, 아무런 “인과”없이, “나홀로, 저절로,  (아무런 인과없이 "무"에서, "유"로)존재하게 되었고, (아무런 인과없이, "무"에서 "유"의 "태초 우주에너지"를 만들어)우주창조를 주관하게 되었다”라는 것이, 바라문교의 “바라문’들이 말하는, “범신”(브라흐마)에 대한 주장이다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석가는, (범신의 전생을 이미 알고 있기에)“바라문”들의 이런 점을 비판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인과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홀로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것(천신)은 없으며, 인과없이 “천신”이 “창조”할 수도 없으며, 인과없이 “천신”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없다”라며, 이런 “범신”의 우주창조를 비판하는, 석가의 설법 내용이 “아함경”에 나온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범신”을, 창조주가 아닌, 천상 “허공계”에, 존재하는, “천신”이다” 라고 생각한다(불교에서는 창조신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범신은 "브라만교"와 브라만교를 이어받은, "힌두교"에서는, 우주창조신 "브라흐마"를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허공계의 “천신”이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은 후, 과연, 대중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할까?라는 의구심에, 다른 부처처럼, 조용히, 그냥 “적정열반”에 들까?라며, 고심하고 있었는데, 허공계 “범신”이 제일 먼저 찾아와서, 불법에 귀의하고, 석가에게, “깨달음을 전파하여, 중생을 구원토록 권청하였다”고 한다(자비심의 보살행). 이를 “범천권청”이라 말한다. 이후, 이 허공계 “천신”을, “범천왕”이라 불리게 되었고, 범천왕은, 설법을 경청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불자와 스님을 보호하는, 호법신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의 열반 후, 860여년이 흐른 후에, 탄생한 “힌두교에서는, 힌두교 이전에 있었던, “브라만교의 “창조신, “브라흐마”가 불교의 호법신장이 되었다는, 불교측 주장에, “브라흐마”의 불교귀의를 완전 부정하고, 오히려 석가를, 인도 3신 중의 하나인, 질서유지신, "비슈누"의 “화신”이라 주장하며, 석가 부처님을 힌두교의 "화신"으로 흡수하였다)

 

* 제석천왕~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은, “욕계”천상의 "사왕천" 다음의 하늘세계로, 욕계의 2번째 천상이다. 도리천의 주인이며, “도리천의 모든 신들을 주재하는 최고의 신”을 ‘제석천왕”이라 한다(불교의 하나님). 도리천은 도합 33개의 천상이 있어, “33천”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32천의 천상 위에 "선견성"이 있고, 그 선견성에, 모든 33천의 세계를 다스리는 "제석천왕"이 계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석천왕은, 선견성에 머무르며, 사천왕과 그 주위의 32천왕을 통솔한다. 또한, 도리천(33천)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석천왕은, “사바세계”의 하느님을 의미한다연말에는 제야의 범종소리를 33번을 친다. 이것은 사바세계의 모든 33천(도리천) 중생들도, 제야의 이 범종소리를 듣고, 편안한 마음과 참회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에서 33번을 치게 된다

 

또, 한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고, 그래서 예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살았다. 이런 한민족의 “하나님 신앙”에, 하늘에는 “도리천”과 그 도리천에 "제석천왕”이 있다는 불교가 전래되자, 단군을 "제석환인"이라 표기하였다. 즉, 하나님 아들인, 한웅과 단군 “왕검”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불교에서 “제석천왕”이므로, “단군신화”에는, 민족의 하나님인, 단군 “왕검”을 묘사할 때,. “제석환인”(제석하나님) 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환인→한인→한임→한님→하느님 즉, "환인”은 하느님의 고어 이다. 조선말에 쓰던 하나님의 표준말은,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도리천의 제석천왕은, 불법을 옹호하며, 불법에 귀의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호법신장이며,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불교의 “하나님”이다

 

제석천왕의 무기는 그물인데, 이것을 “인다라망”이라고 하여, 세간의 얽히고 설킨 “인과”를 그물에 비유한다. 이것을 "천망"이라 하는 데, 누구도 "천망"의 그물을 빠져 나갈 수없다. 제석천왕은, 사바세계의 하나님이지만, 공물은 절대 요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인과에 의해 공정하게 판단한다. 즉, “인과”에 근거하여, 불법을 호위하고, 불자와 스님을 보호한다.사찰에는 불교의 하나님인 "제석천왕"을, 부처님의 설법을 경청하는, 후불탱화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불교 전래이후, 한민족의 하나님(일명 칠성님)과 독성님(일명 나반존자), 산신님(일명 산왕대신)은, 삼신각의 별도 전각으로 모시고 있다(이 블로그 후반부, "삼신각,삼선각"부분 참조)

 

경주 석굴암에는, 부처님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범천왕”오른쪽에는 “제석천왕”을 두고 있다. 진주 청곡사의 “제석천상”은, 손바닥을 위로 하면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삼층석탑에는, 1층 탑신이나, 상층기단에, 범천왕과 제석천왕을 새기고 있다. 또한, "범종"과  부도탑의 탑신표면에, 범천상과 제석천상을, 새기기도 하였다(대개, 범천왕은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고, 도리천의 제석천왕은 “금강저”를 들고 있거나,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사천왕 ~사찰의 초입에 있는 사천왕은, 원래 인도의 신이었는데, 부처에 항복하고 불법에 귀의하여, 욕계 천상의 최하위 하늘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신으로, 동방의 지국, 남방 증장, 서방 광목, 북방 다문천왕을 말한다. 이들을 사천왕 또는 사대천왕이라 부른다. 이들은 사찰에 들어 오려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사천왕은 위로는 중앙의 "제석천왕"을 사방에서 호위하며 섬기고, 아래로는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한다. 제석천왕을 포함하여 오방신이라 부르기도 함) → 맨 아래의 블로그 "사후세계도표 저승도표 삼계의 모습"  블로그 참조

 

사천왕의 구분은,

지국천왕~착한사람을 괴롭히는 자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즉,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지국천왕이라 부른다. 수미산 동쪽편에 살고 있으며, 온몸은 푸른색이고 손에는 양손으로 비파(신라시대) 또는 검과 보주(조선시대)을 쥐고 있다.

 

증장천왕~자기와 타인의 선근(착한 마음)을 늘어 나게 하는 (키우는)역할을 한다고 하여 증장천왕이라 부른다. 수미산 남쪽편에 살고있으며, 온몸은 붉은 색이고 손에는 검과 보주(신라시대),또는 여의주와 용(조선시대)을 쥐고 있다

 

광목천왕~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부릅뜬 모습의 위협으로 나쁜 자들을 물리치는 역활을 한다고 하여 (눈을 크게 부릅뜸)광목천왕이라 부른다. 수미산 서쪽편에 살고 있으며, 온몸은 백색이며 손에는 여의주와 용(신라시대) 또는 탑과 삼지창(조선시대)을 쥐고 있다.

 

다문천왕~항상 부처님도량을 지키며 법문을 듣고 불법을 전하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 다문천왕이라 부른다. 사천왕중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비사문천왕이라고도 한다. 수미산 북쪽에 살고 있으며, 온몸은 검은색이고 손에는 탑과 삼지창(신라시대) 또는 양손으로 비파(조선시대)를 쥐고 있다. (지국~동방 푸른색증장~남방 붉은색광목~서방 백색다문~북방 흑색으로, 역학의 방위별 색상과 같은 색상이고, 사천왕이 들고 있는 악기는, 신라시대에는 "약사여래불 대원공덕경"에 따르고, 조선시대는 "다라니집경"에 따른 것이므로, 조금씩 다름)

 

팔부신중(천룡팔부)~"신중"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중의 한무리인데(즉, 설법을 듣는 "신"들의 무리를 말함), 불국토를 지키는 8구역에 존재하는, 8명의 호법“신”을 통칭하는 말이며, 불법을 경청하고, 불법을 수호하며, 불자를 보호하는 "호법신”을 말한다.“팔부중” 또는 “팔부신장”, "천룡팔부"라 한다. 법화경, 무량수경,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팔부중은, 경전에 따라, “여래 팔부중”과 “사천왕 팔부중”으로 분류된다. 원래 인도 토속신이었지만, 현재는 불법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다. 8구역의 여덟가지의 모습이며, 대개 짐승이나 새들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여래 팔부중~ ⓐ천신(삼계의 천상에 존재하는 여러 신을 의미하며, 불법을 경청하며, 오른손에 금강저, 왼손은 허리에,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 용왕(물과 관련된 신령스런 "신"을 의미하는데, 설법을 들으며 불법을 수호한다) ⓒ 야차(북쪽 다문천왕의 권속으로, 불법을 경청하며, 방패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 건달바(향만 찾으며, 향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빈둥빈둥 놀지만, 설법을 듣고, 정법을 찬탄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 ⓔ 아수라(아수라 세계의 수많은 신들 중에서, 불법을 듣고, 지키는 존재) ⓕ 가루다(가루라, 신화적인 “새”로서, “금시조”라 말하기도 하며, 얼굴은 사람모습이지만, 입은 새의 부리모습으로 표현된다. 설법을 듣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이다) ⓖ 긴나라 (사람인지, 짐승인지, 도저히 구별이 되지 않는, 머리에 뿔이 있는, 도깨비 같은 모습의 존재인데, 설법을 경청하고, 불법을 수호한다) ⓗ 마후라가(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데, 불법을 경청하고, 땅속의 모든 요귀를 쫒아내는 임무를 맡고 있는, 사천왕의 권속이다)

 

 사천왕 팔부중~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비사문천왕(다문천왕)의 각 사천왕 권속으로, 보살→천신→사천왕→팔부중으로 구성되는, 위계 질서속에 있다. 사천왕 팔부중은, ⓐ용왕(물과 관련된 신령스런 존재를 의미) ⓑ야차 ⓒ건달바 ⓓ비사사 ⓔ구반다 ⓕ벽협다 ⓖ부단나 ⓗ나찰이다.

 

금강역사~”인왕역사”라고도 불리며, 사찰문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금강저"를 손에 들고 불법을 수호하므로, "금강신", 금강야차"라고도 한다(특이하게,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는 아무런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 사찰문 좌우에 배치되며, 오백 야차신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다. 금강역사는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듣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밀적금강", "금강밀적", "밀적역사"라 말하기도 한다. 손에 금강저를 지니고, 입을 벌리고 있는 좌측상은,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입을 다문 우측상은,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야차~요괴스런 면과 함께, 공양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물과 아이를 갖게 해주는 힘이 있다. 비사문천왕(다문천왕)을 따르는 무리이며, 야차대장을 “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팔부신중의 일원인, 야차는 원래 나쁜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즐겼던 식인귀였다. 석가의 설법회에 참석하여, 말꼬리를 잡아 망신을 주고, 잡아먹으려 하였다. 말꼬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설법에 귀를 기울이다가, 자신의 악행을 크게 깨닫고, 석가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고, 석가는 “야차’에게, 타고난 천생의 신력으로, 불법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보통, “나찰”과 함께, 지옥에서 형벌을 담당한다. 야차들이 거느리는 “귀왕”들 셋이, 각각 명부 심판관인 시왕(십왕)을 보좌한다고 한다. 이들은 “염마졸”, “귀졸”이라 한다. “지옥도”에서 죄인을 불가마에 쑤셔넣는, 머리에 뿔이 나고, 시뻘건 이빨을 가진 흉물스럽게 생긴 도깨비들이 “야차”다. 금강역사도 “야차”이며, “귀면와”(귀졸모양기와)도, 이 “야차”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한다

 

맞배 지붕, 팔작 지붕~건물의 앞뒤에 만, 지붕면이 있는 구조를 “맞배지붕”이라 말한다. 맞배지붕에 더하여 좌우 측면에도 지붕이 있는 구조를 “우진각지붕”이라 하는데, 사례가 거의 없으며, 해인사 대장경판전이 우진각 지붕이다. “팔작지붕”은 건물의 앞뒤, 좌우 측면, 그리고, 앞뒤와 좌우 측면을 연결하는 부채살 모양의 지붕이 있는 구조이며, 높은 기술력과 많은 비용이 드는 지붕형태이다. 팔작지붕은 궁궐이나, 사찰을 지을 때 주로 사용

 

주심포식 구조다포식 구조 ~ 수직재와 수평재(대들보, 창방)가 잘 맞추어져, 기둥과 보가 서로 구조적으로 완벽히 "결속된 것"을, “공포라 하는데, 이런 “공포”가 주기둥 위에 “만” 있는 구조를 “주심포식 구조”라 한다. 주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기 위해, 수평재인 “창방”(대들보) 위에, “평방”이라 말하는, 두꺼운 나무를, “창방”과 수평으로, “창방” 위에 얹어, 서로 완벽하게 "결속하게"(공포) 하여, 화려한 모습으로 건축한 구조를 “다포식 구조”라 한다

 

심우도 십우도 목우도 ~대개, 대웅전 사찰의 처마밑 벽에 그려진 깨우침에 이르는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낸것. 즉, 인간은 누구나 본심인 불성이 있는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보리)에 이르는 과정을, 소를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한 그림이다.

 

심우~자신의 본심은 무엇인가를 찾는다.

견적~깊은 마음속에 들어가서 소(마음)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견우~야생에 방목되어 있는 소(마음)를 발견한다.

득우~소(마음)를 발견하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하는 삼독에 찌든 검은 소(마음)이다.

목우~소(마음)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해, 코뚜레를 하는 등, 삼독에 찌든 소(마음)를 묶어두려 노력함.

기우귀가~마침내 길들여진 소(마음)를 끌고 피리를 불며, 자신의 집인 마음의 본향으로 돌아간다. 번뇌와 망상,욕망이 끊어진 소(마음)는 무심하여, 흰색으로 변하였고, 목동도 본성인 마음에서 나오는 피리를 불며, 무심하게 집(마음의 본성)으로 돌아온다.

 

 망우존인 ~집(본성)에 돌아와 보니, 소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마음)만 남았다. 이제까지의 소는 자신을 깨닫기 위한 방편(번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교만과 자만도 벗어나게 된다.

인우구망~일원상으로 표현하며, 지금까지 방편이었던 소가 사라진뒤에는 (주관을 초월하며)자기자신도 잊어야 한다는것. 즉, 깨침도, 깨쳤다는 법도, 깨쳤다는 사람도 없는, 모든 것은 공(불성)으로 돌아 간다는 생각에 이르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반본환원~텅빈 일원상에 자연그대로의 모습이 비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므로, 번뇌도, 망상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지혜(반야)를 체득한다.

입전수수~이제는 부처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인, 중생에게 복과 덕을 베풀 포대를 메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 하기위해 거리로 나선다.

 

삼승 ~성문승(들어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 연각승(12인연의 인연교법, 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벽지불승, 독각승), 보살승(깨달음 추구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함께 실천하는 사람)의 3가지 깨달음을 “삼승”이라 합니다. 부처는 대중에게 3승을, 방편적으로 말했지만, 결론인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본심을 밝히면서, 자비심을 실천하는, "보살승"(일승불)만이, 성불을 이룰수 있다 하였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보살은, 보리(깨달음)+살타(중생)의 준말이다. 보살승은, 위로는 깨달음(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자비로서 중생(살타)을 교화한다는 뜻입니다. 즉, 보살승의 수행목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며, 보살승의 수행자세는 "자리이타"이다. "자리이타"는, 자신을 이롭게 하며, 동시에 "남도 이롭게 한다"는 뜻.

 

자비심 ~ 보상을 바라지 않고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며, 중생을 배려하여 "중생과 함께하는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한다. 보살승은, 이런 자비심으로, "타인과 함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행을 한다.(도와주고, 특정종교를 믿어라~이런것은 거래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호국불교 ~조선에서 그렇게 불교를 탄압하였음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살생을 금하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승병을 일으켜 국가를 지키려 했던, 즉, 국가와 민족을 자신의 종교보다 우선시하며, 자신의 깨달음은 다음생으로 미루더라도, 대의를 위해 "중생과 함께 하려는 정신"이, 이 땅의 호국불교입니다. 이러한 호국불교는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의 고통을 가엽게 여기며, "중생과 함께 하겠다"는 자비심의 마음이 가지는, 일종의 보살행이다.

 

소승과 대승 ~소승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법당이나, 어느 곳에서 홀로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은 이룰수 있을 지라도, 타인을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거나 봉사를 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수입이 없습니다. 아무리 법당에 있고 깨달음을 이루더라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식사때가 되면, 마을이나 시내에 내려가 탁발을 하여, 그 탁발한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오직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위한 참선만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깨달음 내용이 아닌, 타인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등은 불교가 아니라 말한다.

 

대승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적극적으로 타인과 함께 하려는 자비심의 보살행을 하는것입니다. 이러한 자비심의 보살행의 방법으로, 어려운 중생들의 고충을 상의해주고, 이승을 떠도는 어리석은 중생인, 영가(귀신)를 설득하는 천도재나 49재를 해주며, 여러사정으로 제사를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중생을 위하여, 제사를 위탁받아 지내 주기도 하며, 중생과 함께 하려는 적극적인 정신으로 시중에 포교당도 개설하여, 대중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설법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등, 중생의 일상사에 적극 개입하여 보살행을 하는 불교를 대승이라 한다

 

이러한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을 가엽게 여기며, 중생을 배려하여, "중생과 함께 하는 마음"을가지는, 부처님의 본뜻을 실행하는, 대승적인 일을 하므로서, 어느 정도의 수입이 생기고, 이런 수입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탁발이 없더라도 어느정도의 의식주가 해결될수도 있으며, 사찰의 유지보수 비용에 충당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비심의 보살행의 유무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입니다.

 

소승(출가승 위주)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각 가지 보살로 현신하는 보살의 존재와 대승경전을 부정합니다. 오직,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 적멸의 세계에 가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승입니다. 대승(출가승+대중)은, 부처가 되는 마지막 과정으로, 중생을 위한 대원을 세우고, 각가지 보살로 현신하여, 중생을 도운다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 아래, “관음보전 원통보전” 부분, “관자재 보살”~보살의 지혜 참조)

 

대승경전과 소승경전~ 석가여래는, 열반에 들기 얼마 전, 영산회상에서 열린 법회에서, 자신이, 45년동안, 설법한 “아함부”의 가르침이, 사실 “방편”이었다고 말하면서, 석가여래는, 무한한 시간 이전에, 이미 성불한, 부처임을 밝힌다. 그리고, 성불하기 위해서는 성문승, 연각승(벽지불)은 방편이고, “삼승”중에서, 오직, “보살승”으로만, 성불이 가능하다고 밝혔다(일승). 모든 보살은,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중생들이 있는 그 사바세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사성제”와 “12연기”의 수행만으로, 열반에 이르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 석가여래는 본격적으로, “보살”의 존재를 말하면서, 일승으로의, 대승 설법을 시작하였다.

 

초기에 부처님께서, 2500년전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중 설법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켜, 이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까”를, 고심하였을 것입니다. 즉, 지금의 현대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색즉시공”, “공”, “중도”개념을, 부처님께서 2500년전의 무지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본 소양없이, "처음"부터, 대승법을 하기는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적 개념인, "공", "중도"등의 설법은 차후로 미루고, "번뇌의 소멸"에 관한 기본적 소양을 가르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기본적 소양을 바탕으로,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면, 결국 깨달음의 “진여”를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대승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하면서, 계율과 수행을 특히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500년전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유인적 방편 말씀을 하시며, 12연기등 기본적 소양을 가르친 것이, 부처님 초창기 설법인, 아함경등의 "소승경전"입니다. (즉, 소승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미 알고 계신, "세상의 본질적 모습을 감추고", "세상현실" 모습에 대하여, 현대인의 눈에 모순적으로 보여지는, "적당히" 수준에 맞게 설명한 것은, 2500년전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맞춘, 방편입니다). 일단, 불교에 들어오면, 세상의 본질적 모습을 가르치기 위한, 기본 소양으로, "번뇌와 번뇌의 소멸"에 관한,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제법무아 등의 개념을 가르친 것입니다. (현대인도 대부분 이해를 못하는, "색즉시공", "공", "중도"개념을, 2500년전 지적 수준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에 가르친 소승법은 대승법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며, 어느정도 기본 소양이 쌓였을 때, 열반에 들기 전에서야, 비로소, 본론대승설법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처럼, 부처님의 본심은 대승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얼마 전 열린, 영산회상 법회에서, 수행으로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사람에게, 부처님께서 본심인, 대승으로 설법한 경전이 바로,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등 “대승경전”입니다. 그러므로, 수준이 있는, 현대인은, 어느 정도 기본소양이 쌓이면, 부처님께서, 바른 법진리를 직접적으로 설법하신, “대승경전”으로 공부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물론, 번뇌에 관한 기본적 소양이나, 계율과 수행방법론에 있어서는, 소승과 대승이 함께 공유 합니다).

 

용수대사(용수, 용수보살/생몰150년? ~250년?) ~ 인도승려로, 대승불교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인도중부 데칸고원의 “비다르바”출신인데, 처음에 브라만교를 공부하였으나, 차후, 소승경전을 깊이 공부하였다. 그 후, 대승경전인, 반야경 등을 공부하여, 인도에서, 석가의 연기설을 바탕으로, 대승의 공사상과 중도이론을 체계화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인도에, 강원을 열어, 중국 등의 유학승을 가르쳤다.

 

용수대사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어, 무자성이며, “공”(비유비무)이라 하였다. 반야경에서 말하는, “”은 없음이 아니라,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연기”이며, “공”은,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중도”(비유비무)라는 것이, 석가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용수대사는 밝혔다. 또, 석가 가르침, 반야경에서, “” 즉, “중도”는, “생하지도, 멸하지도, 상주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라는 뜻의 가르침에 대하여 해설하였다. 즉, 인도승려인, “용수대사”가, 석가의 대승사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이해하고 해설하였다. 이러한 인도 “용수대사”의 “중론” 등은, “구마라습”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 중국 ‘삼론종’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구마라습인도승려로, 오호십육국시대, “구자국”(현재 중국 신강)에 와서 살았다. 전진”의 왕 “부견”이, “구마라습”을 영접하려 했으나, “구자국”왕이 반대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강제로 잡아 왔고, 중국에서 “국사”까지 오르게 되었다. 구마라습은, 처음에 소승불교를 배웠으나, 차후, 대승불교에 귀의하고, 용수대사의 “중론”등을 번역하는 등. 인도 불경을 무려 384권을 번역하여, 중국불교 “3대 번역가”가 되었다. 용수대사의 “중론”, “십이문론”, “백론”의 3론을 번역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삼론종”의 유사종단인, 중국 “법성종”이 성립되었고, 그의 번역서인, “성실론”은 중국 “성실종”으로, “법화경”은 중국 “천태종”으로, “아미타경”은 중국 “정토종”이 되었다.

 

소승의 대승비방에 대한 반박

(소승은, 대승으로 가기 위한, “기본 소양”이고, “방편론”이다)

 

1. [세존]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들은, 이 연기과 연생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 이것을, 석가는 현세와 내세, 중음신, 윤회를 부정했다고 주장한다. ⟹ 이 글에서, 계속, “나는”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음은, 석가처럼(“나”처럼), 지혜를 증득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하지 않고, “진여”에 들기 때문에 전생, 내생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을, 석가께서, 윤회를 부정했고, 현세도 부정했고, 사후세계도 부정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처의 경지와 중생의 경지를 구별 못하고, 주장일 뿐이다. “고귀한 제자”는 지혜를 증득한 제자를 말한다. 지혜를 증득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는, 생사윤회의 현세와 내세, 중음신, 윤회가 없지만, 번뇌를 소멸못한, 중생은, 생사윤회의 현세와 내세, 윤회를 위한 중음신, 그리고 윤회가 계속된다는 뜻이다.

 

2.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관자재보살은 그 눈 가운데서 해와 달을 내고 이마 가운데서는 대자재천을 내며, 어깨로는 범왕천을 내고, 심장으로는 나라연천을 내며, 어금니로는 대변재천(大辯才天)을 내고, 입으로는 풍천(風天)을 내며, 배꼽으로는 지천(地天)을 내고, 배로는 수천(水天)을 내니, 관자재의 몸은 이와 같이 여러 천을 출생시키느니라(불설대승장엄보왕경)

 

→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주장이고, 창조를 주장하는 말이라 주장한다. ⟹ 관자재 보살은 진여를 체득한 자입니다. 진여는 자신의 본성이고, 법성이다. 이 법성(진여)를 “의인화”하여 부르는 이름이, “비로자나불”(법신불)이다. 자신의 법성(진여, 비로자나)에서, 번뇌의 물결이 치면, 생노병사의 윤회가 생기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게 된다(내세). 즉, 자신의 법성은 모든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진여(법성)에 번뇌가 일어나면, 생사윤회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관자재보살 즉, “법성의 어깨에서 혹은 배꼽에서, 어금니에서 생명의 탄생이 시작되었다”라는 설법은, 2500년전,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하신 방편설법입니다. 번뇌(업)가 모든 만물의 근원이지, 자신의 법성 즉, “진여”를, “의인화”한, “비로자나불”이 창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법성이 모든 만물의 근원이고, 자신의 “법성”에 번뇌가 묻어 생명이 탄생되고, 윤회가 이루어 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번뇌”를 없애면, 원래의 법성으로 돌아가, 윤회없고, 내생도 없다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법성을 “의인화”한 것이, 곧 비로자나불(법성불)입니다. 이것을, “법신불”의 창조라 주장하는 망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 → 이것으로 소승은, “모든 것은 소멸하고, “무아”도 소멸하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소승처럼 모든 것이 소멸하고, 법성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도 소멸하고 없다면, 윤회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다는 뜻입니다. 즉, 소승의 주장은, 번뇌없는 부처가 되면, "부처자체도 소멸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번뇌의 소멸을 위해,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깨달음을 이루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것은, 석가의 기본 개념인, 윤회를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따라서, 윤회를 부정하면,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 형성된 것은 당연히 소멸한다. 하지만 "진여(법성)는 소멸하지 않는 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반야심경 내용중 "불생불멸"참조) 번뇌가 소멸된 존재를 "법신불"이라 말하며, 이를 의인화하여, "비로자나불"이라 합니다. 이 법성(진여)에 업이라는 번뇌가 묻어, 윤회하는 데, 진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주장은, 번뇌없는 부처가 되면, "부처 자체도 소멸된다는 주장"이므로, 불교논리, 자연의 법칙인 윤회,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윤회 진리를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 입니다. 즉,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되므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보현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행원(원을 세워 이를 행함)을 상징하고, 문수보살은 반야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즉, 보현보살은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이고, 문수보살은 중생들이 보리심(깨달음의 마음)을 내도록 하는 지혜의 좌표가 되는 존재입니다

 

오대산 상원사~705년, 또는 724년(성덕여왕4년 또는 성덕여왕23년)에, “보천”, “효명” 두 왕자가 당초 “진여원”으로 에 창건하였다. 기존의 전각은 1946년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47년 새로 건축한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문수보살과 문수동자의 두분을 모시고 있다. *625병화로부터 상원사를 지켜낸 한암스님~625때,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 앉아, 법당과 함께 나를 불태우라며, 상원사를 지켰던, 분이 “한암스님”이다. 한암스님은, 1933년에 울진 불영사의 “불영사사적비”를 세웠다. 아래, 영험한 나한기도처 “불영사”참조.

 

* 오대산의 이름은, 주봉인 비로봉(1,563m)아래, 동대산(동대), 상왕봉(서대,수정암), 두로봉(남대, 영감암~나옹선사, 사명대사가 주석하였고, 오대산사고가 있었던 곳), 호령봉(중대, 사자암~적멸보궁이 있다), 비로봉(북대, 미륵암~나옹선사가 주석)등, 다섯 봉우리가 편편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 한다. 오대산 중대 "사자암"에 있는 적멸보궁에 오르면, 중대를 중심으로 빙둘러 쳐진, 산봉우리들을 볼 수있다. 적멸보궁에서 5분~10분정도 아래, 중대 “사자암”이 있고, "사자암"에서 10~15분정도 아래, “상원사”가 있다. 오대산 초입에는 “월정사”가 있다. (상원사에 주차장 있음. 상원사로 가는 버스도 있음. 상원사에서 도로를 따라, 도보10분(차량은 5분 )정도 가면, “중대사자암” 입구에 닿게 되고, 이곳에서, 5분정도 계단을 오르면, “중대 사자암”이다.  이 “사자암’에서 10분정도 오르면, 오대산 “적멸보궁”이다).

 

오대산 "사자암" 적멸보궁터는, 비로봉(북대)에서, 중앙의 효령봉(중대)으로 툭 튀어 오르는, 용머리에 해당하고, 적멸보궁 아래, 샘물은 "용의 눈"에 해당하므로, "용안수"라 이름 지었다. 그 아래의 "사자암"은, "용의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사자암" 적멸보궁은 어사 박문수도 감탄했다는,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졌다. 후사가 없던 부모가 “산청 법계사”와 서울 북한산 "문수사"에서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어사 박문수인데, 문수보살이 아들을 주셨다하여, 이름을 "문수"로 하였다고 한다. 오대산 "사자암"에는 "비로자나불"(법신)을 모신 "비로전"이 있다

 

①상원사 동종(국보36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다(이 동종을 본, 독일의 학자는, 그 아름다움으로, 이 동종 하나만으로도, 박물관의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725년(성덕왕24년)에 제작된 상원사 동종은,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보다 45년 앞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성덕대왕신종”(국보29호, 771년제작, 경주박물관), “용주사 동종”(국보120호),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국보280호, 국립중앙박물관,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에 있었던 사찰).

②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221호)과 복장유물(보물793호)~세조임금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사사한 세조임금은 몸에난 피고름의 종기에 시달렸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전국의 온천과 맑은 계곡을 찾았다. 마침 월정사에 들린후, 상원사에 가던중에, 물이 맑은 계곡에 내려가 몸을 씻게 되었다고 한다. 세조임금은 종기가 있어 피고름이 있는 몸을 보이기 싫어, 신하들이 없는 곳에서 몸을 씻었다고 하며, 마침 계곡에서 놀고있는 동자승을 발견하고, 등을 씻어달라 부탁하였다.

 

세조임금은 동자승에게 "어디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마라"며 부탁하였고, 이에 동자승은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직접보았다는 말은 하지마세요"라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후, 세조임금의 오랜동안 고통받던 종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세조임금은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으며 문수동자상을 그리게 하였고, 이 그림을 바탕으로 목조문수동자상을 조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상원사에 모셔진, 국보221호 "목조문수동자좌상"이라고 합니다(월정사~상원사 사이의 계곡에는, 세조가 목욕을 위해 옷을 걸었다는 "관대걸이" 명소가 있다. 세조임금은, 문수보살을 “2번” 친견하였는데, 충북 영동 “반야-사”와 오대산 “상원사”에서 각각 친견하셨다 한다).

 

이런 세조임금이 친견한, 목조문수동자좌상을 상원사에 봉안할때, 복장유물을 넣었는데, 이 복장유물을 1984년7월에 발견하였고, 이 복장유물이 보물 793호로 지정된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입니다. 여기에는 발원문 2점, 대광광불화엄경, 묘법연화경등 전적류 13점, 종기의 피고름과 누런색 얼룩이 있는 명주저고리 1점, 천수다리니경이 찍혀있는 생명주 저고리 1점등 복식 2점, 사리3점등 총 23점의 복장유물이 나왔는데, 이 복장유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현재 보관되어있습니다.

③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보물1811호)과 복장유물(보물1812호)~ 보물1811호인, 상원사 "문수보살 좌상" 복장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보살상(보물1811호)은, 1661년(헌종2년)에, 전라도에서 활동하던, “회감”등 5명의 조각승이 강원도 사찰조성에 참여하였고, 승려 “의천”이 발원문을 작성하였다는, 조성내력이 적힌 발원문, 후렴통, 반야바라밀심경, 묘법연화경 6권등, 문수보살 복장유물은, 보물 1812호로 지정되었다.

④상원사 목조 소형동자상 3점(강원도 유형161호)~ 문수보살과 문수동자의, 좌우와 가운데에 있는, 3분의 소형 목조동자상을 말하며, 가운데에 두손을 모으고 있는 동자는 “선재동자”를 나타내며, 연꽃을 들고 있는 좌우의 동자를 포함하여, 유형161호이다. 또 상원사 문수전 앞에 고양이가 세조임금의 옷자락을 물고 놓아주지를 않아, 불상뒤에 숨어있던 자객으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는 고양이 석상이 있다.

 

세조와 관련된 길은, 

오대산 선재길(월정사~상원사)과 속리산 세조길(법주사~복천암/이 블로그 아래쪽 "영험한 미륵보살 기도처" 속리산 법주사 참조)이 있다

 

*오대산 선재길 ~”선재”는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의 지혜를 얻기 위해, 깨달음의 목적을 향해가는,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선재길은 자신을 돌아보는 “선재동자”의 구도 길을 뜻한다. 선재길(9키로, 3시간)은 버스나 차를 타고, 상원사에 올라, 월정사로 내려 가는 것이 편하다

 

상원사로 가는 버스55번코스(진부~월정사~상원사)~진부터미널(진부역X)에서, 버스”진부”출발→ “먹거리마을” 버스정류장(민속촌주차장/식사를 하면 주차비무료. 이곳에 성보박물관 있음) → 바로 옆에, 오대산 전체 주차료 징수소(주차료 5천원) →  (민속촌에서 "일주문"까지 1.2키로/도보20분)→”일주문”(버스정류장) → 오대산 전나무 숲길(1키로/도보20분) → 월정사 버스정류장 (월정사주차장) → "상원사"(비포장도로, 상원사까지 버스있음,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9키로 도보3시간/상원사주차장) → 중대 "사자암"(도보 15분/차량5분)→ 오대산 "적멸보궁"(도보 10분). *버스시간-진부터미날에서 7시50분부터~ 17시 40분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9차례 출발/ 상원사에서 9시50분부터~ 18시25분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8차례 출발(도착 : 진부터미널/진부역X).

 

*오대산 월정사~643년(선덕여왕1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 자장율사는 중국 산서성 청량산(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귀국후,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으로, “초암을 짓고 머물은 곳”이, 현재의 월정사터이다(자장율사는 머물면서 적멸보궁을 완성했다). 그 뒤, "수다사"의 “유연” 장로가, 암자를 다시 짓고 살면서 월정사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1307년(고려 충렬왕33년)에, 중창하였으나, 조선말에 소실되었고, 다시 중창하였지만, 625때, 국군에 의해, 작전상의 이유로, “17동의 전각”과 “소장 문화재”가 모두 전소되었다. 1964년이후, 탄허스님, 만화스님등이 꾸준히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일주문의 “월정대가람”의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지금있는 “적각전”은, 원래 과거 칠불을 모신 “칠불보전”이었으나, 중창하면서, 석가를 모시게 되어, “대웅전”이라 명명하였는데, 탄허스님이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전각이름을, “적각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 초기 작품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48-1호), 구층석탑 앞에서, 바닥에 꿇어앉아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일명 약왕보살, 국보48-2호)가 있다(탑해체 수리시, 발견된 청동거울, 금동향합, 진신사리경등 12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464년(세조10년)에, 세조의 왕사인 신미, 혜각스님등이, 임금의 만수무강을 위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세조가 시주물과 함께 보내면서 쓴 글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292호)이 월정사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왕실의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외 강원도 문화재자료 “육수관음상”, “부도 22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책을 찍어, 당초,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등 4곳 “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본을, “묘향산사고”로 옮겼다가, 강화도 “마니산사고”를 거쳐, 임진왜란이후, 1660년 강화도 “전등사”의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실록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깊숙한 산속에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를 건립하였다

 

정족산 사고(국보 151-1호)~. 강화도 “전등사”의 “정족산사고”에 보관 중이던, 왕조실록은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서울로 옮긴후,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현재의 “정족산사고”건물은 1931년 이후, 없어진 것을 1998년에 복원

 

태백산 사고(국보 151-2호)~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각화사”인근에 있었는데, 1945년 해방 전후, 화재로 건물이 없어지고, 현재는 터만 남았다. 경북 봉화의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인근에 있는 “각화사”는 676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조정은, 1606년(선조39년)에, “태백산 사고”(봉화군 석현리 산126-1)를 건립하고, “각화사”에서 왕조실록을 수호하고, 관리토록 하였다. 그 후, 일제에 의해, 총독부로 옮겨지기 까지, 약300년정도(1606년~1913년), 이곳 각화사에서 실록을 보관하였다. 현재는, 부산 국가기록원에 보관하고 있다

 

오대산사고(국보 151-3호)~ 오대산 두로봉(남대)의 남쪽에 있는, “영감암”에는, “조선왕실 사고” 유적이 있다. 오대산에 주석하시던, 휴정(일명 서산대사)의 제자, 유정(일명 사명대사)스님이, 일본과 임진왜란 교섭을 마친후, “영감암”에 계시던 중, 1605년에, 왕조실록의 안전한 보전을 위해, 이곳 영감암에, “오대산사고”를 지었다고 한다. 그후, 오대산 “영감암”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총독부에 강탈당하였고, 2006년에 반환받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하여 왔다.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는 “성보박물관”과 “왕실 의궤박물관”이 있다. "왕실 의궤박물관"을 새로 단장하여, 2023.11.12일 “국립 왕조실록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이던, 오대산사고본을 이곳으로 옮겨, 실록과 의궤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사명대사(1544~1610)~1558년 15세에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하였다. 1575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대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수복하였다. 후퇴한 왜군은, 한양에 집결하였고, 1593년 3월, 식량확보를 위해, 양주로 이동하는 왜군을, 서울 수락산 인근에서, 양주목사 등과 함께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서울 노원평 전투). 이를 계기로 왜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또, 의령에서 권율장군과 함께, 왜군을 격파하였다. 1604년에는 선조임금의 국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덕천가강”과 강화를 맺고, 3,500여명의 포로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후, 가야산 “해인사”에서, 1610년(광해군2년) 입적하였고, 밀양 “표충사”에 그 위패를 모셨다(아래, 영험한 약사기도처, “공주 갑사” 참조).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 오대산 전나무 숲길은, 부안 내소사, 남양주 광릉수목원과 더불어 한국3대 전나무 숲길이다. 숲길의 시작은 약 1,000년 전, 월정사 앞에 심은 전나무 아홉 그루였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나옹선사”가 부처에 공양을 하고 있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공양그릇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오대산 "산신령"이 소나무를 꾸짖고, 앞으로, 전나무 9그루가 "소나무를 대신"하여, 사찰을 지키도록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1천년 동안,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월정사를 지키게 되었다 한다. 현재 최고령 전나무은 370여년이며(수령 600여년인 최고령 전나무는 2006년 태풍에 쓰려졌다), 현재, 평균수령 80년의 전나무 1,700여그루가 있다. (전나무 숲길의 오대천 건너편에는, 무장애 탐방로가 있어, 원점을 회귀하는 “순환탐방로”가 된다. 월정사 오대천은 천연기념물인, 열목어 서식지이다)

 

월정사 단기출가 체험학교~ 월정사에는, “선”명상학교와 2~3일간 체험하는 “템플스테이”도 있지만, "한달간"의 “단기출가” 체험을 할수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템플스테이와 달리 단기출가는 삭발을 한다). "시민선방", "선"명상학교, "템플스테이"와 "단기출가 체험" 신청은, 각 사찰의 홈페이지 참조. 단기출가는, 다른 큰 사찰에서도 운영하기도 하므로, 단기출가 사찰 확인과 그 운영 여부및 일정은 직접 사찰에 일일이 문의 해야 합니다.

 

알려진 영험한 문수보살 기도처 ~ 서울 북한산 문수봉 문수사~ 고려 예종4년(1109년)에 탄연국사가 문수봉아래에 있는, 천연동굴에 문수굴과 문수암을 창건함. 고려말 태고 보우국사가 이곳에서, 청의동자를 만난 인연이 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수많은 고승대덕의 주석처가 되었다 한다. (“태고 보우국사”는,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하였고, 북한산 문수사에서, “청의동자”를 친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1382년), 용문산 “소설암’에서 81세로 입적하였다. 보우국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로서, 9산통합과 한양천도를 주장하였다. 공민왕이 천도를 위하여, 한양에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일부 신하가 고려 중엽, 서경(평양) 천도운동이 좌절되어 일으킨, 묘청 반란사건의 예를 들며 천도를 반대하자, 결국 좌절되었다

 

어사 박문수의 부모에게 후사가 없어, “산청 법계사”와 함께 북한산 "문수사"에서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암행어사 박문수인데, 문수보살이 아들을 주셨다하여, 박문수로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성 “칠장사”에는, 어사 박문수가, 꿈속에서 나한을 뵙고, 과거 시제를 받아, 장원급제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이승만대통령의 어머니가 “파주 용미리 용암사”와 더불어, 이곳에서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이승만대통령이라 한다.이런 인연으로 이승만대통령이 4.19직전에, 82세의 고령임에도 친히 등정하여, 이곳 종무소의 “문수사”라는 현판 글씨를 남겼으며,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고 한다. 북한산 문수사는 “오대산 상원사”, “경남 고성 문수암”과 함께, 3대 문수보살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대통령이 참배한 "문수굴"은 영험한 나한 기도처로도 알려져 있다.

 

* 양주 천보산 회암사 ~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1174년(고려 명종4년)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보우”국사(조선조 “보우”대사와 다른 분)가 “회암사”에서 출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2세기에 이미 존재하였던 사찰이다. 1328년(고려 충숙왕15년)에, 인도의 승려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고, 그 후, 1378년(고려 우왕4년)에 “나옹”선사가 중건하였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여기서 깨달음을 얻고, 조계 “선종”의 법향을 크게 날렸다.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승려수는 3천여명에 이르는, 조선초기까지 전국에서 제일 큰 사찰되었다. 태조 이성계를 도운 “무학대사”가 주석하면서, 태조가 즐겨 찾았으며, 조선 초기에는, 불자 “세조”의 지원으로, 유생들을 누르고, 선조 왕들의 제사를 맡으며, 번창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천대를 받을 때, 태조는 양주 회암사를 거처로 삼았다. 이성계가 행궁으로 삼을 정도의, 조선의 “최대 사찰이었다).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억불정책에도, 1424년(세종6년)의 기록에는, 회암사에 250여명의 승려와 사찰경내가 1만여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1472년 정희왕후가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그 뒤, 명종의 섭정을 하던 문정황후가 “보우”대사를 서울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며, 불교 중흥정책을 펼 때는, 전국 제일의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이 “숭유억불”정책으로 선회하여, 1565년(명종 20년) 사월초파일에, 보우대사가 잡혀가고, 그 뒤, 사찰은 불태워지고 페허가 되었다. 1821년(순조21년)에는, 지공선사, (지공의 제자)나옹선사, (나옹의 제자)무학대사, 3개의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다(탑비의 비석만, 고의적으로 훼손). 1828년 조정에서 세 승려의 비석을 새로 제작하면서, 탑비가 있는 곳(“회암사지”에서 뒤쪽으로, 4백미터 떨어진 천보산 기슭)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이름을 계승하게 하였다.

회암사는, 조선 중종때의 “보우대사”가 주석하면서, 전성기를 맞았지만, “문정왕후”사후에, 원인 모를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회암사지”로 남아 있는데, 군민들은, 회암사지 복원운동을 펼치고 있다(현재는 추계재단인, 사립 서울 중앙여자고등학교가 소유하고 있다). 남원 “실상사”가,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된 사실과 함께, 회암사는 불교중흥에 앞장선, “보우대사”의 주석으로, 유생들이 “주적”으로 삼았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유생에 의해 희생된,“조선불교사의 "최대 법란지”가 "회암사"이다. “선조실록”에는, 선조28년(1595년) 6월에,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이것을 가져다 조총을 주조하는 용도로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임란이전에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런 기록으로 보아, “회암사지 범종”을 녹여, 조총으로 주조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문화재는, 회암사지(사적128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387호~1997년, 산불로 탑비가 훼손되었다), 무학대사 부도탑(보물388호), 무학대사 쌍사자석등(보물389호), 화암사지에 있는 석가 사리탑(보물 2130호)가 있다. 경기 유형문화재로,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나옹대사 부도 및 석등, 그리고, 무학대사의 탑비가 있고, 민속자료1호인 회암사지 맷돌등이 있다.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 회암사지 대형 잔디공원회암사지 공원(당간지주와 보물2130호인, 석가 사리탑, 각 전각의 유적들) → 도보5분(400미터) → 현재의 “회암사”(좌측 언덕에 선각왕사비, 우측 언덕에 지공선사, 나옹선사의 부도와 탑비, 그리고 조선전기 최고의 부도로 손꼽히는, 무학대사의 부도 및 쌍사자석등, 탑비)가 있다]. 회암사는 도심에 가깝고 공원도 있어, 휴식과 휠링을 위해, 많이 찾는 템플스테이가 유명하다.

 

* 나옹대사~ 무학대사의 스승이자,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이자, 조선 “최초의 왕사”이면서, 조선 “마지막 왕사”가 되었다. 1376년, “해수 관음기도처”인, “부산 해동 용궁사”를 창건한, “나옹선사”는, 고려 우왕 2년, 갑자기 밀양 “죽림사” 로 떠나라는 왕명을 받게 된다(죽림사는, 현재의 표충사인데, 임란이후, 서산, 사명, 영규대사, 3명 스님의 임란유공자 위패를 모시고, 사찰이름을 “표충사”로 바꾸게 하였다). 밀양 “죽림사”로 가는 도중에,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입적하게 되었다. 나옹선사의 갑작스런 입적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나웅선사의 짧은 싯귀는, 지금도 유명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토굴가”–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골에, 한 칸의 토굴을 지어놓고, 소나무 문을 반쯤 열어놓고, 돌밭 길을 포행하니~ 시절은, 버들가지가 푸른, 춘삼월 봄날에, 훈훈한 봄바람이 건듯 불어오고, 뜰 앞의 백종화는 곳곳에 피었는데,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봄날 싱그러운 자연의 빛깔들이 더욱 좋다. 이런 것 중에서, 무슨 일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중요한 것인가? 무상함에 대한 집착을 초월한, 진묘한 향을, 옥향로에 꽂아두고, 아주 고요한 밝은 창가에 묵묵히 홀로 앉아서, 한 십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생사없는 길을, 기필코 깨치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니, 일찍이 모르던 일,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 생사에 메이지 않고, 세상사가 "극락"이요, “불국토”로다. 

 

세상사람 다 모르는 일을, 나 혼자 훤하게 깨달아, 마음의 달이 밝게 떠올랐는데, 어둡고 긴 밤 같은, 전생의 업과 현생의 업에 이끌려, 참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 체, 지금껏 헤메고 다닌 것이었네~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와 같이,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가, 다 무상설법을 하고 있는데, 달마조사가 “소림굴”에서 면박 수도하면서, 마음으로 전하는 불법을 어찌하여 멀리서 찾는 것인가? 

 

청산은 아무 말이 없고, 맑은 물만 잔잔히 흐르는데, 시원한 맑은 바람, 슬슬 불어오니, 이것이 어떠한 깨침의 도리인가? 하나의 밝은 이치가 확연히 드러나니, 살림살이가 풍족 할 수 밖에 없구나. 천봉만학 깊은 산골, 맑은 물과 푸른 솔잎, 풀잎을, 나무 그릇에 담아서, 양식으로 일용하지만, 백 구멍이 나면 어떻고, 천 구멍이 나면 어떠랴, 임금 용포보다 더 값진 것이네. 의식주에 관심이 없으니, 세상사 욕락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부질없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어지고, 깨끗해지니, 잘못된 집착이 붙을 곳 없고, 4상이 없으면, 나의 참모습이 훤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것이 진짜 나의 법성 일진데~ 만물이, 부처 아님이 없고, 법문이 아님이 없는 가운데, 나의 “법성” 만이 뚜렸이 밝을 것이니, 구멍 없는 피리를, 불지 못할 이유가 없고, 줄 없는 가야금을, 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깨달아 무위자성이 확연히 드러나면, 그것보다 더 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즐거운지, 돌사자가 춤을 추고, 솔바람이 화답을 하네~ 부처의 경지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모든 세상사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인데, 온 천지가 부처님 세계이고, 극락세계이라~ 그대로 다 깨달음의 나무에, “우담바라” 꽃이 만발하게 피었더라

-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모인, 모든 불법승 그리고 모든 사부대중에게 머리 숙여 귀의합니다- 나옹-

 

*조선 “보우대사”(1501~1565년)~ 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는, 유교시대인 조선에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문정왕후는, 중종이 죽자, 어린 아들 명종의 “섭정”(대신 정치)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전국에서 불교를 중흥시킬, 승려를 추천받았다. 함경도 감사 “정만종”의 추천으로, 여러 시험을 거쳐, “보우대사”를,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를 하도록 하면서, 불교 중흥을 이루도록 하였다. 보우대사는 유교의 나라인 조선에, “승과”를 개설하고 “도첩제”를 실시하였다(이후, 승과에 장원급제한 사람은, 서산대사, 사명대사등등이 있다). 유생의 반발이 극심하였고, 수천통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문정왕후는, 이를 철저히 막았고, 오히려, 누구든 사찰에 출입하려면,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를, 모든 사찰에 세우도록 하였다(남양주 봉선사에는 지금도 “하마비”가 있다). 이에 호응하여, 보우대사는 “불교 중흥”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추진하였다.

 

“문정왕후”가 죽자, 유생들의, 보우대사를 처형하라는, “상소”는 더욱 빗발치게 되었다. “명종”은, 유생들의 편에서, “보우대사”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다. 제주목사 “변협’은, 손발이 묶여 있는 보우대사를, 장사들을 시켜 몰매를 가하게 하여, 죽게 하였다(“보우대사는, 숭유억불정책의 조선에서, 청정하게, “일편단심”으로,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죽게 된, “조선의 불교 순교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은, 승과와 도첩제를 페지하였다. 불교는 다시 암울한 시기에 빠지게 되었다). 서산, 사명대사는, “보우대사”의 죽음을 보면서, 권부에 가까이 하는 것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호랑이와 가까이 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확연히 깨달았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 사명대사는, “승병”을 일으키어 공을 세웠지만, 관직을 내리며 붙잡는, “선조”임금과 조정대신들을 모두 뿌리치고, 산으로 돌아갔다

 

* 서울 원각사지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원각사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흥복사”였다. 태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삼았다. 효령대군의 건의로, 1464년(세조10)에, 세조가 중창하고, 이름을 “원각사”로 개칭하였다. 연산군 이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고, 보신각종이 있던 사찰이었다. 그 후, 숭유억불정책으로, 유생들은 계속적인 불교 배척운동을 하였고, 이에 호응한 연산군은 훼철 운동(사찰을 헐어서 치워버림)을 하였다. 1504년(연산군10)에, 연산군은 원각사를,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고,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공가로 폐기되면서, 자연적으로 원각사는 소멸되었다. 조선후기까지, 원각사가 있었던, 무너진 절터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폐사된 원각사에 있었던 보신각종은, 1536년(중종31)에 숭례문(남대문/ 국보1호)으로 옮겨 달아, 보루의 종으로 사용하다가, 1594년(선조27)에 지금의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서울 종로의 지명은, “종이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종로라 하였다(현재, 종이 있는 전각을 보신각 또는 종각이라 부른다). 연말 제야에는, 보신각종(원각사종)을 33번을 친다. 이것은 사바세계 33천(도리천) 의 모든 중생들도, 이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편안한 마음과 참회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에서 33번을 치게 된다.

 

종각에 있는, 보신각종(보물2호)을 제외하고, 원각사지(탑골공원)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2호)과 “대원각사비”(보물3호 / 원각사 창건 내력을 기록한 비석), 2개뿐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86호)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같은 모습이다. 참고로, 국보3호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이다. 추사 김정희는 1816년, 북한산 승가사를 방문하여, 승가사 바로 위, “비봉”에 있는, “불명의 비석”을 분석하여,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순수비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신라관”에 있고, 현지에는 “실물 모형”이 세워져 있다). 보물1호는 흥인지문(동대문)이다.

 

② 양양 오대산 상원사~ 세조임금과 관련된 문수보살 설화가 있다 ③ 경남 고성 무이산(청량산) 문수암~ 의상대사가 꿈에서, 문수보살의 무이산 다섯 봉우리 중앙인 중대를 안내받아 그 자리에 문수사를 세웠다 함 ④ 고창 문수사~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꿈을 꾸고 세운 절 ⑤ 태백시 태백산 망경사~문수보살의 창건설화가 있으며, 이곳에는 단종비각과 함께, 단종이 산신이 되었다는 산신기도의 산령각, 사찰의 10분거리에 태백산 정상의 하느님(칠성 하느님) "천제단"도 있다

 

⑥ 영동 백화산 반야-사 문수전~ 속리산 복천암의 신미대사를 스승으로 여기는, 세조임금이(“영험한 미륵기도처 ⑧속리산 복천암” 참조), "신미대사"의 추천으로 반야-사를 중건한 후, 회향법회 참석길에, 문수보살을 만나, 문수보살의 안내로 계곡 목욕후, 지병이 나았다는 문수전의 설화가 있는 영험 문수기도처이다(세조임금은, 문수보살을 “2번” 친견하였는데, 충북 영동 “반야-사”와 오대산 “상원사”에서 각각 친견하셨다 한다). 반야-사의 뒷산은 호랑이 형상의 너덜지대가 있는데, 이 호랑이가 산신으로 화현하여 있다는 산신각은 영험한 산신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⑦ 하동 지리산 칠불사~가야불교의 발상지이며, 김해가야(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이곳에서,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지도를 받으며, 서기 103년 8월 보름날, 동시에 성불하였다하여 칠불사라 이름붙였다 함.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을 간다는 "아자방"의 온돌이 유명하며, 영험한 문수보살 기도처로 알려 져 있다. 인근에는 벗꽃길로 유명한 하동 쌍계사가 있다.  산청 지리산 법계사~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어사 박문수의 어머니가 “서울 북한산 문수봉 문수사”와 함께, 이곳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문수보살이 아들을 주셨다하여, "문수"라는 이름을 따서, 박문수로 하게 되었다고 전해짐. 등

 

원주 치악산 남대봉 상원사는, 신라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선사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에 기도하여 창건하였다 한다. 이 사찰은 구렁이와 꿩의 전설이 전해지는 사찰이다. 꿩이 죽음으로 "종'을 세번쳐서, 은혜를 갚은 산이라며, 꿩'치"자를 써서 치악산이 되었다한다. 문수기도처이며, 종을 3번치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는 "동종"이 있다. 인근 치악산 구룡사에는 무단벌목을 금한다는 현존 유일의 비석인 "황장금표"가 있다("상원사"라는 이름 사찰은, "오대산 상원사"와 "치악산 상원사"가 있다)

 

극락보전 무량수전 미타보전 보광명전 :서방 극락 정토세계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세계에 살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아미타불의 광명은 끝이없는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 또한 백억겁으로도 헤아릴수 없다하여 무량수불, 무량광불, 보광명불이라고도 한다. 좌우에, 중생의 모든 환난을 구제하고, 중생에게 이롭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으로 중생을 돕는 관세음보살과, 지혜로서 삼도의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대세지보살을 모시거나, 또는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으로 중생을 돕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지장보살을 모신다(아미타불은 보광명전, 약사불은 보광전)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을 사찰에 따라, 관음전으로 하기도 함.

 

아미타 ~아미타라는 말은 무한한 수명을 의미하는 말로, '무량수"라고도 말한다. 아미타불은 과거세에 법장이라는 보살로 수행을 하였을때, 대승을 이루는 타인을 위한 이타행의 자비심으로 가득찬, "48대원"을 세웠고, 이를 이행하여 현재, 서방 "극락 정토세계"에 머물고 있는 부처님(아미타불의 48대원을, "대승의 본-원"이라 말함).

 

*정토세계 ~ "부처"와 미래에 부처가 될 "보살"이 거주한다는, “청정불국토”를 의미한다.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세계”(극락전), 약사불의 동방 “유리광세계”(약사전), 석가불의 북방 “영산회상”(영산전), 미륵불의 남방 “용화세계”(미륵전)은, 모두 "청정불국토"이며, “정토세계”를 의미한다.

*극락세계~고통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이상적 정토세계를 말함. 아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 정토세계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알려진 영험한 아미타불 기도처~  부여 만수산 무량사~ 신라 문무왕때 범일국사(810~889년)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에 크게 중수하였지만, 자세한 연대는 알수없다 . 조선시대에는 진묵대사(1563~1633년)가 거쳐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 극락전은 그후, 인조때, 다시 세운 것이다. 국내 제일의 “아미타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무량사 “극락전”(보물356호)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서, 외부는 2층구조이지만, 내부는 상하층 구분이 없는 통층 구조로서, 조선시대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두고 있다(아미타 삼존불).

 

그밖의 보물로는, 5층석탑(보물185호), 석등(보물233호), 무량사 미륵불 쾌불탱(보물1265호), “영정각”의 김시습 초상(보물1497호)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매월당 김시습 “부도”와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등이 있다(무량사는 행정구역상 부여군이지만, 보령시내에서 더 가깝다). * 매월당 김시습~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문인으로, 경주 남산아래,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설잠스님으로 입적한 곳이, “무량사”이다.

 

* 태백산(소백산) 영주 부석사 ~676년(문무왕 16년)에 문무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엄종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대덕의 근본 도량이다. “부석”이라는 이름은 “뜬돌”이라는 뜻인데, 무량수전 서측의 큰 바위는, 아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는 말에서 부석사라 하였다 한다(실제 노끈을 넣어 보면 거침없이 드나든다고 한다 / "부석사"는, 우리나라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에 포함된 7개 사찰 중에 속한다. 7개사찰은 아래의 "영험한 관음보살 기도처"를 참조하세요). “부석사” 이름에는 “선묘”낭자와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의상을 사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는데, 의상은 스님이라, 그 사모를 받아 줄 수가 없었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낭자는 의상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바다의 용이 되어, 의상의 바닷길을 보호하였고, 부석사를 창건하는 동안에는, 선묘용이 되어 나타나, “큰바위”로 변신한 후, 위협으로, 도적떼를 막았다고며, 그 후, 무량수전 서측에 “부석”으로 안착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선묘낭자가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불상 밑에서 부터, 무량수전앞 석등까지, 용의 등줄기처럼 기다란 석룡이 되어 묻혀있다고 한다(일제시대 사찰 보수를 위해, 석등밑을 파보았는데, 실제 용의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긴 돌이 묻혀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부석사 보유"국보"로, “배흘림 기둥”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15호, 이곳 봉정사의 대웅전은 국보311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3대 목조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무량수전”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무량수전 안에 있는,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45호인데, 석가를 의미하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인지, “아미타”여래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원융국사 탑비에, 아미타불로 모셨다는 글이 있다

 

그외 "국보"는, 무량수전앞 석등(국보17호), 고려시대 건축물로서, 의상대사 진영이 안치된, 조사당(국보19호), 그리고 조사당 안의 조사당 벽화(국보46호)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벽화로서, 제석천, 범천, 사천왕을 그린 6폭의 벽화이다(현재 조사당에 벽화는 없으며, 조사당 뒷편에 별도 보호각을 지어 모사본을 보존하고 있다. 실물은, "문화재 보존과학센타"에서 2026년까지 보존처리 중에 있으며, 보존 처리후, 국립박물관에 보관할 예정으로 있다). 조사당 추녀밑에는 의상대사가 꼽아 두었다는 지팡이에서, 잎이 나오며 자랐다고 하는, “선비화”가 있는데, 선비화의 잎을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 때문에, 많이 훼손을 당하여, 지금은 철제로 막아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보물로는, 3층석탑(보물249호), “자인당” 전각 안에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220호), 당간지주(보물255호), 고려초 화엄경판 2종을 목각한, 고려각판(보물735호)와 부석사 오불회 쾌불탱(보물1562호)가 있고, 경북유형문화재로는, 원융국사 탑비(유형127호), 동탑서탑의 3층석탑(유형130호)가 있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 현판은 이 지역인사인 석당”김종호”선생이 썼다고 하며, “부석사”현판은 이승만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

 

* 안동 천등산 “봉정사”~ 안동 서후면에 있는, 천등산 휴게소에서 5분정도 오르면, 봉정사가 있다. 이름이 비슷한데, 설악산은, “봉정암”, 안동은, “봉정사” 그리고 문경은, “봉암사”이다. 안동 봉정사는, 672년(문무왕12)에, “능인대사”(영주 부석사를 세운 의상의 제자)가 창건했다고 한다. “능인대사” 가, 천등산 정상 가까이 있는, 천등굴에서 도를 깨치고,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황새가 앉은 자리라 하여,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사-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된 7개 사찰중의 하나이다. 태조 왕건, 공민왕도 방문했으며,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방문 곳이기도 하다. 그 후, 2019.5월에는 앤드류왕자도 방문하였다.

 

봉정사의 역사기록과 경전이 625때 모두 소실되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복원할 때, 상량문에서, 극락전 중수기록이 발견되므로, 극락전(국보15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인정받았다(안동 봉정사는, 1363년 이전에 건축하였고,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목조건축물이다). 1363년(공민왕12)에 “극락전”(국보15호)을 중수하였고, 1435년(세종17)에는 “대웅전”(국보311호)을 중수하였다. 1616년(광해군8)에는, “고금당”(보물449호)을 중수하는 등, 그 이후에도, 1625년, 1809년, 1863년 등, 몇차례 중수가 있었다. 삼성각은 “고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천등산 이름 설화~ 원래 대망산이었다. 봉정사를 창건한, 능인스님이 산 아래 동굴에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찾아와, “스님의 지고한 덕에 감복하여 찾아 왔습니다. 스님과 함께 산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속삭였다. 능인스님은, “난 부처님만 공경하고 사모할 뿐, 세속 환락은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여인은 “하나님(옥황상제)명으로, 스님을 시험코자 찾아 왔으니, 노여워 마시고, 부디 인간세상과 천상세계의 “사표”가 되어 주세요”하면서 물러 갔다 한다. 여인이 떠나자, 갑자기 굴속이 훤해지면서, 하늘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행처로 삼으신 동굴이 어두워, 하나님(옥황상제)께서, 보내신 등불을 전합니다. 부디 더욱 정진하여 도를 이루옵소서”하였다. 그 이후 능인스님은 도를 이루었고, 산 이름을, “천등산”(574m)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봉정사에서 5분정도 오르면, 영산암(우측)과 지족암(좌측)에 닿게 된다. 산내 암자인 “영산암”은 영화, “동승”,“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나랏말싸미”등의 영화 찰영지이며, 한국의 10대 정원이다. 영산암에서 다시, 20분정도 산을 오르면, “개목사”가 있다. 원래 흥국사였으나, 안동에 부사로 부임받은 “맹사성”(고려말부터 조선초 문신으로, 세종때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 안동에 소경이 많은 것은 산세 때문이라며, 찾아 온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개목사”로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그 뒤부터, 안동지역에 소경이 점차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개목사에서 10분정도 오르면, 능인스님이 수행했다는, 천등산 “천등굴”이 있다(봉정사가 있는 사찰은, “봉황포란형” 명당자리라며,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주 답사하는 곳이다).

 

안동 봉정사 보유 문화재는, 극락전(국보15호), 대웅전(국보311호), 화엄강당(보물448호), 고금당(보물449호), 화엄강당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1620호), 영산회쾌불도(보물1642호), 대웅전 후불탱화인, 아마타설법도(보물1643호), 영산회상벽화(보물1614호), 극락전 우측에 있는, 석조여래 좌상(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안정사에 있던 석불), 경북유형 문화재로는, 극락전앞 3층석탑과 만세루 등이 있다.

 

* 춘천 오봉산 청평사~ 고려 광종24년(973년)에 “승현’이 창건하고, 백암선원이라 하였으나, 그 뒤 페사되었는데, 문종2년(1068년)에 “이의”가 재창하고 보현원이라 하였다. “이의” 아들, “자현’이 은거하면서, 오봉산에 도적과 호랑이가 없어졌다며, 이름을 문수원으로 개칭하고,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 명조5년에 보우대사가 청평사로 개칭하였다. 청평사 “회전문”은 보물 164호이고, 청평사 3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8호)은, 상사뱀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원나라 순제의 공주를 사모하였던 청년이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공주에게 붙었는데, 공주가 청평사에 와서, 가사불사를 한 후, 상사뱀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 순제가 지은 탑이 청평사 3층석탑이라고 한다(일명 공주탑). 청평사의 연못은, 교토의 “서방사” 정원보다 200여년 앞선 것이라 한다. 이곳에는 춘천3대 폭포인 구성폭포가 있다.

 

극락세계 지옥세계 ~극락은 항상 즐거움만 있는 세계를 말하고, 지옥은 끊임없이 고통이 계속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이런 극락과 지옥은, 지금 이승에 존재하기도 하고, 저승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승에서는, 자신의 마음이 항상 즐거우면, 그것이 바로 극락이며, 항상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그것이 바로 현재,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승에서는, 육신은 없고, 마음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기억을 하든, 기억을 하지 못하든, 선악도 구별하지도 않고, 자신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기록하고 저장한다는, 마음의 제일 깊은 곳인 제8식인 "아뢰아식"이라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이 무의식의 존재인 "아뢰아식"이 마음의 본체인데, 이 마음의 본체가 보여주는 세계가 항상 즐거우면, 극락이고, 항상 괴로우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만 존재하는 저승세계에 있어서의 극락과 지옥도, 자신의 업에 따른,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필름이라 생각하면, 그 마음이라는 필름이 선업으로 얼룩져 있어, 자신에게 항상 즐거움을 보여 준다면, 그곳이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그 마음이라는 필름이 나쁜 업과 괴로움으로 얼룩져, 자신에게 항상 괴롭고 고통스런 세계가 펼쳐져 보인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세계인 것입니다. 자신이 극락을 생각하려 해도, 필름이 악업으로 얼룩져 있다면, 보여지는 세계는 지옥 뿐입니다. 그래서 극락왕생을 하려면, "나쁜 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지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개념의 색즉시공 (물질세계인 이승과 영의 세계인 저승) ~이승은 물질의 세계이고, 저승은 영의 세계입니다.영의 세계인 저승에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왔다는 겁니다. 자신의 물질적 세계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적인 마음만 남게 됩니다. 영적인 저승세계에 있는 모든것, 즉 지옥이나 극락은 자신의 마음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물질세계인 이승으로 오게 되면, 물질인 육신을 통하여 그 물질을 만지고 촉감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저승세계의 모든것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로 존재하므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살이 아무리 설법을 하고 노력을 해도, 스스로 업의 본질을 깨닫고(견성) 변하지 않으면,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적 세계에 길들여진 영혼이, 저승에 가더라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식이 항상 그렇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가르침을 준,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는 말의 유래이다. (필름으로 비유하자면, 번뇌가 없는 여래심 은 깨끗한 원본 필름인데, 중생심은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필름이므로, 자신의 눈에 항상 번뇌와 업으로 얼룩진 모습의 저승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즉, 저승이든, 이승이든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그것이 자신의 업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의해 좌우되어, 그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지옥이나, 극락은 오직 마음의 업식에 따라 그 존재여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마음의 업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가 바로, 성불이요, 우주의 본심이요, 우주의 법진리 "비로자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소멸된 부처의 눈에는, 각 중생마다 달리 보일 수도 있는, 유기적 물질세계인 기세간, 윤회되는 (영계를 포함한)중생세간은, 전부 '업'과 '인과'의 총체적 모습이다.

 

즉, 중생의 중생심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만(유위법), 부처님의 마음인 여래심 에는 지옥과 극락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무위법). 그러므로 진리를 다른곳에서 찾지 말고(원리전도몽상), 허상이든, 실상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인연연기로 인하여, 자신에게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가 바로, (자신의 "업"으로 보이는)참진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의 뜻 ~나무(남무)는 "귀의한다", "의지한다"라는 뜻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 되고, 나무관세음보살은 "관세음 보살님께 귀의한다" 또는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한다"는 뜻이다.

 

관음보전 원통보전 : 중앙에 아미타불, 좌우에, 중생의 모든 환난을 구제하고, 중생에게 이롭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으로 중생을 돕는 관세음보살과, 지혜로서 삼도의 모든 고통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이라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신다. 사찰에 따라, 극락전(무량수전)의 명칭으로 하기도 함. 아미타불을 모시는 관음전이 그 사찰의 주전불일때는 원통전이라 함. 관음은 해수관음, 용수관음, 백의관음, 천수천안관음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후불 탱화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그림

 

수월관음도~ “수월”이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베푼 곳이, “달이 비치는 물가”이기 때문에 유래한 이름이다. 법화경(관음보살보문품)과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구도여행”을 하게 된다. 보살, 스님, 비구니, 인도 바라문교의 바라문, 뱃사공등 53인의 여러 선지식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선재동자가 이루려는, 깨달음 과정 안내자였다. 선재동자는 28번째로, 관음보살을 만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보현보살(원을 세워 이를 행하는, 실천적 보살)을 만나, 결국 깨달음을 얻어, 극락정토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쪽으로 돌면서 내려갔다고 하여, “선재동자”를 “남순동자”라고도 불린다(관음전의 후불 탱화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그리고 있다). 수월관음 = 해수관음

 

그래서, “수월관음도”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다. 대개, 그림에서, 관음보살은, “반가부좌”로, 금강대좌위에, 늠름하게 앉아 있고, 산호와 연꽃이 피어난, 물가에서,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며, 관음보살 오른쪽 바위에는, 흰 유리그릇 받침대가 있는 “정병”에, 버드나무가 꽂혀있고, 관음보살 등뒤에는, 푸른 대나무가 두줄기 뻗어 올라간 모습이, 대개의 수월관음도 모습이다. 그러므로, 수월관음 = 해수관음

 

* 용(용왕) 의미~ “용”이 상상의 동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은, 물에 사는 신령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냥 “물신”이라고 부르면, 어감과 신령함이 부족하므로, 물과 관련된 신령한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서, “용” 또는 “용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다 사람들도, 정말 용이 있다고 믿으며, 용신재를 지내는 것이 아니고, 바다와 관련된 신령한 존재에게, 안녕을 기원하며 재를 지내는 것입니다. 불교 “해수관음” 즉, 달빛이 비치는 물가에서 설법을 하는, “수월관음”도, 물과 관련한 신령한 보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해수관음을 용이라 표현되기도 합니다. 관음전의 “후불 탱화”에, 바다의 관음보살로서 “용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불국사는 528년(법흥왕15)에, 법흥왕의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최초로 창건한 후,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751년(경덕왕10)에 “김대성”이 중창을 시작하여, 774년(혜공왕10)에 완공하였다(그러나, 김대성은 완공을 못하고, 세상을 떠나, 국가에서 최종 마무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9차례의 중창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돌로 만들어진 것을 빼고, 모두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1612년부터 복구를 시작하여, 1750년(영조26)에는 극락전을, 1765년(영조41)에는 대웅전이 복구되는 등 점차 복구되었다. 그러나 조선말에서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점차 퇴락하고 페허화 되어 갔다. 현대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의 발원으로, 1970년부터 중수를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불국사는, 석가불의 영산 정토세계(화신불), 아미타불의 극락 정토세계(보신불),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법신불)의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다. 불국사에 들어서면, 먼저 ① “청운교, 백운교”(국보23호)에서, 33계단(33계단은, “사바세계”를 의미하는 데, 욕계천상의 두번째 하늘세계로, “33천” 또는 “도리천”이라 부른다)을 오르면, “자하문”(불국의 광명으로 인해, 자주빛을 띤 금색광명이 서러있는 문)에 닿게 된다. “자하문”을 지나면, 세속을 벗어난, 석가불(화신불)의 (북방)영산 정토세계가 펼쳐지고 그곳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보물1744호) 참배객은, 옆의 회랑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대웅전”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의 삼존불, 그 좌우에, 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시고 있다(불국사의 대웅전은, “영산 정토세계”를 의미하는, 일반적 “영산전’의 모습이다. 보통 대웅전은 좌우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신다)

 

② “연화교, 칠보교”(국보22호)의 33계단을 지나면, “안양문”(극락세계로 가는 문)에 이르고,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보신불)의 (서방)극락 정토세계가 펼쳐 진다. 그 곳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안에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27호)이 있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는 길에는, 3열의 16계단(48계단)이 있는데, 이는 아미타불이 과거세에 법장보살로 있을 때, 48대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이룩하였다는, “아미타불의 48대원”을 상징한다. 극락전편액 뒤에는, “황금돼지”조각상이 있다.

 

③ “비로전”은, 비로자나불(법신불)의 (중앙)연화장세계를 나타내는 전각인데, 원래의 전각들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73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비로전” 안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26호)을 모시고 있다.

 

④ 대웅전 앞 마당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여, “법화 일승세계”를 의미하는 “석가탑”(국보21호)와 “다보탑”(국보20호)가 있다. 법화경 “여래 수량품”에서, 석가는 수억겁 이전에 이미 성불을 이루었는데, 중생을 위한, “화신" 보살로서, 이 땅에 오셨다고 밝혔다. 모든 보살은, 중생들이 부처의 지견을 깨달아, “일승”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방편으로 열반의 경지를 보여 주며, 이 세간에 출현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45년동안, 설법한 “아함부”의 가르침이, 사실 “방편”이었다고 밝히면서, “일승불”로, 반드시 들어와야 이룰 수 있다는, 법화경의 가르침 말씀은, 곧 “소승”에서 멈추지 말고, “대승”의, 진짜 “법진리”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즉, 부처를 이루는 마지막 단계가 보살행이므로,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등, 모든 여래는 끝없는 보살행을 하여, 부처를 이루었고, 그런 보살이 진정한 “일승불” 임을 알린다(블로그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후반부 “법화경”부분 참조).

 

이런 석가불의 “법화경 설법”을, “영안”으로만 볼 수 있는, “비유비무” 세계에서, 증명하고, 보증하신 부처가, “다보”부처이다. 불국사는 이런 "비유비무"세계에서 이루어진 "다보불"의 증명을 형상화하여,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웠다. 다보탑 하단에는 4개의 “사자”상이 있었는데, 분실되어 지금은 1개뿐이다(영국의 국립 박물관에서 1개가 발견되었다). 1967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126-6호)은 751년(경덕왕10)에, 석가탑에 봉안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⑤ 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석굴암”은,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석불사”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으나, 세상을 뜨고, 경덕왕의 원찰이 되면서, 774년(경덕왕10)에 나라에서 완공했다고 한다. 불국사에서 평지길로 1Km정도이다. 도보 약30분 정도 소요. 자동차길을 이용하면, 자동차로 15분소요. 불국사에서 석굴암행 마을버스는 1시간에 1대 있다). 석굴암 내부의 배치는, 법화경에 나오는, 영취산에서 설법하시는 “영산회상”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통로에 들어가면, 좌우측 벽면에 8분의 “팔부신중”이 도열하여 있고, 좁아진 통로,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 좌우측에 2분의 “금강역사”가 있다. 더 들어가면서, 좁아진 통로 벽면의 좌우측에, 4분의 “사천왕”이 계신다.

 

본존불을 마주하면,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측5명, 우측5명 합계 10분의 10대 제자가 있다. 좌우 각5명의 제자 가운데 부분(본존불의 바로 뒷부분)에,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뒤를 돌아서면, 본존불과 마주보는 곳(입구쪽)의 좌측에 “대범천”과 “보현보살”이, 우측에 “제석천”과 “문수보살”이 계신다. 상단에는 10개의 감실(작은 불상을 모셔 두는 곳)이, 전체를 빙 둘러 있는데, 입구쪽 양측 2개의 감실에는, 현재 불상이 분실되어 없다. 본존불의 시선은 동해를 굽어보며, 동해의 대왕암쪽(문무대왕능)을 향하고 있다.

 

⑥ 경주 남산~ 남산은, 금오봉(468km)과 고위봉(494km)이 있는데, 2봉우리에서 내려오는 40여개의 계곡에는, 절터 100여곳, 석불 80여기, 석탑 60여개가 있는, 노천 박물관이다. “김시습”이, 한국 최초 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 경주 남산 금오봉아래, “용장사”이다(김시습은 차후 출가하여,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하였다). 남산에 있던, 많은 문화재급 보물들은 현재, 국립 박물관, 경주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지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는,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312호, 삼존불과 사방불 등 바위에 새겨진, 총7구의 불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199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187호),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198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바위속 가운데에 넘어져 있음)등이 있다.

관세음보살~(일명, 천수천안관세음보살)~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의 서원을 세운 보살님으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가지고,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천수천안), 중생들의 발원을, 동시에, 보고 듣고(관세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돕겠다고 서원한, "자재무애"의 경지에 이른 보살님.

대세지보살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빛"으로,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으로, 두 보살이 함께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보좌하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무한한 힘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고 하여 "대세지보살"이라고 하며, 지혜의 빛으로 모든것을 비추어 본다고하여 "무변광"보살이라고도 한다. 대세지보살은 삼도의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겠다는 서원을 세운 보살님이다(극락전, 관음전에 모심

 

영험한 "해수" 관음기도처 : ① 동해 양양 오봉산 낙산사와 홍련암~ 671년(문무왕 11년)에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원통보전과 홍련암을 함께 창건한 우리나라 첫번쨰로 꼽는, “관음보살의 상주처”이다. (남해의 보리암, 강화의 보문사, 여수의 향일암과 함께, 4대 관음성지의 하나). 의상대사가 만난, 푸른새가 석굴(관음굴)로 사라지자, 그곳에서 7일기도 하였는 데, 홍련이 솟고,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며, 관음으로부터,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곳 석굴 위에 암자를 지은 것이, “홍련암”이라 하며, 홍련암 법당마루 가운데, 작은 창을 통해, 석굴과 파도를 볼수 있다(홍련암은, 2005년 양양지역 대형 산불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7일간 기도하여, 관세음보살을 만났는데, 산정상의 대나무 한쌍이 솟아난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았고, 그 곳에 전각을 조성하여 모신곳이 “원통보전”이라 한다. 원통보전은, 2005년 산불당시, 전각은 모두 불탔으나, 그 안에 모셔진 “건칠 관음보살 좌상”(보물1362호)은, 무사하였다. 현재의 원통보전은 2007.11월에 복원한 것으로, 담장을 둘러, 다른 건물과 영역을 구분하여,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그 사찰의 주전불일때, 원통보전, 사찰의 부속 건물일때는 관음전 또는 원통전으로 불린다

 

홍련암의 불상을 개금불사할 때, 닫집에서 한 알의 밝은 구슬(사리1과)이 공중으로부터 탁자에 떨어졌다고 하며, 이를 “공중사리”라 불렸고, 1683년, 이를 모시기 위해 사라탑과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비(보물1723호)이다. 1930. 2. 25일에는, 경봉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올렸는데, 13일째 되는 날에, 바다 위를 걸어 나오는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그 외, 낙산사 강원도 유형문화재로는, 홍예문(33호), 담장(34호), 경관이 좋은 명승인, 의상대(48호), 홍련암(36호), 해수관음보살상, 보타전(중앙에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 7가지 모습으로 변신한 7관음상, 32가지 모습으로 변신한 32응신, 그외 1500분의 모든 관음상) 그리고 의상기념관이 있다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어부가 꿈을 꾸고, 꿈의 노스님 말씀에 따라, 그물에 걸린 22개의 돌덩이를 석굴에 모신 나한전이 시초. 고려초기 금강산에서 관음을 친경하였다는 회정스님이 관음전을 세움. 눈섭바위에 있는 마애관음불과 석굴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가진다는 영험으로 유명. 관음기도 뿐만 아니라 영험한 나한 기도처로도 유

 

③ 남해 금산 보리암~원효스님이 기도하고, 관세음보살 친견 후, 세운 사찰. 남해 금산의 보리암은, 원래 원효대사가 기도하여 관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창건한 "보광산 보광사"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한후, 나라의 왕으로 인정받아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에 보은하여 산의 전체를 비단으로 감싼다는 뜻으로 산이름을 "금산"으로 바꾸고,절의 이름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100일기도하였다는 "선은전"이 있다

 

④ 여수 금오산 향일암~산의 형태가, 거북이 경전을 지고 바다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세이고, 바위마다 거북등처럼 생긴 무늬가 있어 금오산이라 한다. 이곳 암자는 일출을 보는 최적의 장소이므로, 향일암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원효대사가 수도하여 관음을 친견하고 세운 사찰. ⑤ 통영 연화도 연화사 보덕암~수국과 용머리 해안이 절경인 보덕암 인근에, 사명대사가 보운, 보련, 보월의 3분 스님과 함께 기도했다는 토굴이 있다. 3분 스님은 일찌기 임진왜란을 예측하고, 거북선 건조법, 해양지리와 천풍기상등의 대책을 이순신장군에게 전수해 주었다 한다

 

* 부산 해동 용궁사~ 고려 공민왕의 “왕사”인, “나웅대사”가 1376년 창건한, 유명한 “관음기도처”였다. 그후, 해동 용궁사는, 폐사 되었는데, "정암화상"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관세음보살을 꿈에서 보았다며, 해동 용궁사라는 이름을 짓고, 1970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범어사, 삼광사와 함께, 부산 3대 사찰이며,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는 해수관음기도처이다. 바닷가 사찰로, 일출의 명소이기도 하며, 종교와 관계없이 관광 명소이다.

 

* 양양 휴휴암~ 1997년 홍법스님이 창건한, 영험 관음보살 기도처이며, 물반 고기반의 황어떼를 볼 수 있는 명소. 모든 번뇌를 내려 놓고, 쉬고, 또 쉬어라는 뜻에서, “휴휴암”이라 하였다 합니다. 천수천안 관세음 보살을 모신, “묘적전”을 중심으로, 바위에 암굴을 파서, 만든 “밀법당”(다라니 굴법당), 그리고, “비룡관음전”이 있다. 국내 최초로 범종에 황금을 입힌, “관음범종”도 있다. 조형물로는, 학문과 지혜를 뜻하는, “지혜 관음보살상”과 그 좌우에, “동해 용왕상”과 “남순동자상”, 그리고 “16나한상”이 자리하고 있다.

 

(남순동자는, 화엄경에서, 진리를 찾아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선 “선재동자”를 말하는데, 인도 남쪽을 돌았다고 하여, “남순동자”라 고도 불린다. 선재동자는, 달빛이 비취는 바닷가에서, 관음 보살을 친견하게 되는데, 이를 “수월관음”, “해수관음”이라 합니다. 선재동자는 최후로,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극락 정토세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동해바다 절경인 휴휴암 아래에 있는, 너른 연화대 바위에서 좌측으로 보면, "누운 관세음보살바위"와 "거북바위"를 찾아 볼 수있으며, 바닷가 물속에는 물반, 고기반의 황어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주문진 해수욕장과 이웃한, “소돌해변”에 있는, “숫소”형상의 “아들바위공원"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나, 신혼부부가 많이 찾는 명소이다).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신라 무열왕1년(654년),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세운사찰.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정진하고 있었는데, 어느 비오는 밤, 길을 잃었다며 비에 젖은 몸으로, 하루 밤 재워주기를 청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재워주게 되었다. 여인은 비를 맞은 몸을 떨며, 춥다며 몸을 주물러 달라고 유혹하였다. "일체유심조"의 경지에 이른 스님은 마음을 다스리고, "나를 유혹을 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며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은 "그대 마음이 그렇게 볼 뿐이다"답하고 어느 순간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문득 스님은, 깨달음은, 자타를 구별하며, 유혹이라 생각하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자재무애"의 경지를 알게 되었다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있는 자재무애의 경지"를 일러 준, 그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화신 임을 뒤늦게 깨달은 스님은, 그 자리에 사찰을 짓고 "자재암"이라 하였다 한다. 자재암에는 원효스님이 수도하였다는 원효굴, 원효대, 나한굴이 있으며, 세조의 명으로 간행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언해본"(보물1211호)가 대웅전에 비치되어 있다. 절 인근에는 요석공주가 설총을 키웠다는 요석궁지, 조선 태조가 자식들간의 왕권다툼으로 왕위를 물러나, 머물렀다는 행궁터(소요산 초입 우측의 넓은 터)가 있다. 가을 단풍관광지로 이름난 소요산일원은 19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관자재보살~ 반야심경 처음에 나오는, 부처님이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반야심경의 주인공으로, 상의 본질인, "비유비무"(공)을 비추어 보고, 자재무애의 경지에 이른 보살님. *보살의 지혜~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본질인, "비유비무"(공)을 비추어 보고, 모든 사유와 느껴진 것을 멸하여, (인과에 의해, 항상 변화하므로)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무아", (인과에 의해, 항상 변화하므로)고정된 상이 없다는 "무상"을 깨친 보살(아라한)은, 원하면 원하는 대로 선정에 들어가고, 나올수 있는 경지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깨닫고 익혀보니, 세상의 모든것은 인연연기에 의해 조작된 "유위"(인연과 번뇌가 있음)의 집합체임을 알게 된다.→ 너와나, 주관과 객관의 모든것은 인연연기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고, 세상의 인연연기로 존재하는, "무아"이든, "무상"이든, "허상"이든 "실상"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간에,(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들리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 바로 진리라는 지혜(반야)를 체득한다.

 

반야심경 내용에서, 오온은 그 본질이 ""(비유비무)하므로, (오온에 의지하면)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오온에 의지하여) "얻는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원리전도몽상 하지 않고(인연에 의해, 보이고, 들리는 모습 그대로가 진리라는) "반야(지혜)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오온~신체의 감각기관에 의해 발현되는, 색,수,상,행,식

 

 진여~ⓐ우주일체의 본성으로, 여여하게 존재하는 법성이며, 자신의 근본적 본성을 말함(비상비비상의 모습) → 본래적 성품(불성, 부처)/  저승세계(영,귀신,신)~ⓐ법성(비상비비상) + ⓑ번뇌로, 변화하는 인과에 의존("영안"으로 볼 수있는 존재/영계 수행번뇌제거) →사후세계=ⓐ+ⓑ / ③ 현생계 ~ⓐ법성(비상비비상) + ⓑ번뇌로, 변화하는 인과에 의존(영) + ⓒ오온(육신)으로 부터, 끊임없이 영향받고, 변화하는 존재 →현생계 = ⓐ+ⓑ+ⓒ (현생계 수행: ⓒ번, 오온으로 인한 영향 제거, 그리고 ⓑ번, 분별심 같은 번뇌제거 → ⓐ번, "진여"에 다가 감=최종 무색계에서 완성

 

→ 이제, 깨침도, 깨쳤다는 법도, 깨쳤다는 사람도 없다는 경지에 이르러(완전한 깨침은, 깨침의 주체까지도 없다는 경지에 이르러),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비유비무 형태로 존재하는)”공”이요, ("공"의 모습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중도”이며, (비유비무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법계의 모든 것이, 그 본질면에서, 다르지 않으므로)”불이법문”이고, (인과에 의해, 항상 변화하며, 비유비무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법계의 성질은, 완전하게 융합되어 있어, 구별할 수 없으므로)”법성원융무이상”이며,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인과에 의해 항상 변화하며, 비유비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모습은, 우주법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일관된 한가지 모습이므로)”법계일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나아가, 깨달은 아라한은 부처가 되는 마지막 단계인, 너와나 (인연연기로)한몸인, 모든 중생에게 복덕을 주기위해(자비심),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등 갖가지 보살의 이름으로 현신하여,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 지혜로서 중생에게 이롭고,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구제하고, 복덕을 성취하게 하며, 여러가지 방편(각각 중생의 수준이나 근기에 맞는 방법)으로 중생을 정법으로 인도하고, 교화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 무색계에서 최종 완성(본 블로그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 중 “보살의 지혜” 참조)

 

영험한 마애 관음보살기도처 : ① 서울 우이동 도선사 마애불(관음불. 서울지방문화재 34호) ②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 눈섭바위 마애불(관음불. 인천지방문화재 29호) ③ 공주 마곡사 산내 암자인, 백련암마애불(관음불?) ④ 서울 북한산 삼천사 마애여래불(관음불? 보물657호. 삼천사 마애불에 기도하여, 애기를 점지 받는다는 영험으로 유명. 과거 삼천명이 수도하여 “삼천사”라 부르고 있는 북한산 삼천사는, 불기 2532년(1988년)에, 버마의 “마하씨사사나”사원에서 부처님 사리3과, 나한 사리3과를 모셔와서, 마애불 앞에 적멸보궁 “사리탑”을 조성하였다. 북한산 건너편에 있는 승가사의 "마애 석가여래좌상"(보물215호)의 영험과 함께 승가사 약사전은 영험한 약사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영험한 관음보살 기도처~① 강진 월출산 무위사~ 영험한 관음기도처인, “무위사”는, 원효대사가 617년(진평왕39)에, “관음사”로 창건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가, 1555년(명종10)에 “무위사”라 칭하였다. 해인사 “장경판전”을 건축한 년도와 같은, 1430년(세종12)에 건축한, 극락보전(국보13호),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국보313호), 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1312호), 극락전의 눈동자가 없는, “백의관음도 벽화”(보물1314호), 극락전 내벽사면벽화(보물1315), 선각대사탑비(보물507)가 있다.

 

* 영암 도갑사 ~ 영험한 관음기도처인,강진” 무위사는, 월출산을 중심으로,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비하여, “영암”의 도갑사는 월출산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월출산 국립공원(810m)에는, 120미터 높이의 절벽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유명하다. 월출산정상 구정봉아래 암벽에는 8.5미터 높이의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이 조각되어 있다. 도갑사는 도선국사가 신라 헌강왕 6년에 창건하였고, 수미대사가 1456년 중건하였다. 문화재로는, 해탈문(국보50), 석조여래좌상(보물89), 목조문수보현동자상(보물1134), 도선국사,수미왕사비(보물1395), 오층석탑(보물1433) 그외, 수미왕사비를 비롯한 전남유형 수점이 있다. 도갑사 입구의 벚꽃터널이 유명하고, 인근에 왕인박사 유적지가 있다.

* 영광 불갑사~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384년(침류왕1년)에,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는데, 백제 최초 사찰이며, 현존 하는 사찰이다. 제일 처음 지은 절이라 하여, 불갑사라 이름지었고, 영광의 법성포는, 법을 지니고 성인이 도착한 포구였다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후기, 각진국사가 중창하였다. 보물로는 대웅전(보물830호), 목조석가여래좌상(보물1377호), 불갑사 불복장(보물 1470호), 천왕문(2024년, 보물지정), 각진국사가 심었다는, 참식나무 군락(천연기념물112호)이 있다. 불갑사는 매년 9월중순쯤, 온통 붉은 색의 장관을 이루는 “꽃무릇”축제가 열린다.

 

* 나주 불회사~불갑사와 함께, 백제 최초 사찰이며, 현존하는 사찰이다. 불회사는, 384년(침류왕1년)에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설과, 그 보다 더 이른, 367년(근초고왕22년)에 “희연”이 창건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보물로는 대웅전(보물1310호), “건칠” 비로자나불 좌상(보물1545호)가 있다. *건칠기법~찰흙으로 불상을 빚어, 그 위에, 삼베를 덧입히고, 옻칠을 한다음, 불상에 금물을 입히는 입히는 아주 섬세한 작업이다. 나주지역의 불회사(비로자나불좌상), 심향사(아미타불좌상), 죽림사(아미타불좌상)의 3사찰에는 “건칠불’을 모시고 있다.

 

* 나주 심향사~원효대사가 “미륵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심향사”의 "건칠" 아미타불좌상 (보물1544호)은, 내부까지 금박으로 처리한, 보기드문 "건칠불"의 유일한 사례이다. 심향사에는 삼층석탑(보물50호)이 있다.

* 상사화와 꽃무릇(일명 붉은 상사화) ~ 줄기잎과 꽃이 절대 마주치지 않는다고 하여, "상사화"라 하였는데, 꽃무릇도 일명, "붉은 상사화"라 말하기도 한다. ⓐ 상사화~다년생 야생화로, 2~3월경에 줄기잎이 먼저 돋아나고, 6월말경에 줄기잎이 완전히 시든 후, 7월말~8월 초중순경에 30~50센티의 꽃대가 올라온다. 꽃대끝에, "연분홍색"의 6갈래 꽃잎의 꽃이 핀다. 즉, 줄기잎이 완전히 지고 난 뒤, 꽃대와 꽃이 핀다. 특히 상사화중, "위도"에 만 있는 "흰색 상사화", 내장산과 백암산에 만 있는 "짙은 노란색 상사화"는 세계적 희귀종이다.

꽃무릇(일명 붉은 상사화)~다년생 야생화로, 9월 중하순경에 30~50센티의 꽃대가 올라오며, 꽃대끝에, 가느린 꽃잎이 말린, 6갈래의 꽃잎이 있는 "붉은 색"의 꽃이 핀다. 꽃이 시들고 꽃대가 없어진 10월경에, 길다란 줄기잎이 돋아나서, 겨울을 지낸 후, 봄에 줄기 잎이 시든다. 즉, 꽃이 완전히 지고 난 뒤, 줄기잎이 돋아 난다. 주로 따뜻한 남쪽 사찰 주변에서 자라며, 독소가 있어 사찰에서 단청을 칠 할때, 벌레등의 퇴치용으로 섞어 사용하였다. 온통 붉은 색의 장관을 이루는, 유명한 꽃무릇 군락지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인데, 최근에는 김천 직지사와 법정스님이 계시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도 꽃무릇을 볼 수 있으며, 이곳들은 모두 관광과 사진 찰영 명소가 되었다.

*부안 내소사~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변산”지구에 속하는 "내소사"는, 633년(무왕34년)에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가 창건하며, “소래사”라 하였는데, 언제 “내소사”로 바꾸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33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보물로는 대웅전(보물291호), 고려동종(보물277호), 영산회쾌불탱(보물1268호), 그리고 전북유형문화재로 3층석탑, 설선당과 요사채가 있다. 내소사 일주문부터 천왕문에 걸쳐 있는 약600미터의 길은, 수령 약150년의 전나무 700여그루가 있는,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길의 하나이다(광릉 수목원 전나무숲길, 오대산 전나무숲길). 전나무 숲길 주변에는 9월초중순경에 만개하는, “붉은 색을 띤 연노랑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② 곡성 성덕산 관음사 ~절세미인 관음보살이야기, 심봉사가 눈을 뜬, 효녀 심청의 공양미 3백석 관련 설화 ③ 설악산 오세암 ~김시습이 출가한 사찰로, 백의관음보살과 5살 어린이의 오세암 설화가 있다 ④ 삼척 두타산 관음암 ~약초캐던 심총각이 관세음기도로 장가를 들었다는 설화 ⑤ 제주시 관음사(해월굴) ~TV드라마 "우영우" 찰영지로 알려진 이곳은 관음기도로 유명 

 

 남해 창선 운대암~ 아침에 기도하면, 저녁에 효험을 본다고 알려진, 팔선지 명당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⑦ 도봉산 천축사 옥천석굴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후, 이곳에서 100일기도했던 기억을 더듬어, "천축사"라는 현판을 하사 함 ⑧ 증평 좌구산 미륵사 석조관음보살입상~관음기도로, 이곳 마을 주민의 돌림병을 모두 치료하였다는 영험설화가 전해진다. 

 

예산 덕숭산 수덕사 관음전~ 백제 후기 또는 599년(법왕1)에 창건했다는, 수덕사는 무학, 경허, 만공, 혜월, 수월스님등 많은 스님들이 수행했던,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며, 불교 종합교육도량이다. 전하는 창건 설화에는, 수덕도령이, 사냥을 갔다가, 덕숭낭자를 보고 짝사랑에 빠져, 청혼을 하였지만 번번히 거절을 당하였다. 끈질긴 청혼 끝에, 덕숭낭자는 자기집 근처에, 절을 지어 주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하였다. 절이 완공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였으나, 첫날밤 "덕숭낭자"가, 수덕도령의 손길을 거부하므로, 강제로 끌어 안기 위해, 버선을 잡는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버선 한짝만 남기고, 낭자는 사라졌다. 덕숭낭자가 있던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바위 위에는 버선꽃이 피었다. 사실 덕숭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었다. 그 후, 산의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으로 하고,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수덕사 관음전 현판이 있는 전각 옆에는,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이런 전설이 있는 수덕사는, 영험한 관음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보유 문화재는, 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 묘법연화경(보물1147-2호), 노사나불괘불탱(보물1263호),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보물1381호),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보물1543호)이 있고, 그외 충남 유형문화재가 다수 있다. 고려시대인, 1308년(충렬왕34)에 지어졌다는 수덕사 대웅전(국보49호)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15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와 함께, 가장 오래된 현존 목조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대웅전 벽에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귀중한 고려시대 벽화가 있었는데, 일제때 수리중 소실되었고, 그때 찍은 사진과 모사본만 존재하며, 사진과 모사본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수덕사” 위쪽에는, 비구들의 참선도량인, “정혜사”(만공스님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등록문화재 473호인, 만공스님 부도탑이 있다)가 있고, “수덕사” 서쪽에는, 우리나라 3대 “비구니” 참선도량의 하나인, “견성암”이 있다.

* 수원 화산 용주사~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이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갈양사”는, 고려시대에 왕실 원찰이 되면서, 고려 광종 때(970년), 우리나라 최초 “수륙대제”가 시작된 곳이다. 고려 광종때, 혜거국사가 머룰렀지만, 길양사는 병자호란때, 소실되었고, 그 후, 폐사되었다. 조선 정조임금은, 서울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인근에, “수원화성”을 짓고, 행궁을 세우게 된다(능의 이름을 처음에, 현릉원으로 했다가, 차후에, 융릉으로 하였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고, 옆의 “건릉”은 정조와 왕비 김씨의 무덤이다. 합하여 “융건릉.” 2009년 “융건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 당시 불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시기임에도, 정조는, 1790년, “융릉”에서 2키로 정도 떨어진, 폐사된 “갈양사” 절터에, 새로 절을 중창하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부르게 하였고, 용주사를 “융릉”의 “능침사찰”로 삼았다(대웅보전 옆에, “호성전”을 지어, 재를 지냈다. 현재, 호성전에는 정조를 포함한, 4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로서,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파주에 “소령원”을 조성하고, 파주 “보광사”를 원찰로 삼은 사례처럼, 정조가 “효”를 실행한 “용주사”는, “보광사”와 함께, “효”의 본보기 사찰이 되었다(영조 아들이, 사도세자. 사도세자 아들이, 정조). 국보로는 “용주사 동종” (국보120호)이 있고, 보물로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보물1754호), “용주사 대웅보전”(보물1942호)이 있는데,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며, 후불 탱화는 김홍도 작품이라고 한다. 그외, 부처님 진신사리 2과를 봉안한, 5층석탑을 포함한, 경기도 유형 문화재 14점이 있다(사찰내, “효행박물관”도 있다).

 

조계종 선정 33관음성지~ 1.강화 보문사(해수관음) 2. 서울 조계사(관음전) 3. 화성 용주사 (관음전) 4. 예산 수덕사 (관음전과 관음바위) 5. 공주 마곡사(대웅보전, 수월관음후불탱화) 6. 보은 법주사(관음전) 7. 김제 금산사(원통전) 8. 부안 내소사(대웅보전, 수월관음보살좌상후불 벽화) 9. 고창 선운사(관음전) 10. 장성 백양사 약사암(영천굴) 11. 해남 대흥사(관음전) 12. 여수 항일암(관음전, 해수관음상) 13. 순천 송광사(관음전) 14. 구례 화엄사(원통전) 15. 하동 쌍계사(대웅전, 관음보살

 

16. 남해 보리암(관음삼존불, 해수관음상) 17. 대구 동화사 부도암(관음전) 18. 경산 은해사(극락보전, 관음보살) 19. 합천 해인사(대적광전, 관음불) 20. 김천 직지사(관음전) 21. 의성 고운사(극락전, 관음보살) 22. 경주 기림사(관음전) 23. 경주 불국사(관음전) 24. 양산 통도사(관음전) 25. 부산 범어사(관음전) 26. 속초 신흥사(극락전, 관음보살) 27. 양양 낙산사(해수관음보살상) 28. 평창 월정사(육수관음상) 29. 영월 법흥사(극락전, 관음보살) 30. 원주 구룡사(관음전) 31. 여주 신륵사(관음전) 32. 서울 봉은사(해수관음상) 33. 서울 도선사(관음석불

 

* 구례 화엄사~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신라의 고승이었던, 인도 승려 “연기”가 창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따왔다고 한다(구례, 광양, 순천, 남원의 “아막성”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영토였는데,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지역을 신라에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화엄사는 신라사찰이다). 선덕여왕12년(643년)에, “자장율사”가 증축하면서, 사리탑과 7층탑 등을 세웠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면서, 화엄십찰의 도량으로 삼아, 화엄종찰이 되었다.

"화엄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중수하고, 고려시대에도 4차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때 , 주지스님과 승병들은 “석주진”을 지키다 모두 전사하였고, 사찰은 전소되었다. 범종은 왜군이 탈취하는 중에 섬진강에 빠졌다고 한다. 인조14년(1636년)에, 벽암대사가 “대웅전”등 건축물을 중수하였고, 이어 “장육전”을 1643년에 완공하였다. 숙종28년(1702년)에, “장육전”(미륵전)자리에, 새로이 전각을 짓고, 삼존불과 4분 보살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때, 숙종 임금이 “불교가 자신에게 깨우침을 주었다”는 의미로, “각황전"이라는 전각 이름을 하사하였다.

각황전 건축 설화~ “계파스님”은, 스승인 “벽암스님”으로부터, 임진왜란때 소실된, “장육전”(미륵전, 키가 1장6척이라는 의미로, 미륵불을 이렇게도 부른다)의 중창불사를 위촉받았다. 하지만 자금등 문제로 엄두가 나지 않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대웅전에서 종일 기도만 올렸다, 깜박 조는 사이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대는 걱정말고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중창불사의 시주를 권하라”라는 현몽을 꾸었다. 다음날 계파스님은, 길을 나섰는데, 엉뚱하게도 밥을 얻어 먹는, 노파를 제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밥을 얻어 먹는 처지의 노파에게는, 중창불사를 시주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눈앞이 깜깜했지만, 용기를 내어 시주를 권했다. 노파도 깜짝 놀라, 자기에게 무슨 돈이 있다고, 시주를 권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거절하였지만, 내심, 시주를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계파스님도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시주를 권했다. 노파는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죽어 왕궁에 태어나, 큰 불사를 하겠으니,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를 내리소서”라며 “큰 발원”을 하고는, 연못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계파스님은 당황해 하며, 같이 연못에 뛰어들어 노파를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는 없었다.

 

계파스님은, 자신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하였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그냥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어느 날 한양 궁궐 앞을 지나는데, 나들이 나온 “옹주”(어린 공주)를 만나게 되었다. 옹주는 계파스님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아~ 우리 스님”하면서, 오른손을 펴 보이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사실, 옹주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 주먹을 펴지 않아, 불구인줄 알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숙종”임금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숙종임금은 크게 감동을 받고, 불법을 크게 깨달아, 큰 시주금을 내어 주면서, 계비 “숙빈 최씨”(영조임금의 친모)로 하여금, 중창불사에 적극 동참하도록 하였다. 1702년(숙종28)에 전각이 완성되자, 숙종 임금은, “불교가 자신에게 크게, 깨우침을 주었다”는 의미로, “각황”(깨달은 왕)이라는, 전각이름을 하사하였다. 화엄사에서는,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도움을 준, 숙종의 “계비”이면서,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각황전 옆에 “홍매화”를 심었다. 수령300년인, 화엄사 “홍매화”는 2024.1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각황전 옆, 홍매화는, 오래 전부터, 사진 찰영 명소로 유명하여, 꽃피는 시기인, 2월중순~3월초순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든다.

각황전”(국보67호, 국내 최대 목조건축물) 내부에는, 가운데 “석가불”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보현보살, 그리고 “아미타불”, 그 옆에 관음보살”을 모셨다. 좌측으로는, 석가불 옆에, 문수보살, 그리고 “다보불”, 그 옆에 대세지보살(지적보살)을 모시고 있다(즉, 3불4보살이다). 화엄사 "대웅전"(보물299호)은, 인조10년(1832년)에,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중건하면서, 현판을 대웅전으로 하였지만, "실제"는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을 모신 "대적광전"(비로전)이다, 즉,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국보336호)의 비로자나불(법신불), 석가모니불(화신불), 노사나불(보신불)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화엄사 중심은, 각황전보다 크기가 작지만,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웅전이다.

 

각황전 앞의 석등은, 국보12호이며, 원통전(관음보살을 모심) 앞의 4사자탑은 보물300호이다. 각황전에서 뒤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4사자 3층석탑”(국보35호)이 있다. 그 아래에, 기존의 “해인당”(견성당)을, 2018년에, 중창한, “견성전”(적멸보궁)이 있다. 견성전은 “적멸보궁”이므로, 내부에 불상이 없으며, 창을 통하여, 국보35호 “4사자 3층석탑”이 보이는 구조이다. 견성전에서 더 올라가면 "삼신각'이 있다. 625 때, 전라북도 초대 총경, 차인혁이, 화엄사를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화엄사 문짝만을 불태우는 묘안으로, 차후, 문화재를 지킨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4사자 삼층석탑~ 각황전 뒤에 있는 국보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대표 석탑이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한국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2021년, “사사자삼층석탑”을 수리하면서, 화엄사에서는 탑속에, 새로이, “사리함’을 조성하고, 부처님 “진신사리”, “오방법신불”, “보원행원품” 등을 사리함에 봉안하였다. 이로서, “사사자 삼층석탑”은, 견성전(불상 없음)에서, 바라보며 기도드리는, “적멸보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엄사는 사적5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국보67호), 각황전뒤 4사자 3층석탑(국보35호), 각황전앞 석등(국보12호), 화엄사 영산회 쾌불탱(국보301호), 대웅전의 목조비로자나불 삼신불좌상(국보336호)의 4점 국보와, “동쪽”, “서쪽” 오층석탑(각 보물132호, 133호), 대웅전(보물299호), 원통전앞 4사자탑(보물300호), 화엄석경(보물1040호),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1348호), 대웅전 삼신불탱(보물1363호), 목조석가여래불좌상 및 4보살입상(보물2139호) 천왕문에 있는 소조 사천왕상(2023년, 보물로 지정), 천왕문(2024년, 보물로 지정)의 보물10점을 보유.

 

기타 천연기념물로, 각황전옆에 있는 “홍매화”(202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화엄매), 화엄사입구에 있는, “일지암” 뒷 마당에 있는, “올벚나무”(천연기념물38호), 화엄사 경내 “구층암”(모과나무를, 자연그대로 모습의 기둥으로 건축한 암자)에서, “길상암”가는 길가에 있는, “백야매”(매화나무, 천연기념물485호)가 있다. 화엄사 경내에는 성보박물관이 있다(화엄사 인근에는, 약사기도처로 유명하고, 섬진강이 조망되는 “사성암”이 있다).

 

* 하동 쌍계사~ 지리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쌍계사는, 722년(성덕왕21)에 “승법”이 창건하면서 “옥천사”라 하였다. 887년(정강왕2)에, “정강왕”이, “옥천사”에서 수행했던,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숭상하면서, 2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다며, 사찰 이름을, “쌍계사”로 바꾸고, “최치원”이 비문을 쓴, “진감선사탑비”(국보47호)를 세웠다. 그 이후, 쌍계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화엄사를 중건한 “벽암선사”가 1632년(인조10)에 다시 지었다 한다. 쌍계사 대웅전은 “화엄사” 각황전처럼, 3불4보살을 모시고 있다. 팔상전은, 석가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으며, 쌍계사 “금당”은, 수행공간으로서, 조계종의 근본도량이다. “금당”안에, “육조혜능 두상탑전”을 모시고 있다. “금당”과 “세계일화조종육엽”이라는, 금당의 현판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한다. 쌍계사에는, “차나무의 시배지”(경남 기념물61호)가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진감선사탑비”(국보47호), “쌍계사승탑”(보물380호, 부도), “대웅전”(보물500호), 대웅전 “삼세불탱”(보물1364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925호), 팔상전 “팔상탱”(보물1365호), 쌍계사 “괘불도”(보물1695호), 쌍계사 “감로왕도”(보물1696호), “동종”(보물1701호)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석등(경남유형28호), 일주문(경남유형 86호), 금강문(경남유형 127호), 사천왕문(경남유형 126호)을 비롯한 13점과, 스리랑카에서 가져 온, 진신사리를 모신, 9층석탑, 그리고 “금강계단”과 “마애 삼존불”이 있다.

 

쌍계사는 벚꽃길이 유명하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경내의 단풍이 유명하다.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까지의, 3월중순부터 4월초순까지 피는, “십리벚꽃길”은, 한국 아름다운 길중 하나이다. 화개장터는 오일장이 아닌, 상설 시장이 되었고, 먹거리로 재첩국과 섬진강변의 참계탕이 유명하다. “십리벚꽃길”이 끝나는, 쌍계사 입구에서, 좌측 계곡도로를 쭉 가면, 가야 김수로왕의 7형제가, 동시에 모두 성불하였다는 “칠불사”가 있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신라 승려인 “정관”이 426년에 “만일암”으로 창건했다고 하는 설과 신라말인 89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지승원 7사찰중 하나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승병 “총본영”이었다. 대흥사에는, 뿌리가 붙은, 500년된 “연리근” 느티나무가 있으며. 대흥사의 “무량수각’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한다. 대흥사의 단풍은 유명하고, 해남지역의 단풍 절정시기는 11월초순~중순이다. 대흥사에는, 우리나라 "차"문화를 개척하신, “초의선사” 동상이 있다. 대흥사 뒤편을 따라 산길 20분 정도를 올라가면 “초의선사”가 기거하던 “일지암”이 있다.

 

대흥사 천불상 설화~ 1811년에, 큰 화재로, 대흥사 천불전과 천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래서 대흥사에서는, 불에 타지 않는 옥석으로, 천불을 다시 제작하기로 하였다. 옥석의 산지인 경주에서, 40여명 스님들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천불을 완성하고, 옥석으로 만든 완성불상을, 큰 배에는 768개, 작은 배에는 232개를 싣고 울산 바다를 출발하였다. 232개를 실은, 작은 배는 해남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768개를 실은, 큰 배는, 부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결국, 일본 “나가사키”까지 가게 되었다. 수많은 불상을 만나게 된, 일본은, 이를 상서롭게 여겨, 768불을 모시기 위해, 사찰을 새로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일본에 모시기로 결정한 날, 일본승려 꿈에, “불상”이 나와, “자신은,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던 길이었으니, 자신이 일본땅에 봉안될 수는 없다”라 말하는 꿈을 꾸었다. 일본은, 할 수없이 표류한 “승려들과 불상”을,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었다고 한다.

 

대흥사 보유 문화재는, 탑산사명 동종(보물88호), 대흥사 삼층석탑(보물320호), 서산대사탑(보물1347호), 서산대사유물(보물1357호),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1547호), 영산회쾌불탱(보물1552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보물1667호), 천불전(보물1807호)의 보물8점이 있고, “천불상”을 비롯한, 전남 유형문화재 6점을 보유하고 있다.

 

일지암~ 대흥사 산내 암자인,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39세인 1824년에 지은 암자인데, 1866년 “초의선사” 입적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승려 응송과 낭월이 1979년 중건하였다. 초의선사는, 정조대왕시절에, ”동다송”이라는, 우리나라 “차”에 관한 책을 편찬하고, 우리만의 “차문화를 개척”하신 분이다. “일지암” 뜰에는 지금도 차나무가 있다. “대흥사”에서는 매년, “초의선사 문화제”를 통해, 차문화를 전파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해남 달마산 미황사~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에 있는, 대웅전(보물947호)과 달마산의 “조화”가 “아름다운 사찰”이다. 특히 달마산(489m)과 어울려, 불상, 바위, 석양빛이 "삼황"이라 부를 만큼 아름답다고 한다. 미황사는 749년(신라 경덕왕7)에 “의조”가 창건하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전각이 소실되어, 1601년, 1660년, 1754년의 중창이 있었다. 그 후, 1887년, 섬마을을 돌며, 중창불사 자금마련 길에 나선, 미황사 승려40여명이 풍랑을 만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이 사건과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이 겹쳐, 사찰은 페사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쓰려져 가는 사찰을, "지운”, ‘현공”, “금강”스님이, 1989년부터, 쓸고 닦고, 정리하여, 동백꽃, 홍매화와 함께, 달마산과의 조화도 알려져,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황사 창건설화~ 749년8월 한 척의 배가 “사자포”앞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해변으로 나갔더니, "금인"이 노를 잡고 있는, 배의 “금함”속에, 경전과 불상이 들어 있어,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다. 그날 밤, 꿈에, 금인(금빛을 발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은 인도국왕인데, “금강산은 “일만불”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금강산에는 이미 수많은 사찰이 들어차 있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 할 수없이 돌아 가는 길에, 여기가 인연이 되어 멈추게 되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하리라”라는 말을 하고,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었다 일어난 곳에, “통고사”를 창건하고, 소가 마지막 멈춘 곳에 절을 짓고, 소 울음소리의 지극히 "아름다움"과, 금인의 “금빛”을 취하여, “미황사”라 하였다고 한다.

 

미황사 탱화~ 미황사에는, 폭5m에, 길이가 12m나 되는, 대형 행사 걸이용 “탱화”가 있다. 전체에 석가불이 그려져 있고, 아래 쪽에는 용왕과 용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탱화는 가뭄에 특효가 있어, 가뭄이 들 때, 걸어 놓고, 기우재를 지내면, 비가 틀림없이 내리게 되는, 영험으로 유명하다. 또, 소원도 들어 주는 것으로도 알려져, 매년 10월에 열리는 “괘불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든다(용왕과 용녀는, 물과 관련되는 신령한 존재를 의미하는데, 기우제를 지내면, 탱화에 그려진, 용왕과 용녀가 신령한 조화를 발휘한다고,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미황사 보유 문화재는, 대웅전(보물947호), 응진당(보물1183호), 미황사 괘불탱(보물1342호)가 있다. 미황사 일주문을 지나면, 다도해가 한 눈에 전망되는, “달마고도” 둘레길을 통하여, 달마봉을 오르는 길이 있다(미황사에서 왕복 3시간, 3.7km). 달마산(489m)은 불상, 바위, 석양빛이라는, “삼황’에 해당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한다.

기도란 마음에서 이루어지므로, 엄격히 말하면 원칙적으로 영험도량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질수 있고, 보살님의 위신력 또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가지므로, 그 기도의 장소가 어디든, 그곳이 청정도량이면, 충분히 여러 보살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소규모 사찰이더라도, 재정이 어려운 청정도량에 하는, 기도와 시주 공덕 의미는, 더 크다고 할 것입니다. 판단은 자유겠지만, 서울 조계사앞에는, 매주 금요일, 토요일에 철야 기도를 위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소문난, 전국의 영험사찰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무속인들은, 전국 각처의 산속에 많이 산재해 있는 마애불(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있는 곳의 터가 상서롭고, 영험하다하여,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한적한 마애불앞에서의 기도이외 무속행위는 산불의 위험이 있어 무속행위금지 팻말이 많이 붙어 있다.

 

서울 도봉산의 원통사에는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였다는 석굴이 있는데, 그 기도를 마치는 날, 이성계가 상공(정승)이 되어 하느님을 배알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통사의 약사전 바로 아래 바위에는 "상공암"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절뒤의 우이암은 관음보살이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라 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천혜의 관음성지라 말한다

 

서울 근교, 북한산 서편 전통사찰로, 진관사(2009년 칠성각을 수리하던 중, 독립관련 유적인 신문과 일장기 위에 그린 태극기 발견함), 삼천사(애기를 점지해주는 영험마애여래 입상), 흥국사(약사기도처), 파주 보광사(도선국사의 천하명당 비보사찰. 영조임금의 모친 숙빈 최씨의 어심각, 영조임금이 쓴 대웅전 현판, 영조임금이 심었다는 300년 향나무가 있다)

 

서울 동편 전통사찰은, 도선사(영험한 마애불), 화계사(외국 승려를 위한 국제선원이 있다), 불암사(마애삼존불,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진신사리보탑이 있다)가 있으며, 서울 남쪽 전통사찰인, 안양(과천) 관악산 삼막사(원효, 의상, 윤필의 3대선사가 수도하였다하여, 관악산 남서쪽을 "삼성산"이라 부른다. 3분스님이 삼성산에 초막을 짓고 수도하다가, 원효는 이곳에서 삼막사를 창건하였으며, 의상은 연주암을, 윤필대사는 염불암을 각각 창건하였다)등등이 있다

 

삼막사~ 원효스님 창건. 삼막사의 경내에는 “삼막사 사적비”(경기유형문화재125호)가 있는데, 원효스님이 “삼막사”를 창건하였고, 고려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관음사”라고 했던 것을, 다시 고려 태조가 중수하면서, “삼막사”로 고쳐 불렸다고 되어있다. 삼막사에서 우측 산길을 올라 가면, 칠보전이 있다. “칠보전”에는 "치성광여래 마애삼존불"(경기유형문화재94호)을 모시고 있다. 주로, 칠성각(삼신각) 후면에 모시는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을 의미하는 한민족의 하나님인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보처로 하고 있다. 한편, 약사전의 약사여래도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보처로 한다. 결국, 삼신각 또는 칠성각에 모셔진, 칠여래가 증명하는, 한민족의 하나님, 즉, “치성광여래”는, 무병장수와 자손번창을 상징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는, 약사여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보통 “칠성각”을 지어, 아픈 곳도 치유한다는 의미로, 치성광여래를, 칠성님 뒷쪽에 “불화”로 모시고, 칠성님(하느님)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헌데, 치성광여래를 불화가 아닌, 바위에 마애불을 새겨 모신 것이 삼막사 “칠보전”입니다. 1763년, 치성광여래 마애삼존불을 바위에 새겼다고 하는데, “칠보전” 오른쪽 바위에는, 1784년(영조40년)에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는 명문과, 1881년(고종18년)에, “칠성각’을 고쳤다는 명문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칠성님을, 앞쪽에 모셨는데, 없어진 것인지는 알수 없지만, 현재는, “치성광여래 마애 삼존불”의 보호각을 지으며, 약사역할을 강조하는, 삼존불을 모시고, “칠보전”이라는 현판을 붙여 놓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삼막사 칠보전”은, 하나님(칠성님)의 약사여래 역할을 강조하며, “치성광여래”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한민족의 하나님은, 칠성궁에 계시므로, 칠성님이라 부른다).

이밖에, 삼막사 “칠보전”옆에는 남근석, 여근석 바위(경기민속문화재3호)등이 있다. 삼막사에는 명부전(경기도문화재60호),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112호)이 있는데, 삼층석탑은, 1232년, 승려 “김윤후”가 원나라 장수 “살리타”를 화살을 쏘아 사살하여, 많은 군민들의 목숨을 살리고, 크게 이긴, 용인 처인성 전투를 기념하여 세운 탑이다.(삼신각에 모신, 하느님 즉, 일명 칠성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 아래쪽, “삼신각” 참조).

 

용인 처인성 전투~1231년 몽고의 1차 침입이 있었고,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몽고군은 이에 1232년 10월 2차 침입하여, 경기도 광주성을 공격하여 실패하자, 남진하여, 1232년 12월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낮은 구릉으로 된 작은 처인성에 피해있는 군민들을 향해, 몽고군이 전면적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승려 김윤후에 의해, 적장 “살리타”가 화살을 맞아 죽었다. 장군을 잃은 몽고군은 혼란이 일어나고, 많은 포로를 남기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많은 군민들의 목숨을 살리고 크게 승리한, 승려 김윤후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 삼막사 삼층석탑이다

 

염불사~윤필대사가 창건했다는 염불사는, 삼막사로부터, 남쪽 안양유원지 쪽으로 약 7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염불사에는 경기도 지정보호수인 수령500년이상으로 추정되는 “보리수”가 있으며, 1968년 기석스님이, 꿈에 미륵보살을 배알하고, 세웠다는 8미터 높이의 미륵불이 있다. 보통 부도는 원통형으로 세워지는데, 염불사에는 안양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원통형 부도 3점과 바위를 파서 만든 마애부도 2점이 있다

 

연주암 ~의상대사가 677년,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아래 관악사를 창건한 나한도량이다. 세월이 흘러,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 200일 기도를 하였다. 1398년 고려가 망하자, 고려 충신들이, 관악사에 은거하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하며, 의상대를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 효령 두 대군이 관악사에서 수행하며, 미련을 떨치려했으나, 관악사에서는 왕궁이 보이므로

 

1411년, 관악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바꾸었다. 연주암에는, 경기지방문화재로, 효령각에 모셔진, 효령대군영정(81호), 고려시대 양식으로, 효령대군이 세웠다는 삼층석탑(104호)이 있다. 연주암 템플스테이를 신청하면, 관악산을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특전(유료)이 주어지고, 과천과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있다. 또한 새벽예불에 참석하면, 서울에서 보기드문, 별자리를 볼 수 있다(관악산 연주암 연주대의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 기도처이며, 응진전 옆, 바위에 새겨진, 마애약사여래불은, 영험한 약사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서울 수도산 봉은사~ 794년 신라 원성왕시절, 연회국사가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수도산은 서울 우면산에서 북쪽 지맥으로 이어지는 75미터의 조그만 산이다). 1498년(연산군4년)에 성종의 능침사찰(선릉)이 되면서, 많은 땅을 하사받으며 중창하고, 이름을 “봉은사”로 바꾸게 되었다. 그 후, 1548년(명종3년)에, 명종의 섭정을 맡은, 문전왕후의 옹호를 받는 “보우대사”가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였고, 1551년(명종6년)에, 승과를 부활하면서, 봉은사는 승과시험을 보는 곳이 되어, 선종의 수사찰이 되었다(남양주의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이 되어 승과를 보는 곳이 되었다). 이듬해 “선릉”동쪽에 있던 봉은사를, 지금의 수도산으로 옮겨 세웠다. 현재, 수도산 기슭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있다(봉은사는, 남양주 광릉의 “봉선사”, 수원 화성 융건릉의 “용주사”처럼, 능침사찰이 되면서, 양주 “회암사”처럼, 유생들에 의해, 사찰이 불태워지는 사태는 면했다)

 

강남개발이 되기 전까지, 봉은사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한양에서 봉은사를 가려면, 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당시의 한강흐름은, 북쪽에 “신천강”이라는 지류가 있었고, 남쪽에는, 현재의 석촌호수 "동호"와 "서호"를 잇는 “송파강”이라는 한강 본류가 있었는데, “잠실”은 그 사이에 있는 모래섬이 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봉은사주지 “청호”스님이, 사찰의 재산을 털어 배를 구입하여, 잠실 곳곳에서 고립된 주민을 구조한 사례도 있다. 1939년의 화재와 1950년의 625전란으로 일부만 제외하고, 전각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는데, 1980년 이후 점차 건축되어, 현재는 8개의 법당을 비롯한 30여동의 전각이 있다. 

 

영산전은, 북방 “영산 정토세계”에 계신, "화신불"인, 석가불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전은 석가불의 중생교화를 나타내지만, 영산전은, 석가불처럼, 중생구제를 위해, 중생의 몸과 같은 범부의 모습이나, 시대나 지역, 상대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시는, 화신불 (응신불)을 모시게 됩니다. 과거불, 석가불, 미래불(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영산전은 "화신불"로서, 석가불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석가불의 “영산 정토세계”를 나타내는 전각이므로,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제화갈라보살”은, 석가의 먼 전생에, 수행자였던 석가에게,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는 “정광여래”의 화신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서울 강남 “봉은사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나한전(응진전)처럼,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협시보살로 하는, “나한”을 모시고, 영천 “거조사 영산전”에는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다. 또, 봉은사는, 치성광여래(칠성님)를 모시는, 삼신각의 현판을, “북극보전”이라 하였다.

 

봉은사는, 양력법회인 "일요법회"를 실시하는 사찰중의 하나이며, 음력법회는 “초하루법회”, 방생대법회”등이 있다. 봉은사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사찰임에도, 봉은사 경내에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조용하고, 근처에 코액스몰이 있어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사찰이다. 인근에 명문고가 있어, 입시철에 108배를 하는 학부모가 많다. 과천에 기거하던,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았으며, 대웅전과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특히, 판전의 현판은 죽기 3일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보유 유물로는, “봉은사 청동은입사향완”(보물321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보물1819호), 그리고 “ 판전" 및 "판전 현판”을 비롯한 서울시 유형문화재18점, 서울시 문화재 자료2점이 있다.

봉은사 판전(서울시 유형문화재84호)~ 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전각을 말한다. 봉은사에 봉안된 판전은, “영기”스님이, 1856년(철종7년)에 판각하여, 봉은사에 봉안한, 화엄경 주석본 3,175판이다. 당초, 당나라 “실라난타”가 번역한,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한, 중국 “징관”의 주석본을, 명나라 판본으로, “성총”스님이 입수한 것을, 1690년(숙종16년)에 간행하여, 스님들의 “화엄경”공부에 사용하고 있었다. 이 “성총”스님의 간행본을, 1856년(철종7년)에, “영기”스님의 주관으로, 판각하여, 봉은사에 봉안한 것이다. 이 경판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화엄경의 주석 판본으로, 희소성과 규모가 있는 불교 유산이다.

 

1960년대까지 봉은사는 말죽거리부터 봉은사까지 10만여평에 달하는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방이후, 계속된, 비구승과 대처승의 다툼으로, 결국 대처승을 모두 몰아냈지만, 강남개발과정에서, 대처승과 그 가족들은, 봉은사의 땅을 싸게 구입하려는 정부에, 땅을 불법으로 매각했고, 또 박정희 정부에, 봉은사 후면에 있는, 수도산 절반을 강탈당하여, 현재 그곳에 경기고등학교가 세워졌다. 봉은사 관련 사건으로는, 1988년 봉은사 주지임명권을 둘려싼 폭력사태가 있었다. 2010년에는, 일부 개신교 단체가, 봉은사 사찰내에서, 낙서와 ”지신 밝기”를 하는 등, 무속행위나 다름없는 행위를 하고, 사찰입구에서, “절이 무너져라”며, 개신교식 예배기도를 하기도 한 곳이, 바로 서울 “봉은사”이다.

 

*서울 근교의 조선왕실 기도처 ~ 동쪽 : 불암사, 남쪽 : 삼막사, 서쪽 : 진관사, 북쪽 : 승가사. 

 

서울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에는, 명성황후가 시주하여 조성한, 서울지방문화재 124호인, 높이 13미터의 "마애관음불"이 있다(불암산은 바위산으로, 불암산 천보사와 석천암에도, 대형 마애불이 있다) 서울 북한산 산성내에 있는 사찰(고종임금의 후궁인 순빈 엄씨가 기도하여 영친왕을 낳았다는 무량사를 비롯하여, 국녕사, 중흥사, 노적사, 서암사, 원효암, 상문사, 부왕사, 범용사, 보리사, 묘적사, 덕암사, 대동사등 10여개 사찰이 있다

 

도봉산에 있는 3개의 석굴암 도봉산(오봉산) 석굴암~ 구분하기 위해, 오봉산 석굴암이라 부름. 강북구 우이동에서 우이령 고개를 넘으면, 도봉산 오봉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인데,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짐. 주전불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적멸보궁인데, 특이하게 삼신각은, 가운데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나한전에는 독성각의 나반존자를 가운데 모시고 있다. 나반존자는 생식을 하므로, 스님이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5년, 기도를 의뢰한 신자 3사람이 의구심을 나타내자, 존자께서 몸에 생살을 붙여 보이므로서, 의구심을 떨쳐 냈다는 영험으로 유명한 나반존자 기도처이다

 

② 도봉산 석굴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거대 암석인, 도봉산 자운봉 바로 아래에 있다(석굴안에는, 불국사 석굴암과 유사한 석가불을 모시고 있다). 이곳은 도봉산 대형 암벽의 위엄과함께, 강한 지기를 느낄 수있으며, 서울 동편 전망이 한눈에 들어 온다

 

 도봉산 회룡사와 석굴암~ 구분하기 위해, 사패산 회룡사 석굴암이라 부름. 의정부 회룡사 바로 인근에 있으며, 회룡사에서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3년간 수도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개국후, 이곳을 "법성사"에서 "회룡사"로 이름을 바꿈. 회룡사와 100여 미터 인근에 있는 석굴암(회룡사 후문 또는 회룡사와의 삼거리에서 능선을 타고 간다)에는 석굴 바위가 있다. 김구선생이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에, 머물렀던 석굴암 바위에는 김구선생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도봉산 망월사 ~ 월성(경주)을 바라보며, 신라 왕실의 융성을 기원 했다 하여, 망월사라 함. 망월사의 영산전은,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 준다는, 영험한 나한 기도처로, 매년 봄 가을 철야 기도를 실시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험한 나한 기도처 참조

 

우리나라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에 포함된 7개 사찰~① 법주사(충북 보은), ② 마곡사(충남 공주),③ 부석사(경북 영주), ④ 봉정사(경북 안동), ⑤ 통도사(경남 양산), ⑥ 선암사(전남 순천), ⑦ 대흥사(전남 해남~임진왜란 서산대사 승군 총본영이 있던 곳. 백설당의 현판 "무량수각"은 김정희의 필적).

 

기타 아름다운 사찰~해남 미황사(불상과 바위, 석양빛으로 아름다운 조화. 달마산 능선의 조망경관이 빼어나다. 가뭄이 들때, 걸어 놓고 기우재를 지내면, 비가 틀림없이 내린다는 "쾌불"의 영험이 유명하다) 구례 사성암(주변 바위의 형상이 뛰어나며, 구례들판과 섬진강이 조망된다. 아래, 영험한 약사기도처 "사성암"참조) 경기 남양주 봉선사(인근에 광릉수목원이 있으며, 매년 7월에 열리는 경내 저수지의 여름 연꽃 축제와 가을 단풍이 좋다. 최초의 한글편액과 템플스테이로도 유명 .1551년 보우대사가, 승과를 부활하면서, 서울 봉은사는 선종의 수사찰로, 선종 승과시험을,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로, 교종 승과시험을 보는 곳이 되었다. 봉선사에는 "하마비"가 있다산청 수선사(연못과 정원이 아름다운 안식과 힐링의 장소) 함양 지리산 칠선계곡 서암정사(한국 3대 계곡인 칠선계곡을 마주하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하고 있다. 사경수행 유물과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서산 간월도 간월암(무학대사가 달빛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하여, 볼"간", 달"월" 글자를 써서 간월암이라 함. 간월암은 썰물(간조)때 들어 갈 수있다. 간월암 건너편에서 간월암을 배경으로, 또는 간월암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이 절경. 현대 정주영회장이 이곳에서 기도하여, 서산간척지 마지막 뚝막이 방법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양평 용문산 용문사(천년기념물로 지정된 1,100~1,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으며, 이곳은 용문산 관광단지로 조성된, 유명 단풍 관광지이다

 

황금사원 수국사(서울 은평구 구산동)~ 법당 대웅전을,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고 알려진, "황금"으로 대웅전 안밖을 99.9%의 순금으로 도배한 우리나라 유일의 "황금사원"이며, 동양 최대의 불교 황금사원이다. 수국사는 1459년,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인데, 의경세자의 부인이,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이다. 1900년 고종의 황태자 순종이 중병에 걸려,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이에 월초스님은, 청도 운문사 사라암에서 100일간 나반존자 독성기도를 올렸다한다. 80일정도 되는 날, 늙은 승려가 꿈에 나타나,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한다. 이에 감복한 고종이 월초스님 소원을 물어, 이 "수국사"를 중창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1995년, 기와를 제외한 수국사 대웅전 전체를 도금하게 되어, 황금사원이 되었다. 또 법당마당에는 "초전법륜상"이 있으며, 특이하게도 "나한전"을 "염화미소전"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붙였다. 또 지장전과 삼성각을, 궁궐에서나 볼수 있는, 특이한 육각형 정자형식으로 지었는데, 지장전의 처마밑에는 "크다란 목탁"이 걸려 있었고, 목탁 구멍에는, 여름에만 살고 있다는 "목탁새"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몇년 전부터 목탁새가 찾아오지 않아, 요즈음은 목탁새를 볼 수없다고 한다.(청도 운문사 사리암은 영험한 독성기도처)

 

미륵보전 용화보전 : 미륵전은, 남방 “용화 정토세계”에 계신, 미륵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다. 미륵부처님은, 현재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계시며, 내세에 중생을 교화할 “미래불”이다. 미래불이 출현하는 곳이 “용화 정토세계”의 용화수 아래이고,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새롭게 이루어질 청정 불국토인 “용화 정토세계”를 상징한다고하여 용화전이라고도 한다. 또한 미륵불의 자비를 상징하여 자씨전, 대자보전, 또는 사람크기의 2배인, 1장6척의 장륙존상을 모신다고 하여 장륙전이라고도 한다. 미륵신앙은,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신앙이다. 좌우에 묘량보살과 법륜보살 또는 대묘상보살과 법화림보살을 모신다. ​후불 탱화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용화회상도, 또는 도솔천의 광경을 묘사하거나, 미륵불이 내려오는 모습인 미륵내영도이다→ 저승의 모습은 "사후세계 도표, 저승도표"참조

3대 미륵성지~ ① 김제 모악산 금산사 ② 보은 속리산 법주사 ③ 고성군 금강산 발연사. 미륵신앙은 백제에서 특히 유행하였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진표율사"에 의해 더욱 크게 유행하였다. 진표율사는 717년 완산주(전주) 태생인데, “3대 미륵성지”인, 속리산 법주사(553년, 진흥왕14년 의신스님이 창건)와 모악산 금산사(599년, 백제법왕1년 법왕이 창건)를 중창하고, 금강산 발연사(770년, 신라 혜공왕6년 진표율사 창건)를 창건하였다. 금강산 발연사는 고성군 외금강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알려진 영험한 미륵보살 기도처~① 논산 반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상입상(국보323호. 일명 은진미륵)은 높이 18미터의 과거 최대 규모석불이었다(대구 "동화사"의 “통일 약사대불”은 1992년 세운, 높이 33미터의 돌로 만든, 세계 최대 석불이다. 영험한 약사기도처 참조). 고려초 한여인이 고사리를 꺽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 갔더니, 크다란 바위가 땅속에서 솟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이 불상을 조성토록 하였다. 970(고려광종21)부터 37년간 공사하여, 1006(목종9)에 완공. 거대한 불상을 세우는 방법을 문수, 보현보살이 알려 주었다 한다(모래사다리 방법으로 세움). " 관촉사 석등”(보물232호), 은진미륵보다 빠른, 963(광종19)에 조성되었으며, 광명의 빛이 촛불과 같다고 하여 관촉사라 함. 영험한 미륵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최대의 불상은, 아래 “영험한 약사기도처”, “대구 동화사” 부분 참조

 

 파주 장지산 용암사~ 용암사 뒷편에, 높이 17미터, 마애미륵불(보물93호)이 있다. “용암사”의 창건과 미륵불 조성연대를 알수없지만,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고려시대인 11세기경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해진, 설화에 의하면, 고려 13대 선종(재위 1083~1094)에게 후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후궁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기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실제로 장지산에 큰 바위가 있어 서둘러 불상을 만들게 하였다. “불상”을 조성하는 중, 꿈에 보았던 “두 도승”이 다시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면서,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아이를 바라는 사람은 득남을 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불상이 완성되고 그 밑에 절을 창건하자, 후궁,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왕자, 한산후 윤(왕윤)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이불상은,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처로 널리 유명해졌다. 쌍 미륵석불의, 왼쪽 석불은 둥근 갓을 쓰고 연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을 한 모습이다. “용암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서울 북한산 문수봉 문수사”와 더불어, 이곳에서 기도하여, 이대통령을 기도로 낳았다는 기념표석이 있는, 영험한 미륵기도처이다. 1954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용암사” 쌍미륵석불을 참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미륵불” 왼쪽 어깨에 세워, 올렸는데, 이대통령 하야 이후 1987년 철거되어, 현재는 산신각 옆으로 옮겼다. 또, 범종각 인근에는, 박정희대통령이 “용암사” 방문기념으로 세운, 두개의"석등”이 있다.

 

③ 고창 도솔암 마애미륵불 (보물1200호)~이 미륵불은,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조성하었다고 전해진다. 미륵불 배꼽에 있다는 "비서"를 열어 보게 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미륵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화점이 되었다. 도솔암의 마애미륵불은 영험한 미륵기도처이지만, 도솔암 내원궁은 4대 지장기도처 이기도 하다(도솔암이 있는 고창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24년, 577년에 창건하였는데, 9월 중하순, 단풍과 함께, 붉은 색의 무릇꽃(일명 붉은 상사화)이 만개를 이루는 온통 붉은 색의 장관을 연출한다.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곡성"의 찰영지이기도 하다

 

*김제 모악산 금산사~599년(백제법왕1년)에, 왕실사찰로 세워졌다. 그 후, 766년(신라 헤공왕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미륵전”을 세워, 미륵신앙의 본찰이 되었다. 1598년 정유재란때, 의병활동지라는 이유로, 왜병에 의해, “금강문”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635년(인조13년)에 미륵전을 비롯하여, 중창하였다. 실제, 금산사는 화엄계열 사찰이므로, 미륵전이 아닌,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본불전”이다. 금산사는 후백제 “견훤”이, 장남 “신검”에 의해 3개월동안 감금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입구 무료 주차장에 주차하면, 벗꽃길을 따라, 도보15분,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면, 천왕문 입구에, 바로 닿을 수 있다

 

주요 전각과 문화재로는, 대적광전(보물476호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화재로 소실되어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 복원한 것이다), 대장전(보물827호, 이름에서 보듯, 원래 불경을 보존하는 목탑으로 건축하였는데, 현재는 석가와 제자를 모시고 있다), 석등(보물828호), 노주(보물22호), 석련대(보물23호), 혜덕왕사탑비(보물24호), 5층석탑(보물25호, 적멸보궁앞), 방등계단(보물26호, 적멸보궁앞), 육각다층석탑(보물27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28호)~참고로, 경주보문단지 당간지주(보물123호), 익산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236호), 영험한 지장보살 기도처인, “개심사”인근, 용현계곡에 있는,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103호)등이 있다

 

금산사 미륵전(국보62호)~ 복원물이 아닌, 1635년(인조13년)에 지어진, 국보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은, 그 내부는, 트인 통층이고, 외부는 3층으로 된, 우리나라 유일의, 기둥4개가 있는, 3층 누각식 “법당이다(즉, 일반적인 누각식 “목탑”이 아닌, 법당이다. 아래 참조). 금산사 미륵전 각층 현판에는, 1층 대자보전, 2층 용화지회, 3층 미륵전의 현판이 붙여있다. 법당 내부에는, 옥내에 있는, 부처님으로는 세계 최대 크기인, 미륵불 11.8미터, 좌우 보살상은 8.8미터이다. 내부 미륵불은, 일제때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이 조성한 것으로, 국가등록문화재 619호이다.

 

* 누각식 탑~ 사방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층고를 높게 짓거나, 여러 층으로 지어진 집을 “누각”이라 한다. “”을, 누각식으로, 짓고, 그 안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건축한 “탑”을 “누각식 탑”이라 한다. 누각식 목탑으로, 오래된 것은, 보은 법주사 “팔상전”, 문경 봉암사 “극락전”이 있고, 화재 후, 새로 복원한,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있다. 근래 세우진, 누각식 목탑으로, 진천 보탑사 “미륵전”이 있다. 즉, 법주사 “팔상전”(국보55호)은, 누각식 “목탑”이지만, 금산사 “미륵전”(국보62호)은, 기둥4개가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누각식 3층 “법당이다.

 

 화순 운주사 부부 미륵와불 (천불 천탑)~불교적 관점에서, 온 세상 우주를 "불국토"라 한다. 하늘의 불국토를 표현하여, 밤하늘 별의 수만큼 불상과 탑을 조성하려 하였던 곳으로, 칠성별 자리 불상의 인근, "북극성"자리에 "부부미륵"을 조성하여 "세우려" 하였다. 불교에서는 북극성을 "치성광여래"라 부른다[치성광여래는, 병장수와 자손번창을 의미하며, 주로 선교의 삼신각 또는 칠성각에 모시며, 선교의 약사여래 같은 역활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미륵의 염원을 담아 북극성을 "미륵불"로 표현하고 있다. "부부미륵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있다. 

 

화순 쌍봉사~ 809년 영천 은해사를 창건한(영천 은해사, 아래 "약사여래"의 대구 팔공산 사찰 참조), “혜철국사”가, 839년 하안거를 지낸 곳이 쌍봉사라는 내용이 있어, 쌍봉사는 적어도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후, 경문왕(861~875)때, 중국 소주성 “쌍봉사”에서 도를 깨치고 돌아온, “철감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쌍봉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철감선사는 경문왕 때인, 868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쌍봉사에는, 국보1점, 보물2점, 기타 전남도 유형문화재가 여러 점있다. 철감선사부도탑(국보57호), 철감선사부도탑비(보물170호),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보물1726호)이 있다.

 

보물163호였던, 쌍봉사 대웅전은, 보기드문, 3층(내부는 1층구조), “누각식 목탑”으로, 1984년 화재로 소실되어, 보물에서 해제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1690년에 중수되었음이, 화재이전, 삼층 누각식 목탑의, 대웅전 상량문을 통하여 밝혀졌다. 1984년 화재당시 “대웅전”은 불탔으나, 대웅전의 “불상”들은 재빠른 이동으로, 모두 무사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은, 화재이전 사진을 참조하여, 1986년 현재의 삼층누각식 목탑으로 복원된 것이다(“누각식 탑”에 대하여는, “금산사 미륵전” 부분 참조

 

 안성 미양산 용화사 석조여래~부부미륵이 땅에서 솟아 올라 생겼다는 부부미륵불로서, 불임부부 애기 낳기에 영험있다고 알려짐.⑥ 서울 구의동 아차산 영화사 미륵전~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 영화사 미륵전에 있는 미륵석불입상은,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지병을 치유했다는 영험설화가 전해지며,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영험한 미륵보살님으로 알려짐  기타 미륵보살 유적 ~ 충주 수안보 미륵대원지 미륵불, 안동의 이천동 제비원 미륵불, 익산 미륵사지

 

*진천 보련산 보탑사~고려시대 절터에, 1996년 건립한 사찰이다. 이곳에서 철야기도하며 부처님의 방광을 보았다는 사람이 많다. 이곳은 황룡사 9층 목탑을 본뜬, “누각식 3층 목탑”이 유명하다. 누각식 목탑은, 대부분, 모두 1~3층이 트인 형태인데, 보탑사는 내부에 계단이 있는 3층구조의 목탑이다. (“누각식 탑”에 대하여는, “금산사 미륵전” 부분 참조). 금속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목재로만 건축한 높이 52미터 건물(아파트 14층 높이). 1층은 사방불(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석가불, 북방 비로자나불로 조성함), 2층 법보전(운장대와 팔만대장경번역본), 3층은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포항 내연산 보경사~ 602년 신라 진명법사가 중국 진나라에서, 팔면보경(8면을 비추는 거울)을 갖고 귀국하여, 명당자리에, 이 팔면보경을 묻고 사찰을 세우면,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왕에게 아뢰어, 진평왕이 연못을 메워 사찰을 짓고 보경사라 하였다. 보경사 인근 내연산에는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 나오는 "내연산 삼용추도"의 내연산 12폭포가 있으며, 내연산 "소금강 전망대"에 오르면, 동해가 보이며, 마주보는 "선일대" 정자를 바라보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걸작인, "금강전도"의 완성된 모습의 절경을 볼 수 있다. 보유 보물로는, 원진국사비(보물252), 보경사승탑(보물430), 쾌불탱(보물1609), 천왕문(2024년 보물지정), 그리고 지방유형으로, 오층석탑, 대웅전. 경북기념물로 탱자나무가 있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 문장대 ~ 속리산은 신라시대에는 국가 산신제를 지냈을 정도의 중요한 산이었다고 한다. 진표율사가 이곳에 이르자, 밭을 갈던 소들이 무릎을 꿇었다고 하며, 이를 본 사람들이, 짐승도 알아보는 고승을 몰라 보았다며, 머리를 자르고 입산하였다고 하여, 속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문장대~ 세조가 속리산에서 기도와 요양을 할 때, 꿈속에서, “인근 영봉에 올라, 기도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정상에 도착하니, 정상에 “삼강오륜” 책이 한권 있어, 그 자리에서 임금이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속리산 법주사~ 553년(진흥왕 14년), 의신스님이 창건하였다. 부처님법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지어진 후, 중수를 거듭하다가, 조선후기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건축을 위한, “당백전” 주조를 위해 몰수당였다. 그런 다음, 처음에는 돈이 없어 시멘트로 조성하였는데, 그후 우여곡절 끝에, 1990년에 청동으로 완공하였고, 2000년에 대불을 순금으로 도금하였다. 높이 33미터로, 세계최대 청동불상의 높이였으나, 1993년 34미터인 홍콩 포린사원의 “천단대불”에 뒤졌다. 한편, 석불로 지어진, 대구 동화사의 “통일 약사대불”은 1992년 세운, 높이 33미터의 세계 최대 석불이라 한다(동화사 "약사대불"은 아래, 영험한 약사기도처 참조). 법주사는 2018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팔상전”(국보55호)은, 553년 창건시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05년(선조38년)부터 1626(인조4년)의 20여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내부 벽면을, 석가의 일대기를 8장면으로 그렸다하여 “팔상전”이라 불린다. "팔상전"은 1~5층이 모두 트인, 5층 “누각식 목조탑”이다(“누각식 탑”에 대하여는, “금산사 미륵전” 부분 참조

 

법주사에는, 쌍사자석등(국보5호), 석련지(국보64호), 사천왕석등(보물15호), 마애여래좌상(보물216호), 신법천문도병풍(보물848호), 대웅보전(보물915호), 원통보전(보물916호), 법주사 쾌불탱(보물1259호), 소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1360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1361호), 철솥(보물1413호),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1417호), 동종(보물1858호), 천왕문(2024년 보물지정) 등 국보와 보물과 지방유형문화재가 많다.

 

*속리산 복천암~ 속리산의 배꼽부분에 위치한다는, 복천암은 720년(성덕왕19년)에, 진정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주전불인 극락전 “무량수”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충북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고, 국가보물로 승격된, 수암화상부도탑(신미대사,보물1416호)과 학조화상부도탑(보물1418호)이 있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극락보전(299호), 극락보전 후불탱화인, 삼세불도(307호), 신중도(306호), 아미타여래삼존좌상(305호)등이 있다

 

“신미대사”는 복천암에서, 세종의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고, 한글창제 발표 후에는, 수많은 불경 언해본을 발행하여, 한글 실용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보답으로 세종임금은, 복천암에 “아미타 삼존불”을 불사하였다(당시의 삼존불은, 불타서 없어 졌고, 현재는 새로이 조성된,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사사한 후, 심한 피부질환을 앓게 되어, 전국의 물좋은 곳을 다니며, 많은 사찰의 불사를 도왔다.세조는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의 공를 세운, 복천암의 신미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세조는, 신미대사를 뵙기 위해, 1464년 2월, 500여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속리산으로 가던 중, 길을 막던 가지를 들어 준 소나무를 “정이품송”으로 임명했다는 설화가 있다

 

“세조길”로 명명된, 법주사 우측 길을 통하여 복천암에 도착한 세조는, 신미대사와 그 제자인 학조대사와 함께 법회를 열었고, 3일 기도 후, 복천암 길목의 “목욕소”에서 목욕을 한 후, 피부병이 좋아 졌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복천암에 “만년보력”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또 세조임금은 신미대사의 추천으로, 영동 반야-사를 중건하고, 회향법회 참석길에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설화도 있다(“영험한 문수보살 기도처 ⑥영동 "반야-사” 참조). 세조와 관련된 길은,  속리산 세조길(법주사~복천암/평지길, 편도 1시간~1시간30분)과 오대산 선재길(월정사~상원사/이 블로그 위쪽, "영험한 문수보살 기도처오대산 상원사 참조)이 있다.

 

*속리산 상환암~거대한 암벽으로 둘려 쌓여 있어, 속리산 여러 암자중에서, 경치가 가장 수려하다는 상환암은, 원래, 710년(성덕왕9년)에, 창건된 “길상암”이었는데, 고려 공양왕3년에,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고, 태조 이성계는, 차후 조선 건국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후손 세조는 이곳 상환암에서 선왕 이성계와 여러 선왕들을 추모하는 기도를 드린 후, 무한한 환희심이 들어, 이곳 암자 이름을 “상환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속리산 인근 관광지~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송"은 수령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정이품송” 수령 = 현재 2023년-세조당시 1464년=560년+당시 수령40~50년으로 추정하면= 수령 600년 이상). "정이품송"을 지나, 귀가길을 말티재를 경유하는 코스로 잡으면, 보은 속리산 말티재 입구에는, “속리산 테마파크”가 있는데, 이곳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카페에 앉아, 속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전망을 볼수 있다. 연결되는 말티재 상단에서, 말티재 전망대를 방문하면, 아래로 보이는 굽이굽이 돌고 도는, 말티재의 모습과 함께, 시원한 전망을 감상할 수 있고, 말티재를 굽이굽이 돌며 내려가는 스릴을 맛볼 수있다. 속리산 인근,  대청댐에는 "청남대"가 있다

 

* 익산 미륵사지 (국보 11호) ~ 639년(무왕40)에 창건한 백제사찰로,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진, 백제 최대 규모 사찰이다. 조선 초기까지 존재하였지만, 그 후, 소실되었다. 탑(서탑 국보11호/ 동탑은 복제품)과 당간지주(보물236호)만 남아있다(가운데 있던, 목탑은 소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9년, 보수를 위하여, "서탑"을 해체 하였는데, 이 탑에서 "금제 사리호", "봉안기", 돈으로 사용되던 "금제 막대"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봉안기"에는, 193자의 또렷한 글씨로 써여진, 조성내력이 기재되어 있었다. 조성내력에는, 백제 "무왕"40년(639년) 1월29일, 이 사찰을 건립 봉안하며, 귀족 세력가 "사택덕적"씨 딸이며, "무왕의 왕비"가 후원하여, "미륵사"를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 26대 성왕(재위 523~554년)은, 538년, "공산성"의 웅진(공주)에서, "사비성"의 부여로 천도한다. "사비성"은 내성과 외성의 이중 구조로, 내성을 "부소산성"라 한다. 성왕은 554년, 신라군에 포위된 아들 "창"을 구하기 위하여 출정하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다. 성왕의 왕위를 이어받은, "창"이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이며, 28대 혜왕(재위 598~599), 29대 법왕(재위 599~600), 30대 무왕(재위 600~641), 31대 의자왕(재위 641~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함)이다. 그러므로, 익산 "미륵사" 봉안기에는, 백제 "무왕"은, 가난한 "서동"이 아니고, 29대 "법왕" 아들이며, 그 부인은, 신라에서 온, "선화공주"가 아니고, 백제 귀족인 "사택덕적"의 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 익산 왕궁리 궁궐 유적지 ~ B.C 18~A.D660년까지, 고대국가로 존재했던, 백제는 위례성(한성) → 공산성(공주) → 사비성(부여) 이외에도, 익산에 천도를 위한, 왕궁을 지었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백제 무왕때 익산에 조성된 “왕궁터”에는, “왕궁리 5층 석탑”(국보 289호)과 1965년, 이 석탑을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내함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어, “사리장엄구 일괄유물”(국보123호)은 국보로 지정되었다(이곳에 박물관이 있다).

 

* 부여 정림사지 ~ 백제 성왕이 웅진(공주)에서, 사비성(부여)로, 538년 천도를 하면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의 중심에 세운 사찰이 “정림사”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은, 목탑형식으로 세운 석탑이다. 1층 탑신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660년, 이 탑신에 정복 기념글씨를 새겨 넣어, 한때, 이 탑을 “평제탑”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림사”에 있는 금당(불당)에는, 손모습을 “지권인”으로 하여, “비로자니불”로 여겨지는, “석조여래좌상”(보물108호)이 모셔져 있다(인근에, “백만송이” 연꽃으로 유명한, 매년 7월중순에, “궁남지 연꽃축제”가 열리는, “궁남지”가 있다)

 

약사보전 보광전 만월보전 유리광전 : 약사전은, 동방 “유리광 정토세계”에 계신, 약사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다. 약사여래는, 널리 광명을 펼쳐, "보석처럼 밝게 비춰주시는 분"이라는 뜻에서 약사전을, 보광전, 만월보전, 유리광전이라고도 부른다. 가운데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좌측에 일광보살, 우측에 월광보살을 모신다. 후불탱화는 12신장 또는 사천왕이 호위하는 동방 “약사유리광 회상도”가 봉안된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의 부처인데, 약사불은 동방정토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약사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짓게 되는데, 대개 극락전과 마주보고 짓는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모든 중생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킨다는 12대원을 세워 이를 수행하였고, 이러한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다. 즉,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주고, 여러 고통을 없애주는 동방 유리광 정토세계의 부처님이다(아미타불은 보광명전, 약사불은 보광전).

 

치성광여래 ~ 불교적 관점에서, 온세상 우주를 "불국토"라 한다. 이런 우주를 항하사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라 하여, "삼천대천세계"라 표현한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을 불국토로 생각하여, 밤하늘의 무한한 광명을 비추어주는 "북극성"을, 한민족은 “칠성님”(하느님),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라 하였다. 삼신각에 모시는, 일곱분,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주불인, 칠성님(치성광여래/하느님)은, 무병장수와 자손 번창을 상징하므로, 불교에서는 약사불처럼, 좌우에 붉은 해를 든, 일광보살(소재보살)과 달을 든, 월광보살(식재보살)을 좌우 보처로 하는, “삼존불”로 하거나, “삼존불”주변, 좌측에 3위, 우측에 4위의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7분 여래가, 증명하고, 호위하는, “십존불”형태의 후불탱화를 하고 있기도 한다. 특이하게, “서산 개심사”는, "치성광여래도" 대웅전에 모시고 있다

 

알려진 영험한 약사보살 기도처 ~① 창녕 관룡사 ~우리나라 최초의 약사 기도처. 창건할 때 용이 구름타고 올라 가는 것을 봤다하여 관룡사라 이름을 지었다함. 임진왜란때 모든 건물이 불탔는데, "약사전"만 불화를 면하여, 기이하게 여긴 스님이 대들보를 확인한 바, "영화5년기유"(349년)라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화를 면한 소문으로, 관룡사에서 빌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소문이 널리 펴졌다 ② 경산 불굴사 약사보전 ~불굴사의 약사기도 영험과 함께, 이곳 홍주암은 영험한 나반존자(독성) 기도처이기도 하다. 원효대사 최초 수행굴인 원효굴과 함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기도하여 비법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이름이 비슷한, 경주 골굴사는 12개 석굴로 이루어진 석굴사원인데, "선무도"가 유명하다

 

 팔공산 갓바위~ 대구(경산) 팔공산 선본사 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431호)~638년(선덕여왕7년), 원광법사 수제자인, 승려 “의현”이, 돌아가신 모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갓바위는, 석가불 수인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아미타불, 약사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약사불로 알려 졌다. 조선 후기,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머리에 쓴 천관을 이유로, 미륵불로 불리게 되었

 

그 후, 어느 때부터, 왼손에 약합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약사불”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평생 1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알려진, 약사불로 믿고, 소원을 빌고 있다. 특히, 머리에 쓴 “천관”이 “학사모”와 비슷하다 하여, 각종 시험합격 기도를 많이 한다(차후, 왼손 약합을 자세히 조사하여, 약합은 왼손 엄지손가락임이 밝혀졌다). 팔공산 갓바위는 “영험한 산신기도처”로도 알려져 있다

 

④ 관악산 연주암과 함께, 연주대의 마애 약사여래불(연주대의 마애약사불은 영험한 약사기도처이고, 연주대의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⑤ 당진 상왕산 영탑사유리광전에 모셔진 마애약사여래불은, 아픈 곳을 치유하고,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한다 ⑥ 부산 금정산 약수정사~"세상에 이런 일이" TV에 등장한, 폭우때 스스로 법당마당에 자리 잡았다는 마애약사불이다. ⑦ 양주 장흥 용암사 약사전~우연히 송추유원지 인근, 노송아래 땅속에서 발견한 영험한 약사여래불이다.

 

 서울 북한산 승가사 약사전~승가사 "마애석가여래"(보물215호)의 영험과 함께, 승가대사의 좌상(보물1,000호)을 모신 약사전의 영험과 그 옆 약수물 효험이 유명하다(왕실기도처인, 승가사의 약수물을 세종임금의 왕후인, 소현왕후가 마시고, 병이 나은 후, 승가굴의 이름을 약사전으로 변경하였다한다. 약사전 입구 바위에 새겨진 초서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는 1816년, 승가사를 방문하여, 승가사 바로 위, “비봉”에 있는, “불명의 비석”을 분석하여,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3호)라는 것을 밝혀냈다(현지에는 “실물 모형”이 세워져 있다). “비봉” 인근에 있는, “사모바위” 아래에는, 1968년1월21일, 청와대습격을 위하여, 북한 무장공비가 잠시 머물렀다는 암굴이 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약사사~ 초 방화동 개화산 “개화사”였는데, “약사사”로 개칭함. 경내에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39호)”과 “대웅전” 모셔진, “석불입상(40호)”이, 고려 후기 양식을 지니고 있어, 고려말~조선초 사이에 창건되었다 추정한다. 1737년에 이르러, 영조임금시절, 우의정을 지냈던 송인명이 이곳 산사에서 공부하여, 재상이 된,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조선후기, 이곳에서 현령을 지냈던, 화가 “겸재 정선”은 "개화사"와 주변 한강풍경 산수화를 많이 남겼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대형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조선 순조이후에, “약사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나즈막한 야산인, 개화산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한강과 행주산성이 조망되며, 남쪽으로는 김포공항이 보인다. 개화산은 봉화가 있던,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과거 건물은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모두 198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대형 석불”은 가슴으로 모아진, 두손에, “약병”이 아닌, “꽃가지”를 들고있어, “미륵석불”임을 나타내고 있다(이 블로그 아래 쪽, “부처와 보살의 모습” 참조). 그러나, 치유영험의 “약사불”로 불리므로, 공식적으로는 그냥 “석불”이라 이름하고 있다.

 

 삼척 두타산 삼화사 약사전~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서, 후삼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대업을 달성한 후, 후삼국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삼화사라 개칭 함. 약사불의 영험이 전해지며, 이곳에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지었다고 하며, 인근에 무릉계곡과 용추폭포가 있다

 

 장성 백양사 약사암과 영천굴~약사암의 약사여래불과 영천굴의 약수 영험이 유명하다. 아울러 인근 백양사의 칠성전은 영험한 칠성님(하느님)기도처로 알려져 있다(이 블로그 아래편, 영험한 칠성기도처 참조). *장성 내장산(백암산) 백양사~ 유명한 가을 단풍관광지인, 백양사는 631년(백제무왕 32년), 승려 “여환”이 “백암사”로 창건하였다. 그후, 승려 “중연”이 1034년(고려 덕종3년)에, 중창을 하고, “정토사”라 하였는데, 1574년(선조7년)에, “환양선사”가 “백양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이름을 바꾼 연유에 대하여, 몇가지 전설이 있다. ① 환양선사가 영천굴(백양사에서 30분정도 거리의 절벽에 있는, 약수가 나오는 천연굴. 현재는 영천굴 앞에 약사암을 지었고, 영천굴 위의 절벽에 전각을 지어,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영천굴의 약수는 영험하다고 한다)에서 금강경을 읽고 설법을 했다고 한다. 3일째 되는날, 흰양이 나타나 설법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7일째 되는날, 꿈을 꾸었는데, 흰양이 나타나, 자기는 원래 하늘의 “천인”이었는데, 죄를 지어 짐승이 되었고, 선사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천인”으로 환생하게 되었다는 꿈이었다. 환양선사가 이튿날 아침 일찍 영천굴앞에 가보니, 흰양 한마리가 죽어 있으므로, 절의 이름을 “백양사”로 바꾸었다고 한다(약사암 전각에는 이런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② “환양선사”가, 백양사 대웅전에 머물면서, 경을 설법하고, 염불을 하자, 흰양들이 내려와 경청하는 등, 흰양들이 몰려 오는 일이 잦아, 절의 이름을 "정토사"에서, “백양사”로 개칭하였다는 등의 전설이 있다.

 

백양사 보물로는 극락보전아미타여래좌상(보물2066호)이 있고, 최근 명부전 “지장보살좌상” 복장유물에서 “조성필공기”라는 "발원문"이 최근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이 1653년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지장보상좌상"은 조만간 보물로 지정될 것으로 전망된다(2023년 현재). 전남유형문화재로, 대웅전(43호), 사천왕문(44호)가 있다. 백양사 경내의 8층탑은 8정도를 상징하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3과를 안치하고 있다. 백양사 이팝나무~ 고려 공민왕때, 영광 "불갑사"를 중창한 각진국사가 쌍계루를 건축하면서, 쓰던 지팡이를 쌍계루 앞, 연못가에 꽂아두었는데, 그 지팡이에서 잎이 돋고, 꽃이 피는, 현재의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인근, 백양사 천진암은 사찰음식대가인 정관스님이 주석하는, “비구니 도량”이라고 한다. 

 

* 고승들이 꽂은 지팡이가 살아난, "지팡이 전설”~ 백양사를 포함하면 전국에 6군데가 있다. ① 백양사 쌍계루앞 연못가 이팝나무 ②송광사 천진암 곱향나무(쌍향수나무) ③태백산 정암사 주목나무 ④ 영주 부석사 선비화 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⑥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등의 6군데이다.

 

*정읍 내장산 내장사와 벽련암~ 백양사인근의 단풍거리로 유명한 정읍 내장사는, 백제 무왕37년(636년)에 영은암으로 창건하였는데, 추후 이 영은암을 내장사로 바꾸게 되었고, 백제 의자왕20년(660년)에 창건한 내장사(백련사)를 백련암으로 바꾸었다한다. 추사 김정희가 이 백련암을 벽련암으로 바꾸고 현판을 써주었는데, 625때 현판과 함께 전각이 소실되었다. 즉, 기존의 영은암을→내장사로 하고, 기존의 내장사를→ 백련암→벽련암으로 바꿈. 현재는 백련암과 벽련암이 혼용되고 있다. 내장산 벽련암에는 자생 "차밭"과 함께 국내 최고령 단풍나무가 있다. 

 

⑫ 구미 금오산 약사암 약사전김천 수도산 수도암 약광전김천 황악산 직지사 약사전~ 이 세분 약사불은, 함께 방광을 하는 형제 약사불로 알려져 있다. * 금오산 약사암 약사불은, 광배가 있는 석조약사여래인데, 구미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금오산 기암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금오산은 골짜기 마다 기암괴석과 빼어난 경관으로 일명 소금강산으로 불리는데, 약사암과 범종각이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이 또한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약사암아래 절벽에는 암벽의 좌우로 조각되어 입체감을 주는 마애여래입상(보물490호)가 있다.

 

김천 수도산 수도암은, 859년 도선국사가 천하적지 수도명당이라는 "옥녀직금형" 명당자리에 사찰을 건립하고, 수도암이라 명명하였다한다.수도암 약광전의, 광배가 있는 영험한 석조약사보살좌상은 보물296호이고, 대적광전안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307호이며, 사찰마당에 있는 도선국사비는 신라명필 김생의 글씨로 밝혀 졌다고 합니다. 김천 수도산, “청암사”에서 “수도암”까지의 길을, “인현왕후길”이라 한다(9키로, 2시간30분). 장희빈으로 인해, “페서인”된 인현왕후가, “청암사” 극락전에 3년간 머물며, 산책을 하고, 애환을 달래며, 복위를 부처님께 기원하였다던, 유서깊은 아름다운 길이다(인현왕후~아래, 영험한 나한기도처 “불영사”참조)

 

* 김천 황악산 직지사~ 신라 눌지왕2년(418년), "묵호자"가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직지"는 건축시,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을 사용하여 지었다는 뜻이다. 약사전에 있던, 삼형제 약사불로 알려진, 영험한 광배가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얼굴 마모가 심하여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청풍료"에 모시고, 약사전에는 새로 조성된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직지사는 사명대사의 출가 사찰이다. 보유 보물은,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319), 대웅전앞 3층석탑(보물606), 비로전앞 3층석탑(보물607), 청풍료앞 3층석탑(보물1186), 대웅전 삼존불탱화(보물670), 천왕문(2024년 보물지정)이 있다. 직지사는,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와 함께, 9월 중하순에 피는,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하다.

 

⑬ 봉화 청량산 청량사 유리광전~ 영험한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광전은 청량사의 주전각인데, 좌우에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유리광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 한다(이곳의 유리광전은 영험한 약사기도처이고,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 기도처).

 

구례 사성암~원효, 도선, 의상 그리고 고려 후기 진각스님의 4분 성인이 수도하였다하여, 사성암이라 함. 높이 20미터의 절벽에, 4미터되는 음각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을 원효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설화가 있다. 이곳 절벽에 기둥을 바치고 "약사유리광전"(약사전)이라는 암자를 지었다. 영험한 약사기도처인 이곳 경내에 "도선굴"과 소원을 들어 준다는 "소원바위"가 있다. 주변 바위의 형상이 뛰어 나며, 이곳에서 구례들판과 섬진강이 조망된다(인근에는,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는 "화엄사"가 있다).

 

*청양 칠갑산 장곡사 ~ 칠갑산 서쪽 기슭에 있는 장곡사는, 850년(문서왕12)에, 보조국사가 창건한 영험 약사기도처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대웅전이 2개 있는 곳이다.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위쪽의 “상 대웅전”에는 “철조 약사여래좌상”(국보58호), “미륵쾌불탱”(국보300호)의 국보 2점과, “철조 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174호), “상 대웅전”(보물162호) 건물의 보물 2점이 있다. “상 대웅전”의 마루바닥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연꽃무늬가 있는 흙벽돌(전돌)이 깔려 있다.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아래쪽의 “하 대웅전”에는, 보물337호에서, 2022.6.23일, 국보로 지정된, “금동 약사여래좌상”의 국보1점(복장유물에서, 고려시대 때, 1천여명의 이름이 적힌 발원문이 나왔다)과 “하 대웅전”(보물181호) 건물의 보물1점이 있다 그러므로, 장곡사에는, 합계 국보3점, 보물 3점을 보유하고 있다. 영험한 약사기도처인, 장곡사가 있는 “청양”에서, 북쪽 “예산”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예당호 “출렁다리”와 “모노레일”이 있는, “예당저수지”(예당관광지)가 있다. 예산에는 “수덕사”가 있다.

*서울 북한산 흥국사 ~ 약사전을 주불로 모시는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원년(661년)에, 원효대사가 도봉산 망월사 인근의 “원효사”에서 수행하던 중, 도봉산 넘어, 북한산의 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고 있어, 그 서기를 뒤쫒아, 서기를 찾던 중, 이곳에서 서기를 발하는 약사여래불 형상의 바위를 발견하였다. 그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앞으로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으로, 흥성암이라는 이름을 짓었다고 한다[원효대사는, 도봉산 망월사 인근, “원효사”에서 수도하였고, 이곳 “원효사”에는 원효대사 동상이 있다(영험한 나한기도처~ 도봉산 “원효사”참조)].

 

그 후, 1770년 영조임금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가 있는 인근 “소령원”(경기도 파주에 있는 데, 인근 "파주 보광사"에는 숙빈 최씨의 "어실각"이 있다)에 들린 후, 궁궐로 돌아 가던 중, 폭설을 맞아 부득이 이곳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흥성암” 맞은편 북한산 설경에 반하여, 주전불의 “약사전”이라는 친필현판을 하사하였고, 주전불인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라는 뜻으로, 흥성암의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고 “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왕실기도처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설법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미타전 안의 후면 “구품극락도”는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약사기도도량인 흥국사는 북한산 맞은편의 노고산(한미산)기슭에 있어, 북한산 조망이 뛰어나다.

 

*파주 보광사~ 국가 비보사찰로 894년 도선국사가, 어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고령사”라 하였다. 그후, 1388년 무학대사가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이후, 1622년 중창한 보광사는,1740년(영조16년), 영조가 인근에 모친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을 조성하고, 원찰에 되면서 “보광사”라 개칭하였다. 대웅보전 옆에 숙빈 최씨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어실각”이 있다(최씨는, 인현왕후의 무수리 신분임에도, 날마다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도하면서, 숙종의 성은을 입어, 결국 숙빈 지위까지 오른, 드라마 “동이” 주인공).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수령 300년의 향나무가 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기리는, 수원 "용주사"와 함께, 보광사는 영조가 “효”를 실행한 사찰로, “효”의 본보기 도량이 되었다.

 

보광사의 “대웅보전의 현판”은 영조대왕의 친필이다. 대웅보전의 용머리 “공포장식”도 볼거리이며, 대웅보전 천정에는,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진, 보기드문 “화조화”와 “초충도”가 그려져 있다. 또 대웅보전의 벽화에는, 극락갈때 타고가는 “반야용선”, 수월관음과 동자, 연꽃위의 보살, 신장과 사자, 백호가 그려져 있어 사찰의 미술관을 보는 듯하다. 대웅보전 건너편, "만세루"에는 보기드문 빼어난 수작인, “목어”가 걸려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대웅보전(제83호), 동종(158호), 목조보살입상(248호), 영산회상도(319호), 지장시왕도(320호), 현왕도(321호)가 있다. 이중에서, 158호 "동종"은 2023.8월 국가 “보물”로 승격되었다(문화재청은, 2022년 12월부터, 모든 국보와 보물에 번호를 부여하지 않는 다고 한다)

 

*공주 갑사~춘마곡 추갑사라 하여,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라 말하는 가을여행지인 갑사에서, 20미터쯤 떨어진 등산로 전각안에 충남도 유형문화재인 석조약사여래불이 있다. 갑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대장경판이라는 "월인석보판목(보물582호)"을 보관하고 있다. 또 갑사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를 모신 표충원이 있는 데, 이 갑사의 표충원과 유사한 곳이 밀양 표충사이다. 임진왜란의 유공자인 세분 스님 위패를, 밀양 죽림사에 모시고, 이름을 죽림사에서 표충사로 바꾸게 되었다. 인근 밀양 홍제사에는 땀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한 사명대사 "표충비"가 있다. 갑사, 동학사(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다), 신원사(왕실 3대 산신기도처인 "중악단"이 있다. 영험한 산신기도처 참조) 계룡산의 3대사찰이라 한다.

 

*공주 마곡사~ 640년(무왕41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산지승원의 하나이며, 백범 김구선생이 출가한 사찰. 안에 있는 4개의 싸리나무 기둥을 돌면, 극락을 간다거나, 아들을 낳는 다는 전설이 있는 대웅보전(보물801호),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100일 기도를 드린후, 걸어서 나갔다는 전설이 있는 대광보전(보물802호), 세조의 현판글씨로 알려진 영산전(보물800호), 5층석탑(보물799호),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묘법연화경7권(보물269, 270호), 석가모니불 쾌불탱(보물1260호), 그리고, 천왕문, 동종등 충남유형문화재 12점이 있다. 김구선생이 은거한, 백련암으로 가는 길을, 백범명상길로 명명하였으며, 백련암 뒤쪽에는, 한가지 소원은 꼭들어 준다고 알려진 “마애불”이 있다.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해가야(금관가야) 불교는, 김수로왕(42.3.16 ~199.3.23) 당시에 바닷길을 통해 전파되었고, 그 시절에 창건된 밀양 만어사와 밀양 부은사, 하동 칠불사가 있다. 이블로그 저 아래, 불교의 전래, 가야불교 부분 참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와 사신을 통하여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였는데, 그로부터 2년뒤인, 374년(소수림왕 4년)에, 진나라로부터 승려 “아도”가 고구려에 왔다. 그 7년 뒤인, 381년에, 동진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여 가는 도중에, 강화도에 들리게 되어, 전등사의 전신인, “진종사”를 세웠다고 한다.

 

진종사는 900년 가까이 지난 뒤인, 1266년에 중창되었고, 1282년(고려 충렬왕 8년)에, 충렬왕이 태자였던 시절에 혼인을 하였던, “정화공주”가 대장경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정화공주는 17년동안 태자비로 살면서, 왕비가 되기를 기다렸으나,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에 밀려, 끝내 충렬왕의 왕비가 되지 못한 비운의 공주이다.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손자로, 동부 유럽에 이르는, 대 몽고제국을 건설한 황제. 충렬왕이 원나라 볼모로 있을 때, 혼인동맹을 위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 귀국하여 충선왕을 낳았다. 정화공주는 고려 충렬왕의 정실이지만,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 밀려 제2비로 떨어졌다. 아들을 낳았지만, 왕위는 “제국대장공주”가 낳은,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돌아갔다. 세월이 흐른 후, 정화공주의 손자가 공양왕에 오른다.

 

그 후, 전등사는 1614년(광해군 6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1621년(광해군 13년)에 새로이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어진, 보물 178호인, 전등사 대웅보전에는 특이한 것이 있다. 대웅전 네 모서리의 처마밑에 있는, 손바닥과 머리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조각상”이다.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중창불사의 대웅전 건축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아랫마을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았고, 둘은 공사가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 함께 살기로 약속을 하였다.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건내 주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기 직전, 주모는 도편수가 맡긴 돈을 전부 챙겨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이에 몹시 분노한 도편수는, 도망간 주모가, 두 손바닥과 온 몸으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고통과 함께 벌거벗은 모습의 수치를 견디며, 법당에서 들려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참회하라는 뜻으로, 주모닮은 벌거벗은 여인상”을 대웅전 처마 네귀퉁이에, 새겼다고 한다. 더욱 해학적인 것은, 네귀퉁이 중에서, 두 귀퉁이의 “나상”은, 한손으로 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마치 주모가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선조의 재치와 익살을 느끼게 하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전(보물 178호), 약사전(보물 179호), 철종(보물 393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보물 1785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보물 1786호), 묘법연화경목판(보물 1908호)의 국가보물 6점을 보유하고 있다.

 

전등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2그루(수령 700년, 350년), "느티나무" 2그루(수령 각 400년), "청단풍나무" 1그루(수령 280년)가 있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주지스님이 과도한 은행나무 열매공물을 요구하는 관청에 대하여, 고민을 하던 중, 홀연히 나타난 “추송”스님과 동자승, 그리고 노스님이, 열매가 많이 열리도록 하는 3일기도를 올리게 되었다한다. 그런데, 3스님의 마지막날 축문은, 전등사의 은행나무가, 천년만년 더 이상, 열매가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축문이 끝나자,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고개를 숙인 사이에, “추송”스님, 동자승, 노스님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행나무에는 더 이상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400년된 "느티나무" 2그루는, 대웅보전 뜰앞, 대웅전을 오르는 길목에 1615년 전등사를 중창하면서, “풍치목”으로 심었다고 하며, 280년된 "청단풍나무"는, 대조루(대웅보전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누각식 건물) 동편에 있는데, “초윤”주지스님이 대조루를 중창하면서, 1749년(영조25년)에 심었다고 한다.

 

전등사 철종(보물 393호)은, 중국 북송때인, 1097년 하남성 “송명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한국종과 다르게, 상부의 음통이 없다. 전등사 예전의 동종은 일제시대때 징발되었는 데, 해방후, 이 동종을 찾기 위해, 인천항을 샅샅이 뒤졌는데, 우연히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징발된 종을, 일본군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고, 이 철종을 전등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전등사가 있는 뒷산은 세발달린 솥을 엎어놓은 형태라 하여 정족산(231m)이라 한다(가운데 정상은 높고, 좌우 능선은 낮은, 정상을 기준으로, 남동쪽을 향해, 좌우로 능선이 있는 형태이다. 이런 형세 때문에, 정족산성(삼랑성)에 있는, 전등사에 들어가려면, “종해루”가 있는 남문이나, 문루는 사라지고 둥그런 홍예문만 있는 동문을 통해서만 들어 갈수 있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을 “정족산성”이라 말하기도하고, 삼랑성이라 말하기도 한다. 단군의 세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랑성(정족산성) 안에는, 전등사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 가궐지(고려 항몽시기의 임시 대궐터), 왕실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다. 삼랑성(정족산성) 성곽에 오르면(둘레 약 2.3키로, 높이 2~5미터), 전등사가 한눈에 보이며, 멀리 마니산도 보인다. 

 

이런 강화도에, 프랑스군이, 1866(병인년) 10월16일, 프랑스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 “리델”신부와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등 3명의 조선 천주교도의 수로안내를 받으며, 군함 4척, 상륙군 900명을 동원하여, 갑곶진에 상륙하고,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1866.11.7일, 양헌수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정족산성에 은밀히 잠입하여,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런 대승을 거둔, 양헌수”장군의 전승비 정족산성(삼랑성) “동문” 안 있다 ("병인양요" 원인과 전투 승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나님 하느님 예수는 누구인가?" 블로그에서의 후반부, "구한말의 천주교 관련 사건"부분을 참조하세요​) 

 

전등사 경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었는데, 현재의 “정족산사고”건물은 1931년 이후, 없어진 것을 1998년에 복원하였다(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에 대하여는, “오대산 월정사”부분 참조).

 

대구 동화사~ 영천 은해사와 더불어, 팔공산 대표사찰인 동화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493년(소지왕15년)에, “극달”스님이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흥덕왕의 셋째 아들인, “심지왕사”스님이, 832년(흥덕왕7년)에 중창하고, “동화사”로 개칭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신라불교는, 눌지왕(411~457)시절, 육로를 통하여,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와, 고구려에서 온, 동진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파하였지만,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이차돈의 순교로, 순교 이듬해인, 527년에 국교로 공인되었다 한다)

 

대구시민이 “팔공산 갓바위”와 더불어, 가장 많이 기도 드린다는,"동화사"의 “통일 약사대불”은 1992년 세운, 높이 33미터의 돌로 만든, 세계 최대 석불이다. 동화사는 국민관광지로 지정. 보물은, 대웅전(보물1563호), 일주문앞 마애여래좌상(보물243호), 비로암(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244호), 비로암(비로전) 삼층석탑(보물247호), 금당암(극락전)의 2기 동서삼층석탑(보물248호), 당간지주(보물254호), 아미타회상도(보물1610호), 목조약사여래좌상복장전적(보물1607호)등이 있다.

 

* 대구 파계사~ “파계”는 9갈래로 흩어진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이라 합니다(파계사 좌우편에는, 아홉계곡의 물줄기를 한 곳으로 모은, 수심12미터의 저수지가 있다). 804년(통일 신라 애장왕 5년)에 “심지”가 창건하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5년(선조38년)에 “계관”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21년)에 “현응”이 삼창하였다. 파계사는,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원통전”이, 주 전각이다.

 

파계사 주지 “현응”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노역을 부담하느라,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탄원하려, 한양으로 갔지만, 남대문근처에서 3년동안 잡일을 하면서, 내관의 통지를 기다렸음에도, 임금을 만나지 못하였다. 포기하고 떠나려 하는 날, 숙종이 “남대문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며, 내관을 시켜 임금을 만나게 되었다. “현응”은, 불교를 탄압하면, 큰 인물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고, 숙종은, “현응”에게, 세자를 얻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현응”은, 백일기도를 하면서, 친분이 두터운 삼각산의 “농산”스님에게, 숙종 아들로 태어나 “환생”할 것을 권하였다. “농산”이,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였고, 그 후,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고 한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의 땅을 하사하려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마다하고, 유생들의 행패를 막기 위해, 사찰에서 선조임금들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여, 조선왕조 원찰이 되었다. 숙종은 파계사에 “기영각”을 세워 선왕들의 위패를 모셨고, 하마비를 세웠다. 이후, 유생들은 파계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1979년6월, 원통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을 개금 불사할 때, 영조 임금 직접 착용했던, “도포”가 나와, 이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모시고 있던 위패는 1910년 국권 강탈로 서울로 옮겨 졌다). 문화재로는, “원통전”(보물1850호), “파계사 영산회상도”(보물1214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992호)가 있으며, 설선당(강습소), 적묵당(명상하는 전각), 산령각(산신각), 기영각(조선왕실 위패를 모시는 전각)등 전각들은 대구문화재 자료로 등재되었다. 파계사 부속암자인 “성전암”은 경북3대 기도 도량중의 하나이다.

 

* 영천 은해사~ 대구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 대표사찰인 은해사는, 809년(신라 헌덕왕1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한 “해안사”였다. 그 후, 1270년 홍진국사가 중창하였다. 1545년에 소실되어, 154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극락정토의 은빛바다를 의미하는, “은해사”라 하였다. 1847년(헌종13년)에 화재로 1천여칸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중건하였다. 은해사에는 성보박물관과 승가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어, 불교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보유 문화재로는, “은해사 쾌불탱”(보물1270호),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보물1604호), 극락왕생장면을 묘사한, 염불왕생첩경도(보물1857호)가 있고, 경북 유형 문화재로, “대웅전 후불탱화 및 삼장탱화”(유형342호)와 은해사 “대웅전”(유형367호)이 있다. 조계종 10교구 본사로서, 50여개의 말사를 거느린다. 은해사 "산내암자"인, 백흥암 극락전(보물790호), 백흥암 내부 수미단(보물486호), 운부암 금동보살좌상(보물514호)등의 보물이 있다. 영천에는 영험한 “나한기도처”로 유명한, “거조사” 영산전이 있다(아래, 영험한 나한기도처 참조)

* 부산 금정산 범어사~ 범어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불린다. 신라 문무왕18년(678년)에, 의상대사가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한 “화엄종찰”이다. 국보 “삼국유사”를 보유한 국내 유일 사찰이다(국보인, “삼국유사”는 고려 1281년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인데, 범어사 소장본은, 권4와 권5를, 한권으로 묶은 것으로, 조선초기 1394년에 간행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빛 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해서,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범어사"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년간을 폐허로 있다가, 선조35년(1602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또다시 화재를 당하여, 광해군 5년(1613년)에, 중창하였다. 의상대사를 비롯한, 원효대사, 경허선사, 용성선사, 만해 한용운선사등등, 많은 고승들의 수행처로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이다. 범어사는 11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금정불교대학”과 범어사 “성보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다. 보물로는 대웅전(보물434호), 3층석탑(보물250호,), 조계문(일주문, 보물1461호)이 있고, 지방문화재로 당간지주, 일주문, 석등, 동서3층석탑, 동종등이 있다(범어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176호로 지정된, “등나무군락지”가 있다. 또 금정공원에서 금정산성을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어, 광안대교와 부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있다).

 

* 부산 금정산 병풍암 석불사(일명 병풍사)~ 1930년 승려 “조일현”이 창건하였다. 금정산의 허리에 있는, 거대한 병풍암의 바위에 새긴, “29위의 마애 석불”이 있는, 풍광이 있는 사찰이다(단위 사찰에서, 가장 많은 마애불상을 보유하여, 국내 유일의 최고 “마애불 군락” 사찰이다).

 

* 부산 삼광사 (천태종) ~구인사에 이은, 천태종의 2대 사찰. 상월 원각대조사의 원력으로, 1986년 창건되었고, 부산에서, 범어사, 해동용궁사에 이은 부산의 3대사찰에 속한다. 관음기도 도량이며, 자비, 지혜, 백호의 3빛이 가득하길 염원하여, “삼광사”라 하였으며, 금강불교대학도 있다. 단위 사찰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신도 보유하고 있다(서류상 등록신자 33만명 이상). 조계종의 소박함에 비해, 구인사, 삼광사 처럼, 천태종 사찰은,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함을 자랑한다. 부산경남지방 TV에 석가탄신일 특별방송에 대표적으로 등장되는 사찰이며, 연등축제로 유명하다. 삼광사 ”9층 다보탑”은, 부처님 진신사리 10과를 봉안한, 높이 30미터의 동양최대 석탑이다.

 

* 세계 최대의 불상~ ① 세계 최대의 석불 ~"동화사"의 “통일 약사대불”은 1992년 세운, 높이 33미터의 돌로 만든, 세계 최대 석불이다. 미륵석불로는, 논산 관촉사 미륵석불은 18미터이고, 파주 용암사 마애미륵불은 17미터이다. ② 세계 최대의 청동 대불~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1990년 "청동"으로 완공하였고, 2000년에 대불에, 순금으로 도금하였다. 높이 33미터로, 세계최대 청동 불상의 높이였으나, 1993년 34미터인 홍콩 포린사원의 청동대불인, “천단대불”에 뒤졌다.

 

 좌불 ~ⓐ 부산 홍법사(2003년, 창건. 조계종)~2010년에 완공한, 높이 21미터 "아미타좌불"이 있다. 건물위에 있으므로, 좌대(건물)를 포함하면, 45미터로, 우리나라 최대 좌불이다. 1층 내부는 대웅전이며, 좌불상안에 들어가면, 티벳 달라이라마가 보내준, 부처님진신사리 탑이 있다. ⓑ 강진 남미륵사(1980년 창건. 세계불교 미륵대종 총본산)~2007년 완공한, 동양최대 규모의, 높이 36미터 "황동 아미타좌불"이 있다. 남미륵사는, 봄에 서부해당화와 붉은 철쭉이 만개하여, 봄 꽃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굴법당 ~ 의령 봉황산 일붕사~ 일붕사 법당은, “석굴대웅전” 138평, “석굴무량수전” 90평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두루 갖춘,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매일 2백여명 이상의 불자들이 찾는, 영험한 소원성취 기도도량으로 알려진, 경남 의령, 봉황산 봉황대 일붕사는, 727년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그 전신이다. 이곳 봉황대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최고의 격전지였다고 한다. 전승 후, 신라 성덕왕이,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들을 위로하고, 선령의 얼이 베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봉황산 봉황대 “성덕사”라 하였다. 조선 성종때, 이름을 “정수암”으로 하였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상들이 파괴되었다.

 

1934년, 이곳 면장과 봉황산 산주가 합세하여, 봉황대의 덕경을 위해, 관음보살상을 모셨으나, 그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뒤를 이어, 이야용스님이 새로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으나, 1984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86년, 일붕 “서경보”스님은, 뒷산의 이름이 "봉황산"이라,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를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하다고 지적하므로, “혜운” 주지스님이, 드디어 동굴법당의 불사를 이룩하고, 사찰명칭을 “일붕사”로 하게 되었다 한다(일붕 서경보~동국대학교 교수와 조계종원로의원을 역임. 1988년 일붕선교종 창종. 세계최다박사학위(73개)와 세계최다저술가(733권)로, 세계기네스북에 등재, 1996년 입적).

 

금강산은 법기보살(80권본의 화엄경에는,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거쳐하며, 1만2천의 권속을 거느리며, 반야를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금강산 1만2천봉"이라는 말의 유래이다), 오대산은 문수보살, 장흥의 천관산은 천관보살(천관산은 "지제산"이라고도 하는데, 화엄경에 따르면 지제산에는 천관보살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천관은 하늘의 천자가 쓰는 면류관을 말한다), 양양의 오봉산 낙산사는 관음보살, 연천의 보개산은 지장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한다.

 

지장보전 명부전 시왕전 : 가운데에,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사후세계인 명부 심판관인 시왕(십왕)을 모심. 시왕은, 제1지광, 제2초강, 제3송제, 제4오관, 제5염라, 제6변성, 제7태산대왕의 7왕은 순서대로 매7일마다 7번 심판을 하고(49재), 죄가 너무 무거운 영혼은 고등법원, 대법원격인 백일(100일)에는 제8평등, 소상(1년)때는 제9도시, 대상(3년)때는 제10오도전륜대왕 심판이 있다고 함. (염라대왕은 “업경대”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 선업뿐만 아니라, 생전의 죄업을 낱낱이 비추어 보고 밝혀 내어, 그 죄를 묻고 있으므로, 거짓말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가장 무서운 저승판관으로 알려져 있어 유명하다.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자신의 무의식(제8식, 아뢰아식)에 새겨져, 자신의 죄를 절대로 숨길 수 없고, 이것이 업보가 된다)

 

지장보살 ~고통받는 중생을 돕고,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운 보살님. 초기 불교경전으로, 지혜로운 부처님 말씀을 모은책이 "숫타니파타"입니다. 숫타니파타에는, “꼬깔리까”라는 비구가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를 비방하였는데, 하지말라고 해도, 계속 하다가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승경전 뿐만 아니라, 초기경전에도, “천상,지옥”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사람인 김교각스님은 중국으로 가서, 득도하고 설법을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김교각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남양주의 백천사에는 김교각스님의 기념관이 있다 (아래, "경기 남양주 백봉산 백천사" 부분 참조)

 

야마(염라대왕, 염마)~ “리그베다”에 따르면, “야마”는, 인류로서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저승세계의 왕이 되었다 한다. 이후 “염라대왕”, 또는 “염마”로 이름이 바뀌면서, 귀신세계의 주인이자, 명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야마"는 "높은 곳",“좋은 곳”이라는 뜻인데, 염라대왕은, 욕계의 세번째 하늘세계인, “야마천”에도 거주하고, 명계의 세계인, “지옥”에도 머문다 하여, “쌍왕”이라고 불린다. 염라대왕은, 저승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은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명계의 왕이다. 지옥에 머물며, 십팔 장관과 팔만 옥졸을 거느리고, “귀졸”에게, 죄인을 고문, 심판하게 하여, 무거운 고통을 지운다고 한다. 초기경전인 “천사의 경”에는, 염라대왕이, 신체적 악업, 언어적 악업, 정신적 악업으로, 각 나누어, 심판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옥의 일을 각각 나누어 관장하는, 염라대왕를 위시한, 10명의 왕들을 시왕(十王)이라고 한다. (야마돈다~“야마”는 불교 용어로, 높은 곳, 좋은 곳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야마돈다”라는 것은, “높은 곳이 돈다” 즉, “머리가 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꼭지 돌았다”와 같은 뜻으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서, 머리가 돈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높은 산을 "야마"라 함)

 

49재 비용 ~ 49재 (천도재)는 재를 7번 지내게 되므로, 7번의 상차림 비용+ 7번의 망자를 위해 천도기도를 하는 스님의 약간 수고한 댓가/7번의 상차림의 비용때문에, 사찰마다 비용이 다를수 있는데, 상차림 당시의 물가나 사찰마다의 상차림 수준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고, 함께 기도하는 스님의 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때를 놓친 영가의 천도재때를 놓친 영가의 천도재(49재)는 여러 영가를 모아서 하는 합동천도재가 있는데(비용 분담), 여기에는 매년 정해진 날에 하는 합동 천도재인, 백중재(우란분절, ~음7.15일)가 있고, 사찰에서 임의적 날을 받아, 여러 영가를 함께 하는 합동 천도재(49재)가 있습니다. 이런 49재나 천도재 비용, 시간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절이나 집에서 혼자, 직접 기도나 정근/염불을 해주고, 영가를 위해 회향을 해주기도 합니다.

 

49재일 계산 ~ 돌아가신 날을 "입재"라 말하고, 끝나는 날을 "회향"이라 말합니다. 돌아가신 날을 "포함"하여 7일째 되는 날을 "초재"라 합니다. 초재 "익일"부터 7일째 되는 날이 "2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날로부터 7주째 되는 날의, "하루전 날"이 7재(49재)가 됩니다. [49재의 "재"는, 제사를 뜻하는 "제(祭)"가 아니며, 환생을 기원한다는 의미의, "재개할 "재(齋)"입니다.]

 

복위자 = 영가 천도를 주관하는 "자기"를 말합니다. 영가의 천도는 복위자를 중심으로, 여러 친인척 영가를 수배하고, 친인척 영가들을 모두 모신 후, 천도재나, 49재를 하게 됩니다. 복위자는, 천도재를 하게 될 때, 이런 조상 영가의 명단을 사찰에 제출하게 됩니다. 이럴 때, 기준이 되는 사람을 "복위자"라 말합니다. 즉, 복위자는 “자기”를 말합니다

 

천도재를 지낼때의 영가의 수배 대상은

복위자를 중심으로, ① 복위자의 돌아가신 부모, 형제, 본인의 낙태아 ②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친부모님 조상)

복위자 부인을 중심으로, ③ 처가의 돌아가신 부모, 형제, 본인의 낙태아 ④ 처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처가부모 조상) 

 

이 영가 명단을 기준으로, 지장보살님의 도움으로, 해당 영가들을 모두 수배하여, 해당영가와 친인척 영가를 모두 불러 모은 후, 천도재를 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가를 수배해야 하므로, 49재 또는 일반 영가 천도재는 법력이 있는 스님이 주관을 하게 됩니다).

 

49재 의미 ~사람이 죽어, 저승의 욕계6도에 배정 받기전의 대기하는 영혼을 중음신이라 함. 이 중음신은 욕계6도의 배정을 받기위해 49일동안 7번의 재판을 거치는데, 재판과정에서 지장보살님의 변호를 받게하는 절차를 49재 또는 칠칠(7*7)재라 함. 한편, 무주고혼(의지할곳 없이 이승을 떠도는 영혼),스스로 목숨을 끊은 귀신(자연의 법칙위반으로, 저승인도를 못받음), 원혼령(원한을 가져 저승가기를 거부), 집착령(이승에 미련을 가진 영혼), 조상령(자손에 집착을가져 저승가기를 거부하는 영혼)등은, 저승을 가지 못해 이승을 떠도므로, 저승으로 인도해야 하는 천도 대상이다.

 

* 이승과 저승세계 ~ ⓐ욕계~욕망으로 가득찬 이승과 저승세계. 그리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색계~욕망은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무색계~”색”을 버리고, ”비유비무”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신”과 “천인”들 세계(“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에서의 “저승도표 참조”)

 

* 저승세계에서의 영적 발달 ~ 저승세계인, 영혼의 세계는 “비유비무”의 파동으로 존재한다. 이승에서 성취한 영적 발달 정도에 따라 파동이 달라지며, 비슷한 파동을 지닌 영혼들은 서로 모이게 된다. 영계에는, "비유비무"의 비슷한 파동 진동수를 가진, 영혼들의 공동체가 수도 없이 존재하며, 이들은 "같은 파동"의 집단을 이뤄 존재한다. 영적 발달 단계에 따라, 어두운 색의 집단부터, 찬란한 광채를 내는 집단까지, 여러 수준의 차원이 있다. 저승세계에서, 어두운 수준의 영혼이 마음을 열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밝은 수준을 가진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밝고 순수한 영혼으로 회복되고, 진동수가 높아 지면서, 점차 진화하고, 다른 상위 영역으로 진입하며 발달해 간다.

 

신내림과 빙의(신내림과 귀신이 붙은 빙의는 구분되어야 함)

신내림~천상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중이던 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여러 도움을 주겠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인간으로부터 받들음을 받겠다"등의 생각을 가지는 순간, 인연이 있는 자에게 신내림을 요구하여 무당의 신이 됨(신가물). 신내림을 받지 않으려면, 불법에 귀의하거나, 평소 마음을 정갈히하고, 수도정진하며 기도와 주문, 염불, 불경독송 등을 열심히 하여야 함.

 

* 무속현상~ 불교에서는 무속현상을, “정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신내림을 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무속인은, “병명”없이, 자신의 몸이 아프고, 가족들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어쩔 수없이 신내림을 받아 무속인이 된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특히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다녔음에도, 신을 받아 무속인이 된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심 마저 버려야” 이루어 지는, “무색계”의 깨달음을 모르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천인들” 중에서, 일부가 자신을 능력을 과시하고, 인간을 돕겠다는 의도로, “보살행”을 하겠다며, “신내림”을 받게 하여,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즉, 아직 자신을 버리지 못 한, “천인” 중 일부가, 사주에 “귀문”이 있거나,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 인연있는 자를 찾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받들음”을 받고, “보살행”을 하겠다는 생각으로,“신내림”을 강제하며 자신을 모시게 하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런 무속의 신들은, 나름대로의 여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모시는 신의 이름도, ooo산신, oo장군신, oo보살신 등등 각양 각색입니다. 이런 현상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불법에 귀의하거나, 평소 마음을 정갈히 하고, 수도정진하며 기도와 주문, 염불, 불경독송 등을 열심히 하며, 불 보살님의 힘으로, 무속의 신을, 설득하는 길 뿐이다(무속의 신들은 나름의 자존감이 있으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설득하기 힘들고, 섣불리 설득하려다 오히려 반발심을 일으키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빙의 ~무주고혼(의지할곳없이 떠도는 배고픈 영혼),스스로 목숨끊은 귀신(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목숨을 끊게 되면, 그 속마음은 이승에 대한 원한이 깊어, 그런 것이므로, 이승에 원한이 있는 일종의 원한령이다), 원혼귀, 집착령(이승에 미련을 가진 영혼), 조상령(아무런 깨달음이나 능력도 없이 자손을 도우겠다는 일념으로 저승가기를 거부하고, 자손에 집착을 가지고 있는 영혼)등이 천도재 "천도" 또는 "퇴치" 대상이다.

 

이들중에서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살면서,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을 빙의라 말하는데, 이들은 방언을 하거나, 조상이라고 속이거나, 스스로를 신이라 말하는 등, 자신을 받들고 배고픔을 면하고 대접을 받기 위해, 온갖 거짓말로 사람을 희롱한다. 방치하면 조현병이 된다. 이들도 천도재의 대상이지만 강한 집착력을 보이므로, 대부분 원력있는 스님이나, 법사, 무속인에 의한 "퇴치의 대상"이다. 이미 빙의가 있는 사람은, 강한 저항이 있어, 주문,진언, 염불보다, 퇴치가 우선입니다. 이들을 퇴치한 후, 재 접근을 막기위하여 주문, 진언, 염불등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특히, 사주에, "귀문"이 있는 사람에게, 귀신이 "빛의 형상"으로 보이면, 신 또는 조상신을 의미하고, 이런 경우 신의 힘으로 통찰력과 직관력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귀신이 "그림자형"으로 보이면, 잡귀나 원한귀등인데, 이런 귀문이 있는 사람은 잡귀에 빙의되기 쉬우므로, 평소에 불경과 염불을 꾸준히 하여 귀신의 접근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사주의 귀문, 귀문관살 ~ 아래, 사주역학 참조)

 

구병시식 구명시식 (천도재의 일종)~원인을 알수 없는 이유로 아픈 사람, 즉 사람에게 빙의한 "무주고혼" 등의 "귀신"을, 천도하거나, 원한귀"등을, 퇴치하는 의식으로, 귀신에게 음식과 법문을 베풀어, 이승에서의 몸에 베어 있는 집착을 버리게 하여 저승으로 인도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귀신을 다루는 의식이므로, 원력이 있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해 지거나 효험이 없다고 함. (원력이 있는 스님이나 시중의 법사, 무속인)

 

* 조상 영가 천도 ~ 천도재는 원력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조상 영가에 대한 천도재는, 영안이 있는, 원력이 센 스님이 주로 하게 됩니다. 보통, 사찰에 수소문하면, 영가 천도를 전문으로 하는, 스님이 계십니다. 많은 비용을 들여 천도재를 했음에도, 고집이 센 조상 영가나 구병시식에서, 한번의 천도로, 천도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도재를 하기 전에는, 무속인을 만나보면, “조상이 보인다. 천도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듣다가, 천도재를 지낸 후, 여러 군데를 돌아 보더라도, 그런 말을 듣지 않으면, 천도가 잘된 것입니다. 천도가 잘되지 않았더라도, 천도재를 지내는 자체가, 바로 자신의 공덕으로 돌아 오게 되므로, 자신의 공덕을 쌓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무속인 ~신을 받아 일을 하는 무속인은, 부속적으로 신점을 보기도 하지만, 이승에 떠도는 무주고혼, 집착령, 원한령등과, 이러한 집착령, 원한령 등에 빙의 된자를, 신의 힘으로 퇴치하거나, 저승으로의 천도하는 일이 주된 일입니다. 또한, 이러한 집착령, 원한령등은 스스로 저승에 갈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자손에게 고통을 주어, 자손이 스스로 사찰 스님, 시중의 법사, 무속인을 찾아 상의하도록 하여, 자신을 천도해 줄때까지 계속 고통을 주며, 천도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천도의 일은, 중생을 도운다는 보살행의 일종이므로, 스스로를 보살님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卍 (만) ~절을 뜻하는 "卍 (만)"자는 전법의 수례바퀴인 법륜을 의미하며, 불교와 사찰을 상징하는 대표문양이다. "卍" (만)자는 그 끝이 좌측으로 꺽여, 시계방향으로, 즉 우측으로 돌게 되는 모습이다. 한편 히틀러 문양은 반대로 꺽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게 되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무속에서 "卍 (만)" 를 사용하는것은 사찰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무속이 모시는 "신"이 부처님법에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임.

 

무속인 사주 ~명리학에서, 무속인 사주라고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신가물, 신줄). 명리학에서, 무속인 사주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다만, 명리학의 풀이나 해석에서, 여러 주장이 있지만, 대개 무속인 사주라고 말하는 사주는,

 

사주에 ""(정신세계를 의미)와 ""(신경계통을 의미)이 2개이상있고, 그 화와 목이 신강하여야 하며,②식상이 2개이상(식상은 각, 신의 의식과 자신의 의식을 의미)이 있으며, 그 식상도 신강하여야 하며,③ 천간에 (庚 ),(辛)이 있거나, 지지에 (申)이 있는데(지장간 포함), 일간과 합(천간합 또는 삼합,육합등 지합)을 이루고,④자신을 의미하는 일간 신강하고, 화개살(사묘지의 반합)이나 귀문관살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위와같은 ①,②,③,④의 조건을 갖추고, 정신세계인 "",""이 신강하여, 신의 기운을 잘타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을 "신가물(신줄)"이라 말하며,"신의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사람이 "신의 제자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신의 기운을 잘타는 신가물인 사람이라도, 불법에 귀의하거나, 평소 마음을 정갈히 하고, 수도정진하며, 기도,염불,독경을 열심히 하면, 충분히 일반인으로 살수 있다고 말합니다

 

위 무속인 조건에서, 일간이 신약하거나, 식상이 부족하는 등, 한,두가지가 부족하지만, 신의 기운을 잘타는 사람을 "조상가물(조상줄)"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상가물인 사람은 조상의 "'이 과중하여, 조상의 해원(조상의 원한을 풀어줌)이 필요하므로, 자손을 대표하여, 조상의 업을 풀어주고 천도해야 하고, 조상을 잘받들고 살아야 하는 업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래야 조상의 을 입고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조상의 해원없이 살게 되면, 운에서, 원진살이나, 편관(칠살)이 오면, 몸이 아프는 등, 온갖 마음고생을 심하게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근데, 조상가물인 사람이, "신의 제자의 길"을 간다는신가물로 착각하여, 신을 받게 되면, 아무런 신의 말을 듣지 못하여 "점사"가 나오지 않는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원진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 상대방과의 궁합이나 인간관계)~

"자"기준으로, (자/오)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자(쥐)와 미(양)

"축"기준으로, (축/미)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 /축(소)와 오(말)

"인"기준으로, (인/신)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 인(호랑이)와 유(닭)

"묘"기준으로, (묘/유)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 / 묘(토끼)와 신(원숭이)

"진"기준으로, (진/술)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 진(용)과 해(돼지)

"사"기준으로, (사/해)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 / 사(뱀)과 술(개)

​즉, 원진 ~ "자미"/ "축오"/ "인유"/ "묘신"/ "진해"/ "사술"입니다.

 

이것은, 서로 충이 되면, 싸우고 어떻게든 해결하는데, 충이 아닌 옆자리로서, 확실히 싸우지도 않고, 마음속으로 상대방에 대한 원망,미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귀문은 아래의 귀문관살을 참조(원진은 상대방과 자기 사주로, 상호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데 비하여, 귀문은 자기 사주내에서, 영적인 귀문여부를 파악하는 것)

 

왕지별---- 지지충------원진-------귀문 ----해당 지지의 위치

사왕지 ---자/오(충) → 자/미 → 자/유 ---(자/오)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귀문은 예외)

사왕지 ---묘/유(충) → 묘/신 → 묘/신 ---- (묘/유)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귀문도 마찬가지)

사생지----인/신(충) → 인/유 → 인/미 ----(인/신)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귀문은 앞자리)

사생지----사/해(충) → 사/술 → 사/술 ----​(사/해)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귀문도 마찬가지)

사묘지----진/술(충) → 진/해 → 진/해 ----(진/술)충되는 지지의 뒷지지가 원진 (귀문도 마찬가지)

사묘지----축/미(충) → 축/오 → 축/오 ----(축/미)충되는 지지의 앞지지가 원진(귀문도 마찬가지)

 

귀문관살 ~ "자유"/"축오"/"인미"/"묘신"/"진해"/"사술"입니다

귀신이 들락거린다는 귀문인데, 지지중에서, 연지를 제외하고, 일지를 중심으로, 일지+월지 또는 일지+시지와 같이, 귀문이 연달아 붙어있을때를 말함. (자기 사주를 쉽게 뽑는 방법이, 아래 블로그 내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역학의 더자세한 것은 아래의 브로그 카타고리 글 중 "사주 사주팔자 풍수지리"참조.

 

영험한 지장기도처 : ① 보개산 (연천) 원심원사, (철원) 심원사 ~ 심원사는 647년(진덕여왕1년), “영원조사”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흥림사”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720년(성덕19년), 사냥꾼 이순석형제가 흥림사 산내 암자인, 석대암을 세우면서 이곳은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보살 성가 돠었다. 859년 범일국사가 "흥림사"를 중창하였지만, 1393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395년 무학대사가 사찰을 새로 짓고, 영주산을 “보개산”으로, 흥림사를 “심원사”로 개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또다시 소실되어, 1595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나, 1907년, 의병 활동지라 하여, 일제에 의해, "심원사"는 또다시 전소되었다. 그후, 점차 복구하여, 1940년에는, 12개의 암자와 250칸의 당우를 갖춘 큰 절이 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지장보살석상1점, 지장영험비1점, 공적비1점, 부도 12점만 남기고, 심원사는 완전 전소되었다. 625이후, 1955년 보개산일원이 군사보호지역이 되면서 강제 국유화가 되었고, 사찰 입구에는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심원사는 완전 폐사상태가 되었다. 사찰을 , 연천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 철원 동송으로 옮기면서, 영험하기로 이름난, 석대암의 지장보살좌상을, 옮겨 모신 곳이 지금의 “철원 심원사”이다(철원 심원사의 명주전”에는, 너무 영험하여, ‘생지장보살”로 불리우는 석대암의 지장보살좌상을 옮겨 모시고 있다. 철원 심원사 산신각 앞에서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부처님 누워 계시는 모습의 "산등성이 실루엣"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철원 심원사 “영도”스님은, 5년간의 긴 소송끝에, 1997년 옛 심원사땅을 되찾게 되었다. 조계종단에서는, 철원 심원사는 그대로 두고, 연천의 원래자리에, 2002년부터 심원사와 석대암을 다시 불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여러번의 부처님 방광이 있었다고 한다. 연천의 복원된 심원사를, 철원 심원사와 구별하기 위해, “원심원사”라 부르게 되었다. 복원된, 연천 원심원사 “지장전”에는, 석대암에 계시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의 모습을, 조금 크게, 그대로 본뜬, 지장보살좌상을 새로이 조성하여 모시고 있다.

 

원심원사에서, 석대암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길이므로, 일반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있고, 일반인은, 30~40분정도 도보로만 오를 수 있다. 현재, 복원 준비중에 있는, 석대암에는 새로이 조성된, “대형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는데, 측면에, 이 지장보살님이 “방광”하시는 모습 "사진"을 걸어 놓고 있다(석대암에 계시던, 원래 지장보살좌상은, 1955년 철원 심원사 "명주전"으로 옮겨 모셨다). 연천 원심원사로 가는 입구 계곡은 여름 피서지로 이름난, “동막리 계곡 유원지”이며, 관광지로는 “비둘기낭폭포”, “고석정”, 그리고 5~6월에 열리는 고석정인근의 들꽃 축제가 유명하다.

 

* 심원사 의병활동 유적~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에 항의하며, 임진강, 보개산 유역은, 한반도 북단과 서울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항일의병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전국 1만여명의 의병과 함께, 두차례 서울 탈환작전을 도모하던 주무대가 보개산 심원사였다. 그러나, 심원사 의병은 1907.8월 70여명, 9월 80여명이, 일본군의 두차례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그해 10월에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일본군은 심원사가 항일 의병 활동지라는 이유로, 심원사를 모두 전소시켜 버렸다. 그후에도, 연천지역 의병은 1910년 10월까지, 70여차례 일본군과 교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가진, 연천의 “원심원사” 입구에는, “무명항일 의병묘역”과 “항일 의병비”가 세워져 있다.

 

심원사에 얽힌 석대암 창건설화~보개산 화인봉너머의 어느곳 화전민이었던, 이순석, 이순득형제는, 겨울철에는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신라 성덕왕19년(720년), 이순석,이순득형제가 쏜 화살로 인해, 황색 멧돼지가 피를 흘리며, 보개산 화인봉쪽으로달아났다고 한다. 멧돼지를 뒤쫒던 형제는 목이 말라 물을 찾던중, 멧돼지는 온데간데 없고, 개울의 웅덩이속에 반쯤잠긴 왼쪽어깨에 화살이 꽂힌, "지장보살좌상"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화살은 뽑히지 않는데다가, 높이가 90센티 정도밖에 되지않는 크기의 석상임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석은 "화전민으로 어려운 형편에 생계를 위해, 수많은 고귀한 생명을 빼앗은 저희를 용서하시고, 만일 저희를 용서하신다면, 내일 다시 뵙겠으니, 웅덩이에서 나와 앉아 계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당장 출가하여 지장보살님을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마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다음날 마을 여러 사람과함께, 돌아와보니, 지장보살석상은 웅덩이에서 나와 계셨다한다. 이 석상은 자신들의 속세의 수많은 죄업을 구제해주기 위해 나투신 것임을 깨달은 이순석형제는, 참회를 하고 출가를 하였고, 그자리에 심원사(647년 창건)의 부속절인, 석대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이후, 연천 심원사와 석대암은 폐허가 되었지만, 심원사를 1955년 철원으로 이전하면서, 석대암의 이 "지장보살좌상"도, 철원 심원사 "명주전"에 모시게 되었다한다. 이 지장보살좌상의 왼쪽어깨에는, 지금도 이순석이 쏜 화살에 맞은 손상된 흔적이 있다. 특히한 점은, 이 석상에 도금을 하면 얼마지나지 않아 금칠이 벗겨지므로, 도금이나 장식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이 지장보살좌상은 불상 곳곳에서 광명을 보이는 등, 여러 이적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영험들로 인해, "생"지장보살"(살아 계시는 지장보살)로 불리워 지고있다(지금도, 수렵이나, 어업, 정육점, 도살업을 하는 신자들이, 심원사에서 기도하면, 사업이 더욱 번창해진다 한다. 조계사앞, 매주말, 전국 철야기도를 위한, 관광버스 중, "철원 심원사행"도 있다).

 

연천의 원심원사부처님의 머리에 박힌 도끼에 관한 설화~묘선이라는 젊은 스님이 절의 보수를 위해 100일기도를 드렸는데, 첫번째 만나는 사람이 불사의 화주, 시주자가 될것이라는 부처님의 꿈을 꾸었다한다.그런데, 스님은 나무를 하고 있는 장가도 못간 아랫마을 머슴 박씨를 첫번째로 만나게 되었고, 스님은 그가 시주자가 되지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망설였지만, 자초지종을 말하였고, 그 말을 들은 머슴은 50평생 장가도 못갔는데, 돈을 모아서 무얼하겠나, 차라리 시주나 하자고 결심을 하여, 40여년동안 모은 돈을 시주하였다한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그머슴이 병을 앓게되어 머슴일도 못하게 되어, 할수없이 거처를 절로 옮긴 얼마후 죽었다고 한다. 스님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머슴박씨를 속여 불사를 하였다는 비난에, 부처를 원망하며,부처를 향해 도끼를 던진후, 떠났다고 한다.

 

그후 연천 심원사에는 부처님이마에 박힌 도끼가 있는데, 30년동안 아무도 그 도끼를 뽑을수 없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묘선스님은 궁금하고 또 참회를 위해 30년만에 절에 돌아왔는데, 마침그때 새로 부임한 30살먹은 신관사또가 자신이 도끼를 한번 뽑아보겠다고 찾아왔다고 한다. 신관사또가 삼배를 올린후, 도끼를 빼니,의외로 쉽게 도끼가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도끼에는 "화주 시주 상봉"이라는 6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야 묘선스님은, 부처님이 머슴박씨를 죽게한 뜻을 깨달았다한다. 스님은 사또에게 도끼 사연을 알려주고, 사또가 30년전 이 절의 시주자인 머슴박씨의 환생이라고 알려주었다한다. 이에 감복한 사또는 심원사의 모든 불사비용을 시주하리라 다짐하고, 30년만에 다시 심원사의 중창불사의 화주가 되었다고 한다.

 

② 고창 선운산 도솔암 내원궁 ~영험한 지장보살 기도처인, 내원궁과 별도로 도솔암 경내에 있는 마애미륵불(보물1200호)은 미륵기도처("영험한 미륵기도처" 참조) ③ 남해 호구산 용문사 ~영험한 지장기도처이며, 수국의 명소이다. 임진왜란 때의 호국도량. 조선왕실의 "축원당" 이 있었다 ④ 서산 상왕산 개심사~백제 의자왕14년(654년) 창건. 봄에 피는 왕벚꽃과 청벚꽃이 유명하다(우리나라 유일의 청벚꽃 자생지). 지장보살의 기도처로 잘알려져 있는 개심사의 대웅전에는,  특이하게 "치성광여래도"가 봉안되어 있다. 치성광여래도는 일반적으로 삼신각 후면에, 불화로 모시고 있으며, 약사여래 역할을 한다(약사보전 "치성광여래"편 참조).

 

⑤ 개심사 인근의 상왕산 용현계곡에는, "백제의 미소"로 별명붙은 "서산 마애삼존불"( 국보84호)과 백제 사찰터 였던 보원사지가 있다(보원사지에는, 석조수조 보물102호, 당간지주 보물103호, 오층석탑 보물 104호, 국사탑과 부도비 보물105호가 있다) ⑥ 경북 의성 고운사~ "부용반개형" 명당지에 건립하였다고 알려 졌으며, "고운사 명부전 지장보살님을 뵙고 왔느냐?"며 염라대왕이 묻는다는 지장보살 영험성지인데, 고운 최치원 선생이 중창불사를 하여, 사찰이름을 "고운사"로 명명하였다.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에는, 고운 최치원선생의 동상이 있다. 선생은, 신라시대 학자이며, 문장가이다. 당나라로 유학가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로잡는, “시무책 10조”를 올려 벼슬까지 하였다. 불교의 선종과 교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으며, 말년에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자는 “고운”, “해운”).

 

 서울 동작동 호국지장사~ 국립 현충원 후문인, 상도출입문 인근, 현충원 안의, 호국지장사는, 도선국사가 “금계포란형” 명당에 창건한 “갈궁사”였는데, “화장사”로 이름을 고쳤다가, 1983년 국립현충원이 조성되어, “호국지장사”로 바꾸게 되었다. 국립현충원은, 관악산으로부터 그 맥이 이어지는 “서달산”에 위치하는데, 우거진 숲 때문에, 명당 확인이 어렵다. 국립현충원이 명당임을 확인하려면, 박대통령 묘소 밑에 있는, 현재 장군 제1묘역의 우뚝 솟은 장군봉에 올라서면, 배산임수형의 좌청룡, 우백호와 탁 트인 한강을 볼수 있는, 명당을 확인할 수있다. 이항복과 이덕형이 어린시절 공부하였고, 과거급제나 각종 고시에 합격한 영험한 기도처.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묻히고 싶어 했던 곳이라 전해짐.

 

호국지장사 보유 서울시 유형 문화재~ “능인보전”으로 명명된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약사불좌상”(75호~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불). 대웅전 신중도(118호~불법을 수호하는 천상의 신들), 현황도(119호~죽은 후, 3일만에 심판한다는 현왕과 그 권속들), 팔상도(120호~석가여래의 일대기), 아미타불도(114호~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불 설법장면), 구품극락도(115호~아미타불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청중들), 감로도(116호~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불화), 지장시왕도(117호~지장보살과 명부의 시왕들).

 

 강원 고성(속초) 금강산 화암사 ~ 진표율사가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한 지장암이었는 데,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이, 인근 좌선바위였던, "수"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전설에 의해, 벼 "화", 바위 "암"을 빌려 화암사라 개칭함. 미시령인근에 있는, 화암사의 미타암(전)은 영험한 “지장보살 기도처”이고, 화암사의 삼성각은 영험한 “산신기도처”로 속초에서 유명하다. 삼성각 법당 안팎에는, 천성대, 상팔담,세전봉,삼선대등의 금강산 풍경이 그려져 있어, 화암사가 금강산 일만이천봉 남측 첫 봉우리인 신선봉 아래에 있음을 알려 준다.

 

인근에는 역대 고승들의 좌선바위였다는 "수"바위는, 애기 점지의 영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바위를 경유하는 화암사 숲길은, “신선대(성인대)”에서, "설악산 울산바위"가 전망되는 명소이며, 인근 도원리 계곡(일명, 도원리 무릉계곡)은 여름철 숨은 계곡의 명소이다. (화암사 치유숲길~화암사(화암사 사찰 50미터 아래 수바위 입구에서 출발)→ 수바위→ 시루떡바위→ 성인대(신선대) → 울산바위 조망점→ 성인대(신선대) → 산림치유길→ 화암사(화암사입구 도착)/4키로, 2시간, 난이도 하/ 제1주차장에서 주차요금을 지불하고, 제2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등산에 편리). 

 

경기 남양주 백봉산 백천사~ "지장보살 화신"이라 불리는 김교각스님 기념관이 있는 백천사는, 1994년 창건하였는데, "백천사 약수처"도 유명하다. 신라 33대 성왕 아들인 김교각스님(696~794년)은, 신라 왕자 출신임에도 중국으로 건너가 수도하고, 중국 "구화산"에서 "화성사"를 창건한 후, 지장보살 포교를 하였다. 생전의 유언에 따라, 입적후, 3년이 지나도, 육신이 생전 모습 그대로 있다면, "육신불"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3년 후에도,육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등신불"(육신불)로 조성되고, 육신보전의 지장전에 모셔 "육신 지장보살"이 되었다.

 

이런 일이 널리 퍼져, "구화산"은 지장보살의 성지가 되고, 김교각스님은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되었다(보현보살성지 "아미산", 문수보살성지 "오대산", 관음보살성지 "보타산", 지장보살성지 "구화산"을 중국의 4대 불교 성지라 한다). 백천사의 "김교각스님 기념관"에는,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스님이 사용했다는, 신발과 모자, 그의 발자국이 들어난 "돌"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등신불이 되기까지의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또 백천사에는 1990년 구화산에서 입적하여, 3년동안 항아리에 안치후, 1995년 3월16일 육신 "등신불"로 모셔진, 자명스님의 육신을 보관하였다는 "육신보전"항아리도 있다. 지장보살 기도처인, 백천사에서는 매년 가을, 음력 9월9일에, "구절초 축제"와 함께 "지장보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영산전 팔상전 : 영산전은, 북방 “영산 정토세계”에 계신, "화신불"인, 석가불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전은 석가불의 중생교화를 나타내지만, 영산전은, 석가불처럼, 중생구제를 위해, 중생의 몸과 같은 범부의 모습이나, 시대나 지역, 상대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시는, 화신불 (응신불)을 모시게 됩니다. 과거불, 석가불, 미래불(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영산전은 "화신불"로서, 석가불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석가불의 “영산 정토세계”를 나타내는 전각이므로,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제화갈라보살”은, 석가의 먼 전생에, 수행자였던 석가에게,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주었다는 “정광여래”의 화신이다).

영산전의 “영산”은 인도 “마가다국”의 “왕사성”주위에 있던, “영축산”의 준말인데, 부처님이 설법하였던, “영산 불국정토”를 상징한다(석가불의 북방 정토세계인, "영산회상"을 의미). 후불 탱화로, “영산회상도”와 부처님 일대기를 여덟장면으로 나눈, “팔상도”를 봉안하므로, “영산전” 또는 “팔상전”이라 한다(특이하게, 서울 강남 “봉은사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나한전(응진전)처럼,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협시보살로 하는, “나한”을 모시고, 영천 “거조사 영산전”에는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전 응진전 오백나한전 :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중에서 아주 뛰어난 아라한과를 얻은 나한(아라한의 약칭으로, 성자라는 뜻)을 모신 전각인데,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 좌우에 16나한을, 그 끝부분에 범천왕과 제석천왕을 모신다. 이들은 공양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고,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하여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성자들로서 많은 영험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오백나한전은 석가 삼존을 중심으로, 아라한과를 얻은 5백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이 오백나한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독특한 능력과 높은 영험이 있다고 한다.

 

알려진 영험한 나한 기도처 ~ 나한전, 응진전에서 기도한다. 16나한전에는 "십육성중", 오백나한전에는 "제대성중"이라 부르며 기도하고, 대웅전 중단에 계시는 화엄신에게 기도할 때에는 "화엄성중"이라 부르며 기도함. 공물은 쌀등 일반적 공물뿐만 아니라, 생수, 사탕, 빵등을 올리기도 한다.

 

 안성 칠현산 칠장사 ~일곱 나한의 가피로 유명한 나한기도처인데, 창건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 선덕여왕때(532~647), “자장율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현종5년(1014년), “혜소국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 때, 7명의 “악인 장사”를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사찰이름을 “칠장사”라 하고, 뒤산을 “칠현산”이라 하였다. 고려 우왕9년(1383년), “고려역대실록”을 이곳에 보관하였으나, 138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사찰은, 전소되었다. 조선중종1년(1506년), “흥정”이 중건하였으나, 현종15년(1674년)에, “세도가”들이 “묘지”로 쓰기 위해, 불태웠고, “초견”이 중건하였다. 숙종20년(1694년)에, 다시 불탔으나, 숙종30년(1704년)에 “석규”가 법당을 새로 지었고, 그 뒤로, “선진”등이 추가로 법당을 지었다. 그후, 고종14년(1877년)에 중건하였다.

 

칠장사에는, “궁예”가, 유년시절에 활쏘기를 했다는 “활터”가 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병해대사)에게 바쳤다는 “꺽정불”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나한전”에 기도드리고,꿈속에서 나한을 뵙고, 과거 시제를 받아, 장원급제 하였다는 어사 박문수의 설화가 있다(따라서 특히 학업성취 기도처 / 어사 박문수의 부모에게 후사가 없어, “산청 법계사”와 함께 북한산 "문수사"에서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암행어사 박문수인데, 문수보살이 아들을 주셨다하여, 박문수로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칠장사 유물로는, 칠장사 “오불회 쾌불탱”(국보296호), 지정문화재로, “해소국사비”, 철재당간”등이 있다.

 

 영천 거조사 영산전 ~ 영천 은해사 말사로서, 738년, 효성왕2년에 "원참조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742년~ 765년)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2가지설이 있다. "영산전"은, 건축년도가 확실한 1375년(고려우왕1년)에 지어진, 고려시대 목조건축물로서 국보14호이다. "영산전" 내부에는, 석가불과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526분의 석조 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영산전" 일명, "오백나한전"은, 영험한 나한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 서울 강남 “봉은사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나한전(응진전)처럼,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협시보살로 하는, “나한”을 모시고, 영천 “거조사 영산전”에는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다). 

 

③ 과천 관악산 연주암 연주대의 응진전(의상대사가 창건한, 연주대의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기도처이며, 바로 옆의 마애 약사 여래불은 영험한 약사기도처/서울 남쪽 전통사찰편 참조) ④ 경주 기림사 나한전 ⑤ 서울 북한산 문수사 ~태고 보우국사가 득도했다는 문수사는, 문수굴의 나한 기도 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기도처 ⑥ 제천 와룡산 고산사 (응진전 석조 나한) ⑦ 칠곡 도덕산 도덕암 ⑧ 서귀포시 약천사 ⑨ 봉화 청량산 청량사 응진전(응진전은 영험한 나한기도처, 유리광전은 영험 약사기도처) ⑩ 군산 취성산 상주사(석조 16나한상)  강화도 보문사 "나한굴"의 나한기도 ⑫ 산청 중산리 지리산 반야-사~산신각에 달마대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반야다라"존자의 석불을 모신, 나한기도 영험한 성취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⑬ 울진 불영사 응진전~ 불영사는, 651년(진덕여왕5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부처바위가 연못에 비친다하여, 불영사라 하였다(CNN선정, 아름다운 사찰 33곳중의 “한곳”이다. 인근에 불영사 계곡이 있다).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불영사 의상전은,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몇년전, 의상전을 수리하던중, 발견된 상량문을 해독하여, 의상전은, 원래, 1867년 인현왕후 원당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 졌다(원당~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법당 또는 특정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법당). “인현왕후”는, 후사없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인경왕후” 다음의, 숙종임금 계비였는데, 장희빈의 음모로, 1689년, 폐출되었고, 1694년까지 5년동안 , 친정인 "서울 안국동"에 머물고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는, 자식도 없고, 장희빈에 빠진, 숙종임금이 다시 불려 줄 희망도 없어, 스스로 자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살며시 잠이 든 순간, 한 스님이 꿈에 현몽하여,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 바, 3일만 참으시면, 상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므로, 염려하지 마십시요”라고 말하였다. 이런 불영사 스님의 꿈을 꾼 후, 장희빈의 음모가 발각되어, 왕후에 복귀하게 되었다[차후, 사자가 왕에게 보고한 바, 현몽한 스님은 1516년에 입적하신, 불영사 명상의 길, 부도탑과 비석에 있는, “양성대사”로도 불리던, “혜능스님”과 그 모습이 같았다고 한다]. 왕후께서는 환궁후, 숙종에게 아뢰어, 불영사 사방 10리의 산을 하사하였고, 네곳에 표지를 하여, 사찰을 보호하며, 부처님 은덕에 깊이 사례하였다고 한다[이런 불영사 사적비 내용이, 625때,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 앉아, 법당과 함께 나를 불태우라며, 상원사를 지켰던, “한암스님”이 1933년에 세운, 불영사사적비이다]. 불영사 의상전 "상량문"이 발견으로, 사적비 내용이 사실이고, 의상전은 원래, 1867년, 인현왕후 원당으로,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인현왕후 민씨~ 1681년, 인경왕후를 이어받아, 19대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장희빈,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총애로, 장희빈이 “경종”을 낳자, 장희빈의 모략으로, 1689년,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인현황후는 “페서인”이 되어, 친정인, 사가(서울 안국동”, 현재의 “감고당”길)에 머물게 된다. 친정에 머물 때, 김천 수도산에 있는 “청암사”의 극락전에 3년간 머물며, “청암사”에서 “수도암”까지 산책을 하고, 애환을 달래며, 복위를 부처님께 기원하였다고 한다 (인현왕후길~9키로, 2시간30분).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고, 인현왕후의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가, 아들을 낳자(차후, 영조. 영조 아들이 사도세자. 사도세자 아들이 정조), 1694년, 중전으로 복위하였다(2차례 중전이 됨). 그후, 희빈 장씨는, 후궁으로 밀려나고, 차후, 장씨는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 굿”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게 되었다. * 페비 윤씨~ 공혜왕후를 이은, 9대 성종의 계비(제헌왕후)인데, 연산군을 낳은 왕후였다. 시기, 질투로 인하여,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이유로, 1479년 “페서인”되었고, 차후, 연산군의 후환이 두려워, 1482년 사약을 받게 되었다.

 

불영사의 "황화실"전각은 일명 "환생전"이라 불리는데, 그 전각안에는 “환생전기 현판”이 있다. 1396년 울진 현령으로 임명받은, "백극재"가 임지로 부임하던 중, 전염병으로 갑자기 죽었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객사가,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하여, 부인이 관을 불영사로 옮기고, 법당에 꿇어앉아 3일 낮밤으로, 부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극락왕생 기도드렸다. 그날 부인이 설핏 잠들었는데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나타나 “10생에 맺힌 원한을 풀라”하고 외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부인이 깜짝 놀라 남편이 누운 관을 열어보니 죽었던 남편이 문득 환생해 있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탑 앞에 있는 요사를 “환희료”, 금당을 “환생전이라 부르고, 사찰을 중수했다고 한다. 환생전안에는, 이런 내용의 "환생전기 현판"이 있다. 그외 여러 나한기도 영험사례가 전해지는 불영사는, 알려진 영험한 나한기도처이다. 보물로는, 응진전(보물730호), 대웅보전(보물1201호, 법당기단 좌우에 돌거북이 있다), 대웅보전의 영산회상도(보물1272호)와, 경북유형문화재로, 삼층석탑(135호)과 극락전(290호)이 있다.

 

⑭ 속초 설악산 계조암 나한 석굴 ~ 고승들의 수행처인 나한석굴(입구에, "신통제일나한석굴"이라 되어 있음)은, 영험한 나한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계조암의 삼성각은 영험한 나반존자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⑮ 함양 금대암 나한전 ~ 천왕봉이 조망되는 지리산 자락인, 함양 마천면에 있는 금대암은, 656년(무열왕3년)에 행우조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나한전을 지었고, 그후, 많은 이름난, 고승들이, 참선수행하였던, 영험한 나한기도도량이다. 금대암에는 높이 40미터 정도로 올곧게 쭉뻗은, 수령 600년 정도의 유명한 "전나무"가 있다.

 

 도봉산 망월사 영산전 ~ 신라선덕여왕 8년(639년) 해호화상이, 신라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며 창건하였으며, 1066년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중창하였다. 신라말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가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진다. 망월사 문수굴과 영산전은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소문 난, 영험한 나한 기도처로서, 매년 봄, 가을 2차례에 걸쳐 철야 기도를 봉행하고 있다. 영산전 좌측으로 가면, 명당자리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122호의 혜거국사탑이 있다(영산전은, 석가불의 북방 "영산 정토세계"를 나타내는 전각인데, 이곳에서는, 나한을 모신 나한기도처이다). 

 

망월사는 경기도 지방의 “선”기도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재가 불자를 위하여, “선’수행 지도법회를 수시로 열고 있다. 전각의 명칭은 특이하게, 동방 약사불, 중앙 석가불, 서방 아미타불의 삼계불을 모신 전각을, 일반적으로 "대웅보전"이라 하는데, "고불전"이라 명칭하고 있으며, 관음전을 “낙가보전”이라 현판하였으며, 지장전을 “무설전”이라 현판하였다. 무설전 현판 밑의 “망월사” 현판은 청나라 원세계(위안스카이)의 글씨이다.

 

*도봉산 원효사~ 망월사 인근에 있는 원효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원효대사가, 한동안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 했던 곳으로, 원효대사 동상이 있다. 원효대사는, 이곳 “원효사”에서 수도 중, 북한산 건너편에서, “영기”가 솟는 모습을 보고, 이를 뒤쫒아, 약사여래불 바위를 찾게 되었고, 그 자리에 북한산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한다(영험한 약사기도처~ 북한산 “흥국사”참조).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양수리 인근을 지나던 세조임금이,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다하여, 절을 중수하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내림. 영험한 나한기도처) * 용인 용덕사(용굴을 세번 오르내리며,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전설이 있다. 이름이 같은 "서울 우이동 용덕사"는 영험한 산신기도처 *양주 도봉산(오봉산) 석굴암 나한전 (특이하게 칠성전의 나반존자를, 나한전에 모신, 영험한 나한이 아닌, 나반존자 기도처)* 광주 증심사 오백나한전  등등

 

여주 신륵사~남한강가의 국민관광지에 위치한 사찰이다. 강가에서 맞는 일몰이 유명하며,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고종때, 건너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서, 걷잡을 수없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벽돌로 쌓았다는 “다층전탑”이 있다는 이유로,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말인 1376년(우왕2년)에 “나옹대사”가 머물렀던, 신륵사는 200여칸 대찰이었다고 한다. 그후, 1472년(성종3년), 인근 여주시에 영릉(세종대왕릉)을 만들면서,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원찰~화상이나 위패를 모시는 사찰)이 되고, “보은사”라 하였다.

 

신륵사에는 보물 8점과 경기도 유형문화재가 있다. 신륵사 조사당(보물180호), 다층석탑(보물225호), 다층전탑(보물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229호), 대장각기비(보물230호, 대장경을 인쇄하고, 그 내력을 적은 비석), 석등(보물231호), 극락보전 아미타여래 삼존상(보물1791호)이 있고, 경기도 유형 문화재로, 극락보전, 삼화상진영(지공, 나옹, 무학의 진영), 건륭삼십팔년명 동종이 있다.

 

문경 희양산 봉암사(1년에 단하루만 개방되는 사찰) ~879년(헌강왕5년)에 지증국사가 창건한,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종찰이다. 봉암사는 백두대간의 배꼽단전에 해당한다고 하는 희양산자락에 있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조계종 특별수도원”이다. 봉암사는 매년 1회 부처님오신날, 단 하루만 일반에 개방하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사찰이 아닙니다(그날 무지하게 붐비므로,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애 미륵보살좌상과 함께, 전각중에서는, 특히, 극락전과 산신각이 많이 붐빈다).

 

봉암사의 보유 유물은 국보1점, 보물 6점이 있다. 지증대사탑비(국보315호)와 지증대사사리탑(보물137호), 정진대사탑비(보물172호), 삼층석탑(보물169호)이 있고, 봉암사 극락전(보물1574호)은, 임진왜란때에도, 일주문과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유일한 현존 누각식 목탑”이다(“누각식 탑”에 대하여는, “금산사 미륵전” 부분 참조). 봉암사에서 10분거리 문경 백운대 계곡에는, 마애미륵보살좌상(보물2018호)이 있고, 봉암사 봉황문(일주문)은, 2022.12.28일,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보물번호는 부여되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국보, 보물의 소중함이 모두 같으므로, 2022년 12월이후, 새로이 지정되는 국보나 보물에 번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한다.

 

조사전 조사당 국사전 : 선종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를 봉안한 곳인데, 조사당이라고도 한다. 조사당이 없는 사찰에서는 영각을 지었고, 국사를 배출한 사찰에서는 국사전을 짓기도 했다. 송광사 국사전에는 고려시대부터의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교종은 소의경전을 근거하는데, 선종은 이심전심 심법에 의지한다. 이러한 심법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깨달음의 정도와 그 경계를 증명하고 이를 인증받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신 스승에 대한 존중으로 부도와 탑비외에 조사전과 영각을 세워 이를 기리게 됨.

 

염화미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을 말하며, 이심전심을 상징하는 말이다. “대범 천왕문 불결 의경”에서,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대중에게 설법을 하시기 전에, 아무런 말없이 연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대중들이 어리둥절하였는데, 유독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강남 봉은사 "영산전”에는, 석가불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협시보살로 하는,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즉, 스승과 제자가 아무 말없이, 꽃과 미소만으로 이심전심의 소통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가섭의 미소를 본 부처님은, “내게는 바른 법을 꿰뚫어보는 눈, 현묘한 마음, 겉모습을 벗어난 진실한 모습, 미묘한 법문이 있다”고 말하며, 이것을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전하니,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부탁)하노라”하셨다. 선종에서는 “염화미소”로 상징되는, “이심전심”을 전법의 상징이 되는, 조사법통의 근거로 삼고 있다.

 

* 순천 조계산 송광사~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이다. ①산에 소나무가 많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 하였고, 사찰이름도 송광사라 하였다고 한다. ②18명의 승려가 나서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즉,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승려를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신라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려 신종때,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중창하고, “수선사”라 하였는데, 1208년(고려 희종4)에, 왕명에 의해,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개칭하고, ‘송광사”라 명명하였다. 그 후,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이 중창한 이후부터,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 오며, 조선 초기까지 이 사찰에서 배출한 국사가 16명이나 되는, 승보종찰이 되었고, “조계종”의 발상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페사에 이른 사찰을 “응선”과 “부휴”가 중건하였으나, 1842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직전에, 의병을 돕는 곳이라며, 일제에 의해 사찰이 파괴되었다. 이후, 1948년, 여순사건과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취봉”, “금당”스님이 복구하였다.

 

송광사는 “풍경”, 석탑”, “석등”이 없는 “3무” 사찰인데, 풍경소리는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고,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터가 “연화 부수형”이므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앉는다는, 지리 풍수적 이유 때문이었다. 1985년에, 명부전을 허물고, 지장전을 세웠는데, 이에 필요한 돈을 시주한,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부부의 위패를, 지장전 오른쪽에 모시고 있다.

 

송광사는 전국 사찰가운데, 보물이 가장 가장 많은 사찰이다. 국보로는, 송광사 국사전(국보 56호, 1369년 건축), 목조삼존불감(국보42호, 보조국사 지눌이 소장하였던, 섬세하게 조각된, 소형 목조불감), 혜심고신제서(국보43호, 고려 고종이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제가한 문서), 화엄경변상도(국보314호, 비단에 그려진 탱화로, 천상세계인, 화엄경 7처9회의 법회, 설법내용을 알기 쉽게 조형화한 그림),

 

보물로는, 대반열반경소(보물90호, 고려속장경 일부), 송광사 경질(보물134호), 송광사 경패(보물175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보물204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보물205호, 세조때 복원한, 통일신라시대 불교논서), 묘법연화경찬술(보물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207호), 하사당(보물263호), 규모가 작은 약사전(보물302호), 영산전(보물303호), 고려 고문서(보물572호), 16국사의 영정(보물1043호, 1995년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정혜국사의 3점 영정을 제외한, 13점의 영정을 도난 당하였다. 13점의 영정은 복원품이다)

 

응진당 석가모니 후불탱 및 16나한탱(보물1367호), 영산전 후불탱(보물1368호), 티베트문 법지(보물1376호), 소조 사천왕상(보물1467호),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보물1468호, 2004년, 사천왕상 보수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전기 대각국사 의천의 “고려 속장경’에 대한, 원본 일부 및 세조의 복원본 12종14책), 목조석가여래 삼존상 및 소조16나한상(보물1549호),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유물복장전적(보물1661호, 불경 총8종 17권), 송광사 조계문(사천왕문, 2024년, 보물로 지정) 등이 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국가 및 전남 지정문화재 2,721점을 비롯해, 약 2만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송광사에는 2그루의 향나무가 있는 데, 이 “쌍향수”(곱향나무)는 천연기념물 8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순천 선암사~ 송광사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조계산 동쪽에 위치한, 천년 고찰인 “선암사”가 있다. 선암사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산지승원의 하나이며, 태고종 사찰인데, 조계종과 소유권 다툼이 있고,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 신라말 875년(헌강왕1)에, 도선국사가 현 위치에, 절을 짓고 “선암사”라 하였다. 절 서쪽에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옛 선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며, 이 때문에 사찰이름을 “선암”이라 하였다. 고려 중기 1088년(선종5)에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천태종을 널리 전파하며, 호남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이후, 조선 초기는 알 수가 없고, 1540년(중종35)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1597년 정유재란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고, 철불, 부도, 문수전, 조계문등 일부만 남았는데, 1660년(현종1)부터 “호암 약휴”스님이 중창불사를 마무리하였다. *유네스코 산지승원~①양산 통도사, ②영주 부석사, ③안동 봉정사, ④보은 법주사, ⑤공주 마곡사, ⑥순천 선암사, ⑦해남 대흥사.

 

1789년(정조13)에, 후사가 없었던 정조는 태자를 낳기 위해, “석왕사”(북한 강원도 안변군 설봉산에 있는 사찰)와 “선암사”에 기원을 의뢰하였다. 선암사에서는, “눌암”, “해붕”스님이 100일 기도하여, 1790년 순조임금이 태어났다. 왕위에 오른 순조임금은, 석왕사에 부처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고, 선암사에는, 순조의 친필인, 편액(처음에, 큰 복의 밭이라는 뜻의 “대복전”이라는 글씨를 내렸는데, 그 뒤, “인”자, “천”자의 두 글자를 다시 내려, “인천대복전”의 편액이 되었다)과 은향로, 쌍용문 가사, 금병풍 등을 선암사에 하사하였다. 1798년(순조22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중창하고, 현재의 가람을 갖추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10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여순사건,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20여동만 남아 있다.

 

문화재는, 동서 삼층석탑(보물395호), 승선교(보물400호, 절입구 무지개다리), 삼층석탑사리장엄구(보물955호), 대각국사 의천진영(보물1044호), 선각국사 도선진영(보물1506호, 도선국사), 북 승탑과 동 승탑(보물1184~5호), 대웅전(보물1311호), 석가모니불 쾌불탱 및 부속유물(보물1419호), 서부도암 감로왕도(보물1553호), 33조사도(보물1554호), 동종1(보물1558호), 동종2(보물1561호) 그리고, 전남 유형 6점, 전남 문화재자료3점을 보유하고 있다. 선암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488호), 매화나무 2그루가 있다. (선암사 성보 박물관에는, 보물을 비롯한 문화재 18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선암사는 태고종, 조계종간의 오랜 소유권 분쟁으로, 관리가 소흘하여, 33점 문화재를 도난 당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도난 당한 사찰이다. 선암사의 산내 암자인, “대각암”은, 대각국사 “의천”이 여기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대각암”이라 하였다. 대각암에는, “대각암 승탑”(보물1117호)이 있다. 또, 선암사에서 대각암으로 올라 가는 중간에, 약 7미터 높이의 선암사 마애여래입상(전남문화재 자료157호)이 있다.

 

* 완주 송광사~ 통일 신라시대인, 867년(경문왕7)에, “도의”가 창건하였다. 그 후, 페허가 되어, 1622년(광해군14)에, “응호”, “승명”등 6명의 스님이, 중창을 시작하여, 1636년(인조14)까지, 14년만에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보유 문화재는, 송광사 대웅전(보물1243호), 종루(보물1244호), 소조사천왕상(보물1255호),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1274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16나한상(보물2126호). 산문인, “금강문” (2024년, 보물로 지정). 완주 송광사의 왕벚꽃길은 아름다운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전북 완주 “위봉사”는, 604년(무왕 5)에 서암대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극락전 중수기”에는, 신라말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유람하다가, 산꼭대기에 올라 보니, 상서로운 빛이 비치는 곳에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위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1358년(공민왕 8)에, “나옹”스님이 중창하였다. 그 후, 1466년(세조12), 석잠대사가 중수하였다 한다. “위봉사”는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이자, 포교당이 되었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보물608호이다.

 

삼신각 삼선각 삼성각 칠성각 성모각(한민족 고유의 종교인, “선교(仙敎)의 불교 수용)~ 우리 민족을, 하느님 민족이라 하여, 한민족이라 부르는, 민족 고유의 하느님 신앙인, 하느님(칠성님)께 기도하던 선교(仙敎)가, 불교전래 이전부터 자연적 발생하여,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하나님을 숭상하는 민족을, 하느님의 한자식 표현인 "한"민족이라 특정하였다. 사찰의 삼신각에 모신, 그 하나님이 북극성의 칠성궁에 상주하여 계시다고 하여 칠성님이라고도 하였다(선교). (중국의 도교와 한국의 증산교는 옥황상제, 불교는 제석천왕. 한민족은 하느님)

"한민족"이라는 말은, 하나님 민족이라는 말의 준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한자식 표현이, 한(韓)이고, (조선족이라 부르지 않고)"하느님민족'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민족 고유 이름입니다. 중국의 한나라(漢)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한"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민족적 특성을, 한민족이라 특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한민족, 구한말=고종이 선포한 대한(韓)제국. 현재는, 위대한 하느님의 나라, 즉, 대한(韓)민국입니다. "하느님", "하나님"은, "한민족"이 믿는 민족신의 고유한 명사로서, 북극성의 칠성궁에 계시다하여, 일명 칠성님이라 부르는 데, 불교에서는 "칠성부처님"이라 부르며, 부처님 모습을 하고 있다.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며, 대장선에 "칠성기"를 달고 출전하는 모습이 있다.

칠성판~ 중국, 일본과 다른, 북극성의 칠성궁에 계시다는, "하나님"을 모시는 우리 한민족 만의 "독특한 장례 풍습"으로 "칠성판"이 있다. 칠성별에 계시다하여,일명 "칠성님"이라 부르는 "하나님"은,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관장하여, "출생"은 삼신 할머니를 통하여, 애기를 "점지"하고, "죽은 자"에 대하여는 "하나님"과 "견우와 직녀"가 사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송판"이나 "종이"에 북두칠성 모양 구멍을 뚫거나, 북두칠성 형상을 그려, 죽은 자의 육신을 받혀 놓는 "칠성판"이라는 장례풍습이, 한민족이 태동한, 고조선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사후세계~ 한민족 장례 풍습인 "칠성판"은 유교에서 유래된 풍습이 아니고, 하나님 민족인 "한민족 만의 독특한 사후세계관"으로, 하나님과 함께, 태초 고향인, 북극성과 북두칠성 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돌아가신 모든 조상님 들이, 살고 계시다 생각하였다(우리민족은 돌아가신 분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고 표현합니다. 이때 "하늘나라"(천국),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 합니다). 즉, 출생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죽어서도 북극성, 북두칠성의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하여, "한"민족, "하나님 민족"이라 특정하였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삼신각의 "나반존자"에 대하여, 3가지 설이 있다.

 

*하느님(칠성님)→(한인→한임→한님→하느님) 즉, "한인"(환인)은 하느님의 고어. 혹은, 하느님의 한자식 표현. 우리민족은, 옛부터 하나님을 숭상해왔다(하나님의 표준말은 하느님). 그런 하나님을 숭상하는 민족을, 하느님의 한자식 표현인 "한"민족이라 특정하였다. 그 하나님이, 북극성의 칠성궁에 상주하고 계시다고 하여, “칠성님”이라고도 하였다(선교). 하느님 궁전인, "하늘"의 칠성궁에는, 천선, 즉 하느님(칠성님)이 계시고, "지상"의 땅에는, 신선(신령,독성)과 산신(산왕대신)이 계신다. 하나님은, 사찰의 삼신각에서, “나반존자”와 “산왕대신”이 좌우에서 보좌하며, “삼신할머니”와 “선녀”를 거느리고 계신다. [중국의 "도교", 한국의 "증산교"는 “옥황상제”, 불교에서는 “제석천왕”이지만, 한민족은 하느님 혹은 칠성님].

 

*한웅시대→ 하느님(환인)의 서자인 “한웅”이, 인간세상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 뜻을 알고,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홍익인간)" 천부인 3개를 주면서, 인간세계로 내려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삼국유사). 즉, 한인(하느님) 아들인, “한웅”이 하늘로 부터,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산하여, 한민족을 다스린, 하느님 자손인, 영웅들 시대 즉, "한웅시대"를 열게 됨. 구한의 무리(9갈레의 하느님민족인 "한"민족 무리)가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한단고기 삼성기"하").

 

하나님을, 한자로 표현할 때, “천제”라는 말이 아닌, 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할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하늘 “천”빼고, 우리말로 표현한 것, 고조선에서는 “환”, 현재는 한민족 “한”. 하나님의 한자표현→ (하나님=환인=한인), 영웅인, 하나님 아들→ (영웅환웅=한웅)

 

한웅시대 다스림의 기본 이념 ~ ①다스림의 기본이념~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②다스림의 원칙~ 제세이화(하늘의 이치로 다스림). ③다스림의 목적~이화세계(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원칙이 충족된 세계를 이룸). 홍익인간”정신은, 대승불교의 자신과 함께 타인도 이롭게 한다는, “자리이타”정신과 일맥 상통하는, “인류애”적인, 숭고한 봉사적 이념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가져야 할 선량한 품성과 도덕적 가치에 우선을 두었다. 

 

천부인 ~ 풍백, 우사, 운사의 삼신 또는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을 의미한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천부경 ~ 제1대 한웅이신, "거발한"께서 하느님으로 부터 받았다는 경전을 말한다. 이 경전은 고대 전비에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었는데,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발견하여, 이를 한자로 번역하여 서첩으로 꾸며 전하였고, 그후, 일제시대인 1917년 묘향산에서 수도중이던, "계연수"스님이 암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하고 탁본하여, 당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창종한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전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됨.

 

이 경전은 1~9까지의 숫자를 가지고, 천지창조와 그 운행의 묘리인, 만물의 생장과 성쇠의 원리를 "3"의 조화사상 즉, 삼신사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고대로 부터 내려온 동양철학인 "역학"에서는 세상의 이치를 "하도낙서"를 기준으로 하는데, "하도"는 선천의 수로 1부터 10까지의 수이며(음과 양의 오행 각2자씩 10자), "낙서"는 후천의 수로 1부터 9까지의 수(불완전한 인간세상의 수)를 기준을 합니다. 

 

① "나반"(아반, 아방, 아범)은, 5만년전 바이칼호 근처에서 태어난, 한민족 최초의 인물인데, 꿈에 천신(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사달(아이사타)에서 "아만"(아망, 어망, 어멍)을 만나, 혼례를 이루었고, 구한의 무리(9갈레의 하느님민족인 "한"민족 무리)가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한단고기 삼성기 "하"). 그러므로, "나반존자"는 한단고기에서, "나반"(아반, 아방, 아범)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한민족 최초의 인물이므로, 한인(하느님)의 자손으로, 한민족 최초의 인물인, "한웅"을 뜻하고, 이분을 삼신의 한분으로 모신 것이라 한다.

 

*단군시대 나라를 세워, 하느님 민족 백성을 다스린, 신령한 "단군시대를 열게 됨(기원전 2333년). 단군시대의 "단"은 제단 또는 몽골의 "칸"과 같은 말이며, "군"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므로, "단군"은, “왕중의 우두머리 왕”(단군)라는 말입니다. 그 단군 “왕”들 중에서 첫번째 임금인, 왕검의 "검"은 신령하고 영험하다는 순우리말이므로, 단군시대 영검을 가지신, 첫번째 임금인, "단군왕검"은 신령하고 영험한, “신령한 왕중의 우두머리 왕”(단군왕검)이라는 뜻입니다.

 

한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고, 그래서 예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살았다. 이런 한민족의 “하나님 신앙”에, 하늘에는 “도리천”과 그 도리천에 "제석천왕”이 있다는 불교가 전래되자, 단군을 "제석환인"이라 표기하였다. 즉, 하나님 아들인, 한웅과 단군 “왕검”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불교에서 “제석천왕”이므로, “단군신화”에는, 민족의 하나님인, 단군 “왕검”을 묘사할 때,. “제석환인”(제석하나님) 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환인→한인→한임→한님→하느님 즉, "환인”은 하느님의 고어 이다. 조선말에 쓰던 하나님의 표준말은, 하느님이다).

 

단군시대 다스림의 기본 이념 ~ ①다스림의 기본이념~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②다스림의 원칙~ 제세이화(하늘의 이치로 다스림). ③다스림의 목적~이화세계(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원칙이 충족된 세계를 이룸). (한웅시대 다스림의 기본이념을 그대로 이어받음).

 

"단군의 자손"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한웅'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 유대교) 구약에서, 여호와(야훼)에게, “아들”이 있다거나, “아들”에 대하여 말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성경, 가톨릭과 개신교) 신약에서, “사도”들은, "신화"를 표절한, “예수”를, 여호와(야훼)신 "아들"로, 호적에 "무단입적”시키려다가, 모두 처형당했다.(예수 "탄생일"은, 죽은지 313년이 지나, 로마황제가 결정했고, 예수 "사망일","부활일"은, 325년이 지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하여, 예수가 "실존인물처럼" 조작되었다).

 

홍익인간~ "홍익인간"정신이라는, 인류를 위한 "봉사"와 타인을 위한 "이타"정신은, 국조 제1대 단군인 "왕검"의 건국이념이며,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민족 최고의 통치이념이다. 또한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적 교육이념이기도 하다.

 

최남선은, ("나반"은, 아버지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아방"의 한자식 표현이므로)나반존자(신령님)를, 우리나라 단군왕조시대의 첫번째 임금인 "왕검"으로 보았으며, 단군"왕검"이 나홀로 깨우쳐, 신선이 되어, "나반"(아방, 할아방)의 이름으로,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인 "하느님(칠성님)신앙"과 결합하여, 삼신의 한분으로, ​삼신각에 모셔진 것이라 한다. (육당 최남선~문인이며, 작가, 언론인, 사학자인데, 잡지 "소년"을 창간.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민족대표33인중의 한사람. 출옥후 친일행위의 행적이 있음)

​​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16나한(아라한의 준말. 깨달은 성자) 중의 한 분인, "빈도로 존자"로 보고 있으며, “빈도로 존자”는 과거세에, 석가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나홀로 깨우쳐 삼명통(전생을 보는 숙면통, 미래를 보는 천안통, 현세의 번뇌를 끊는 누진통)과 자신과 함께, 남도 이롭게 할수 있는 “자리이타”의 능력을 갖추고, 미륵부처가 오기전까지 중생을 교화하며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 준다는, “존자”라 말한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16나한의 한분인 "빈도르 존자"로 보는 데, "나반"이라는 말과 "빈도르"라는 말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중앙박물관에 모셔진, 고려시대 "금동 빈도로 존자상" 또한 그 복장이 우리 민족의 복장이므로, 우리고유의 민족종교인 선교의 불교 흡수임을 알수 있다

 

위, ①, ②, ③처럼, 3가지 설이 있는데, ["빈도르 존자"는 불경에서, "나한"("깨달은 성자"라는 뜻의 "아라한"의 준말) 중의 한 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민족 고유한 신령님의 이름은 "나반"입니다. 설사, "빈도르 존자상"이 고려시대 성자의 모습을, 한민족 복장으로 표현 했다 하여도, "나한"과 "나반"은 전혀 다름니다. 빈도르 존자는 "나한"이므로, "나한전"에 모셔야지, 삼신각에서 신령님의 이름인 "나반"을 "나한"으로 치부하여, "나반존자"를 "빈도르 존자"로 모실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한민족 최초의 인물인 "나반"이라는 한웅, 단군의 최초 임금인 "왕검", "빈도르존자"인 "나한"이라는, 3가지 설이 있지만, 영험이 아주 크다고 알려진, 하느님(칠성님), 신령님(나반존자), 산신님의 "3분"을 모신, 삼신각이나, "신령님(나반존자)"을 모신, 독성각(천태각)은, 중국 일본 어디에도 없고, 우리나리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전각이다. 특히, "독성님"으로 불리기도 하는, "나반존자"(신령님)는, 불교경전에도 "나반존자"라는 이름이 나오는 곳이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한민족 고유한 이름입니다("나반"은 아버지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아방"의 한자식 표현/아방, 할아방). 

 

산신님과 산신제 ~산신제는 고대사회로부터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대규모 제천의례에 그 뿌리가 있다.

산신은 근엄한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선녀나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신은 산삼과 불사약을 들고 있어, 아픈사람을 회생시킬수있는 능력자로 상징되고, 인간세상을 오갈때 사용되는 부채를 들고있어 그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자에게는 산삼과 영지가 들려 있고, 선녀에게는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꽃이 들려있기도 하다. 호랑이는 영험(영검)을 소유하고, 언제든지 인간으로 변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령한 변화와 개혁, 기술성, 생산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주위의 소나무는 음양오행의 "목"으로, 해가 뜨는 동방을 상징하여 시작과 솟음을 상징하는데, 그 소나무 사시사철 푸르름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매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나라에서는 기우제를,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내왔다).

 

불교의 전래 ~①고구려~소수림왕 2년(372년)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의 승려 “순도”가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고, 그 2년뒤 승려 “아도”가 진나라부터, 고구려에 왔다. 374년 아도는, “이블란사”와 성문사(초문사)를 창건하였지만, 현존 하지는 않는다. 하며, 고구려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은 “아도”가 381년에 창건한, 강화도 “전등사”이다 ②백제~침류왕 원년(384년) 진나라에서 온,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함. 384년 인도승려 마라난타는 영광 “불갑사”와 나주 “불회사”를 창건하여, 백제에서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사찰이 되었다.

 

③신라~눌지왕(411~457)시절, 육로를 통하여, 고구려 승려인 “묵호자”와, 고구려에서 온, 동진의 승려 “아도”가 불교를 전파하였지만,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도”가, 눌지왕시절에 창건한, 구미 “도리사”는, 신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존하는 사찰이 되었다. 현재,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수행했다는, 좌선대가 있다. 그후,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로, 순교 이듬해인, 527년(법흥왕14년)에 국교로 공인하였다. 

 

④ 가야 ~고려시대에 쓴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해(금관)가야의 “김수로왕”(42년.3.16 ~ 199년.3.23. 향년 157세로 사망함)때, 인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후, 김해 가야의 왕후가 된, “허왕후”와 그 오빠인 “장유화상”에 의해, 이미 해로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 되었다 한다(장유화상은, 김해시 “장유”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러므로, 가야불교는 육로의 삼국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 시절에 지은, 밀양 “만어사는 김수로왕 당시에 창건했다고 한다. 또, 밀양 “부은사는 가야 2대왕인 “거등왕”이 아버지 수로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하동 “칠불사는, 김수로왕의 7왕자가,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스님이 되어, 2년만인, 103년8월 보름날, 모두 성불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칠불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사찰이라고 한다(영험한 문수보살기도처 참조) . 하동 “칠불사”에는, 통일신라시대 때 건축한, 불을 한번 때면 100일간, 그 온기가 지속된다는 "아자방"의 “신라식 온돌”이 유명하다(경남지방유형문화재 144호). 그러므로, 밀양 만어사, 밀양 부은사, 하동 칠불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후, 김해(금관)가야는 532년에 멸망하였고, 나머지 여러 가야국들도 555~562년 사이에 멸망하여, 백제 또는 신라에 흡수되었다.

 

* 불교에서민족전통 종교인, "선교'를 수용~ 불교는, 기존 종교인, "선교'를 수용하여, "하나님", "나반존자", "산왕대신" 3분을, 사찰의 "삼신각"에 모시게 되었다. 민족종교, 선교를 수용하면서, "하나님"(칠성님)을, "칠성부처님"이라 호칭하며, 부처님 모습으로 모시게 되었다. 불교가 전래되자, "단군신화"에는, 단군을 "제석환인"이라 표기하였다. 즉, 하나님 아들인, 한웅과 단군 “왕검”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불교에서 “제석천왕”이므로, “단군신화”에는, 민족의 하나님인, 단군 “왕검”을 묘사할 때,. “제석환인”(제석하나님) 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 내용~①일차, 빛과 어둠을 만들어, 낮과 밤을 구별하게 함 ②일차, 하늘의 뚜껑인 "궁창"을 만듦(숫자 “하나”신이, 궁창을 열고 닫아, “비”,”눈”이 오게 함. 지구를 평평하게 생각/욥기) ③일차, 땅과 바다(즉, 지구) 그리고 풀과 식물을 만듦 ④일차, 태양과 별, 달을 만듦 ⑤일차, 새와 짐승을 만듦 ⑥일차, 사람을 만듦. 총 6일동안 창조를 했다 주장함.

 

즉, 자칭 창조신이라 주장하는 야훼신은, 태양을 창조하기도 전에, 먼저 빛이 있으라 하여, 낮과 밤이 먼저 존재되도록 하였다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태양없이 낮과 밤이 존재하는가? 우주선이 날라 다니는 지구에 "궁창"이라는 뚜껑이 있는가? 또, 태양을 창조하기도 전에 광합성하는 식물이 먼저 존재할수도 있는가? 또한, 땅과 바다(지구)는 태양의 혹성인데, 상식적으로, 혹성인 지구를 태양보다 먼저 창조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지구를 둘러싼 하늘의 모든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생각 즉,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주장인 천동설입니다. 성경에는, 태초 허공의 “무”에서 “유”로, "지구”를 어떤 방법으로, 창조"했다는 내용은 없고, 이미 존재하는 지구에, "땅과 바다"를 창조하고, 식물들을 창조한 후, "나중에" 태양과 별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 즉, 기존의 지구에서 식물을 창조한 후, 태양과 별, 달을 창조했다는 것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천동설"을, 설명하는 내용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천동설을 말하는 야훼는, 절대로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이런 “야훼”를, 십계명 3조를 위반하며, 유일신이라며 숫자 “하나"로, 번역하여, 숫자 ‘하나’님이라 부른다. 카톨릭에서도, 숫자 ‘하나’의 표준말이라며, 숫자 ‘하느’님이라, 부른다. 이런 행위는, 한민족 하나님과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속임수”에 해당하는 사기이다. (“빅벵설”의 모순으로, “창조설”이 진리가 된다는 것은, 속임수이다)

 

아담이 최초인류인가? ~최초 인류로서, (지구를 창조하지도 않고)지구에 존재하는 진흙을 이용하여, 야훼신과 닮은 모습인, “아담”(남자)을 흙으로 창조하고, ①“아담”의 갈비뼈로, 여자 “이브(하와)”를 창조하였다 한다(남자 갈비뼈가, 여자보다 적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②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에덴동산에서 좇겨나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다(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2사람뿐인데, 농경생활은 불가능하다.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농기구도 없이, 수렵생활을 했다고 해야 맞음) ③​"가인"과 "아벨"이라는 두아들을 낳았는데,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한다. 야훼신이, 살인자 "가인"을 해치는 사람은 7배의 벌을 주겠다 약속하였다 한다(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단 3사람뿐인데, “가인”을 해칠 사람도 없다. 그런데 누구에게 7배의 벌을 주겠다는 것인가? 거짓말이다). ④“가인” 아내를 맞이하여, "에녹"을 낳았다고 한다(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단 3사람뿐인데, 갑자기 아내는 어디서 나타났나? 이것도 거짓말이다).

 

→ 즉, 이것은, 다른 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성경은, "아담"이,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을, "암암리"에 자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군의 자손"이, 슈메르 창조신화를 "복사"한, 성경의, 유대민족 자손이 될 수는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 나아가, 성경은, 땅위에서, “생명체를 창조한 후에”, 태양, 별, 달을 창조했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천동설”에 의한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땅위에서”의 생명체 창조하고, 나아가, 우주창조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땅위에서 생명체를 창조한후, 태양과 별을 창조했다는 의미는, 지구를 중심으로, (땅위에서 두발을 딛고) 천동설에 의한 우주창조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 “허공”에서 “무”에서 “유”의 우주창조가 아닌, 지구위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성경은 “지동설”을 부정한다).

 

"갈릴레오"와 천동설, 지동설~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최초” 주장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후,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지지했다. “성서의 천동설”에 위배되는,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갈릴레오"는,1633년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파문되어, 죽게 되었지만, 교황에게 참회하고, 목숨을 구걸하여, 결국, 죽을 때까지(1642년), 가택연금되었다. 1992년 교황 바오로2세는, 갈릴레오의 파문을 철회하였다. 파문은 신학자들이, 성서(천동설)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확신한,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그러므로, 교황은, 성서가 천동설임을 인정하였다)

 

기독교를 한국에 전도하면서,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번역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계명 3조를 위반"하면서, "야훼(여호와)"라는 고유명사를, 숫자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에 대하여, 언드우드등 서양의 선교사들은 반대하였지만, 그 종교의 전도 편의를 위해, 한민족의 하나님과 “착각을 유도”하기 위해, 유일신이라며, 숫자 “하나”, 즉, 숫자 “하나님”으로, 이름을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외국에 나가서, “야훼” 또는 “여호와”의 “이름을, 십계명3조를 위반하며, 숫자 “하나”로 번역하여, 숫자 “하나님”으로 부르면,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누구도 고유명사인, 자신의 "이름을 번역하여 부르면" 좋아 하지 않습니다. 멀쩡한 고유명사를 두고, 유일신이라며, 숫자 1은 "하나"라는 구실로, 야훼신을 숫자에 불과한, 머리도 생각도 없는 무생물의 숫자 "하나", 즉 "1"님으로 부른다면,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 3조 위반으로, 야훼신의 명령에 따라, "돌에 쳐맞아 죽게" 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십계명 3조 위반으로, 돌에 쳐 맞아죽든 말든, 전도와 부흥을 위하여, 가짜 하나님을, 한민족의 진짜 하나님인것 처럼, "한민족 정체성을 훼손"하며, 고유명사를, 숫자 "하나님"으로 번역하여 부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십계명3조를 위반하며, 이름을 번역한 “가짜 하나님”인데, 지동설이 아닌,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천동설”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는, 가짜 “창조주”이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며, 누구든, 유일신, 숫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유지만, 이름을 숫자로 번역하여 부르면, 기도하다가, 십계명3조위반으로, "돌에 쳐맞아 죽을 수"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겠지요?).

 

“종교의 자유” “속임수”는 엄연히 다르지요?

“종교”라는 말에서, 종(宗)이라는 글자는, 宗은 세상의 근본이치와 뿌리를 말하므로, ​즉, 종교는, "세상의 근본이치"를 가르치는 것, 이것이 종교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말하는 근본 진리는, 어떠한 세상이 와도, 시대가 바뀌어도, 어떻게 과학이 발전해도, 세상의 근본 이치이므로 만고의 진리여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종교적 진리가 계속 바뀌고 변하는 종교를 宗(종)교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종교에서 말하는 근본이, 차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여,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사람들을 속여 왔다는, "속임수"에 해당할 뿐입니다.

 

성당과 교회에서 저지르고 있는 "대국민사기극" 중에서, 핵심 "3대 속임수"는,

 

① 성경의 “야훼”라는 창조주는, 슈메르신화를 복제한 “복제품”으로,

“지구”에서, 땅과 바다, 식물을 창조한 후에, “태양과 별, 그리고 달”을 창조했다는, 천동설을 말하는, "가짜 창조주"이다. 천동설을 말하는 야훼는, 절대로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이런 “야훼”, "god"를, 유일신이라며 숫자 “하나"로, 번역하여, 숫자 ‘하나’님이라 부른다. 카톨릭에서도, 숫자 ‘하나’의 표준말이라며, 숫자 ‘하느’님이라, 부른다. 이런 행위는, 한민족 하나님과 “착각을 유도”하기 위한, “속임수”에 해당하는 사기이다(또한, 이름을 번역하면 십계명 3조위반으로 처벌대상)

② 성경에 있는, 예수는, 중동신화를 표절한 “복제품”으로,

“예수”의 행적이나, 처형, 사망에 대하여, 예수시절에 기록된, 고대사의 기록은 전무하다. 예수의 존재와 그의 행적,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유명세를 떨쳤으므로, 예수의 행적과 기적에 대한 기록이, 로마 역사에도, 당연히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의 행적과 기적, 십자가 처형, 부활승천에 대하여, 이집트 “호루스”신, 페르시아 “미트라”신과 그 내용이 똑같다.

역사기록에 없다는 것과 예수의 행적과 기적이 똑같다는 것은,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닌, 중동신화 “복제품”라는 뜻입니다. 복제품이므로,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일이나, 사망일이 없고, 예수의 탄생일은, 313년 로마황제가 결정했고, 예수 사망일은, 325년 카톨릭공의회에서 결정하여, 예수가 실존인물처럼 조작된 “속임수”에 해당하는 사기.

③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죽은 자가 “육신부활”하여 이루어 진다는, 실현 불가능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성경의 구약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지만, 성경은, 인간 죽음 뒤의, 영혼(귀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귀신은 천사의 변심인 “마귀”라 말한다. 사람은, 육신과 함께 영혼도 소멸되므로, 저승세계가 없고, 저승세계가 없으므로, 제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은뒤의, 귀신을 부정하여, 사후세계가 없고, 사후세계가 없으니, "천국과 지옥"도 없다.

유대교가 인정하지도 않는 신약에서, 종말의 시기에, 중동신화 ”복제품” 예수가 하늘에서 “천국의 성”을 가지고 내려올 때, 모든 죽은자의 시체가 벌떡일어나는, 실현 불가능한 “육신부활”을 하고, 그때 “심판”받은 시체들이, “천국의 성”에서 사는 것을, “천국의 구원”이라 주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은 “육신부활”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속임수”에 해당하는 사기일 뿐이다.

성당과 교회는, "대국민 사기극"을 그만두고 양심고백해야 합니다.

 

* 사찰의 삼신각(선교)~ 가운데 - 칠성님(하느님, 칠성하느님, 칠성부처님), 좌측에 -신령님(나반존자, 독성님), 우측에-산신님(산왕대신님)을 모심. 삼신각에 계시는, (일곱분, 칠여래의 증명을 거친) 주불인, 한민족 “칠성님”(하느님)을,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북극성)라 한다. “칠성님”(치성광여래/하느님)은, 무병장수와 자손번창을 상징하므로, 불교에서는, “약사불”처럼,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그리고, “칠여래”가 증명하고, 호위를 하고 있는, 후불 탱화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신각 또는 칠성각에 모셔진, 칠여래가 증명하는, 하나님, 즉, “치성광여래”는, 무병장수와 자손번창을 상징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는, 약사여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북극성 하나님의 거처는, 칠성궁이므로, 칠성님이라 부른다. 후불탱화로, 치성광여래(북극성, 하나님)+칠여래+약사역활의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의 “십존불”을 그리기도 한다)

 

사찰의 삼신각(삼성각)의 절하는 순서는, ①제일처음, 가운데(사찰에 따라, 제일 우측에 모시기도 함)에 계신 칠성님(하나님, 하느님, 칠성하나님, 칠성부처님)께 ② 두번째로, 신령님(독성님, 나반존자님) ③ 세번째로, 산신님(산왕대신님,산신령님)의 순서로 각각 삼배를 올립니다/ 기도는, 각 삼배 올린 후, 본인이 원하는, 칠성님(하나님), 독성님, 산신님앞에서, (해당 기도문이 비치되어 있으면, 읽은 후), 발원→ [①정근(염불, 명호를 적정시간 반복), ②108배(7배, 21배, 108배 또는 그 이상)]의 ①, ②중에서 선택 실시→ 발원→ 삼배.

 

1) 칠성부처님(천선, 하느님) ~ 인간의 생명과 수명(출생과 사망), 자녀와 가족을 위한 기도. 수명이 짧다는 사람은 실타래를 올려둠. 삼성각 또는 칠성각에서 기도하며, "칠성님","하느님","칠성하느님", "칠성부처님", "칠성성군님", "칠성별에 계시는 하느님",이라 부름.

 

알려진 영험한 칠성기도처 ① 경남 통영(고성) 벽방산 의상암 칠성각 ② 태백시 태백산 망경사 천제단 ~ 사찰 10분 거리의 태백산 정상에, 칠성하느님의 "천제단"이 있다. 문수보살의 창건 설화에 의한 문수보살 기도처 이기도 하며, 단종비각과 함께 단종이 산신이 되었다는 "산령각"도 있다 ③ 서울 옥수동 미타사 칠성각 ④ 무주 북고사 칠성각 ⑤ 여수 은적사 칠성각 (여수 돌산도에 있는, 이름처럼, 조용하고 편안함이 있는 “은적사”는, 1195년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⑥ 광양 중흥사 칠성각  장성 백양사 칠성전 ~ 최고의 수행처로 알려진 백양사 운문암에 계시던 영험하신 칠성님을, 백양사 칠성전으로 옮겨 모셨다고 합니다. 백양사 칠성님은 너무 영험하여, "칠성각"이 아닌, "칠성전"이라며, 그 전각의 이름을 높여서 붙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백양사 인근의 약사암과 영천굴은 영험한 약사기도처로 알려져 있다(영험한 약사기도처 참조). 등

 

* 서울 옥수동 종남산 미타사(7개의 암자로 구성된, 천년 고찰 비구니 수행사찰)~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서, 신라 진성여왕2년(888년)에 “대원”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창건된, 천년역사를 간직한, 전통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이다. 당초 금호동 부근에서 창건되었으나, 고려 예종10년(1115년)에, “봉적”, “만보” 두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옥수동으로, 자리를 옮겨, 극락전을 건립 후, “담진”국사로부터 “미타사”라는 사명을 받았다.

 

미타사는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운집하였고, 각 비구니 스님들은, “미타사” 내에서, 각기 암자를 건립하게 되는데, 현재는 “미타사”내에서, 7개의 암자가 함께 존립하고 있으며, 불교 전통적 대중 공의 제도로 운영되는, 각 암자가 붙어 있는, 서울의 특별한 형태로 운영되는 전통사찰이 되었다.

 

비구니 전통 천년 사찰인, “미타사”에 들어서면, 우선, 아미타불을 모신 “천불전”과 “미타유치원”을 만난다. 길을 올라 가면서 ① 우측에, 대웅전이 있는 “용운암” ② 길을 올라, 우측, 미타사 종무소가 있는 뒷편에 “관음암”이 있다. 관음암은, 조선 24대 현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보시로 건립된, 관음전과 그 맞은편에 극락전이 있으며, 그 옆의 독성각으로 구성되어 있다(극락전과 독성각의 2전각은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극락전과 관음전의 9개 탱화, 월인석보 서적, 복불 장신구등 6구도,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길을 올라 가면서, 좌측에 ③ 정수암(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복장유물과 법복등 8점이 있다). 우측에 ④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있는, 금수암(산신도, 치성광여래도등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있다). 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⑤ 대웅보전이 있는 금보암(서울시 지정문화재로, 금동관음보살좌상 1점이 있다). 길을 더 올라가면, ⑥ 영험한 칠성각이 있는 칠성각(암자이름이, 칠성각인데, 별도의 산신각도 있다. 칠성각 안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2보살, 그 우측에 치성광여래도, 좌측에 칠성여래(아미타여래회도)와 그 앞에, 칠성을 상징하는 “천신”을 모셨다(신중도와 치성광여래도등 3점이 서울시 지정문화재).  

 

골목 끝 부분에, ⑦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있는 대승암(이곳의 관음보살삼존도, 아미타여래삼존도등 2점은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계종 옥수동 미타사는, “미타사 용운암”, “미타사 관음암”, “미타사 정수암”, “미타사 금수암”, “미타사 금보암”, “미타사 칠성각”, “미타사 대승암”의 7개 암자로 구성된, 각 암자가 붙어 있는, 천년 고찰 비구니 전통사찰이다.

 

3대 “비구니” 참선도량 ~①지리산 산청 대원사, ②수덕산 예산 견성암, ③가지산 언양 석남사. 그외 유명한 비구니 사찰은, 청도 운문사, 서울 북한산 승가사, 서울 북한산 진관사,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와 도봉산 원효사, 서울 옥수동 미타사(7개암자), 서울 보문동 보문사(보문종), 보문동 미타사, 수원 광교산 봉녕사, 용인 화운사, 용인 법륜사, 수원 청련암, 대둔산 법계사, 공주 계룡산 동학사, 진천 보탑사, 정원이 아름다운 산청 수선사, 대구 서봉사, 김천 청암사, 안동 유하사, 영험한 울진 불영사(사찰음식), 청양 안심사, 장성 백양사 천진암(사찰음식 대가인 정관스님 주석), 완주 위봉사, 완산 정혜사, 등등 전국에 “비구니” 사찰은 수없이 많이 있음.

 

2) 신선(신령, 나반존자,독성, 홀로 깨친자) ~학업,취업등 기타 일반 소원성취기도. 나반존자(신령님)을 별도로 모신 전각을 "독성각" 또는 “천태각”이라 함. 삼성각 또는 독성각(천태각)에서 기도하며, "나반존자", "천태산 나반존자"라 부르며, 공물은 쌀등 일반적 공물 뿐만 아니라, 생수, 사탕, 빵등을 올리기도 한다. 나반존자는 영험이 아주 크지만, 엄격하여 기도시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예의를 깍듯이 갖추어야 한다고 함.

 

삼신각의 삼신중에서 나반존자(신선,신령님)을 모신, 독성/신령님전에는 매년초에 인등을 접수받아 밝힘(월5천원정도), 부처님 오신날(음4.8일)에는 연등을 밝히는데, 1~3일간 밝히는 일일등(1~3만원정도)과 1년동안 각법당에 밝히는 1년연등(각 법당에 따라 5만~15만원정도)이 있음.

 

알려진 영험한 독성기도처  서울 수유동 삼성암 독성각 ~ 삼각산(북한산) 삼성암은, 수유동 화계사의 산내 암자이다. 수유동 삼성암의 "나반존자" 독성님은 너무 영험하여, 13편의 영험설화가 수록된, "삼성암 영험설화"라는 책자까지 발간되었다. 13편의 영험설화 중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일제시대때인, 삼성암의 주지인 지월스님의 외가 친척인 임선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인 수동이가, 자라면서 등이 앞뒤로 점점굽어 곱사등이 되었다고 한다. 이말을 전해들은 스님은, 어렵지만 삼성암에 데리고 와서 100일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일반 병도 아니고 신체의 불구를 기도로 낫게한다는 희안한 발생에 모두들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동이의 결심과 의욕이 대단하여 지극정성을 다해 100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도를 마치는 날, 꿈에 나반존자(신령님)가 나타나 수동이의 몸에 앞뒤로 신령한 침을 놓았는데, 그 이후로 점점 몸이 나아져 결국은 수동이의 꼽추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1926년도에, 서울 신촌에 사는 김윤기라는 사람 아버지인 김치중이라는 사람이, 10여년동안 신경통을 앓아 고생이 심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 김윤기씨가 전국의 여러곳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여러곳에 알아 보았는데, 어느 90먹은 도사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의 병은 불치병으로 고치기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단, 한가지 병을 고치는 방법은 산삼을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냥 산산이 아닌, 동자산삼을 먹어야 낫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실망한 김윤기씨는 마지막으로, 삼성암의 독성전에 기도를 해보기로 하였다한다. 칠칠기도(49일)를 올리기로 하고, 지극정성의 기도를 하였다한다.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에, 독성님(신령님)이 현몽하여, "너의 정성이 가륵하구나, 하지만 나는 동자 산삼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나의 친구인 불암산 산신에게 빌려서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러니 너는 내일 아침 일찍이 독성각에 들리거라"라는 현몽을 꾸었다한다. 김윤기씨는 그 다음날, 독성각 쟁반위에서 동자산삼을 얻게 되었고, 그 아버지는 90여세까지 무병장수하였다한다.

 

ⓒ종로구 충신동에 사는 황명휴씨는 1955년 3월, 내년에 있을 한의과시험이 걱정되었다한다. 그래서 삼성암 독성각에서 50일간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한다. 기도가 끝난 뒤,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검은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함께 어디를 가자며 이끌었고, 그곳은 시험장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험을 치고 있었고, 칠판에는 시험문제가 쓰여 있었는데, 동자가 세번째 문제를 똑바로 알아 두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세번째 문제는 사람의 내장에 관한 소화기문제였다고 한다. 그후, 밖으로 나간 동자는 사라지고 없어지는 꿈이었다고 한다.

 

소화기문제는 양의학 문제이고, 이 시험은 한의과 시험이므로, 황명휴는 1년을 두고 사람의 소화기에 대하여 집중공부하였다. 이듬해 시험장에서, 첫번째, 두번째 문제는 일반적 한의학 문제였지만, 세번째는 꿈에서 본것과 같은 소화기문제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1,2번 문제는 대략 잘썼지만, 3번째문제는 대부분 답을 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당시 시험의 채점관은 채대식박사였는데, 채박사가 비서를 시켜 황명휴를 불러, "당신은 어떻게 하여, 양의학공부까지 하였는가?"라고 물었다한다. 황명휴씨는 자초지종을 말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청도 사리암 천태각 ~ "사리암"은, 청도 "운문사"의 산내암자이며, 비구니사찰이다. "사리암" 천태각 나반존자님은, 영험하기로 아주 유명하다.

ⓐ청도 사리암의 천태각뒤에는 조그만 굴이 있는데, 그 굴에서 기도하면서 기거를 하면, 기거하는 사람의 수만큼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어느날, 쌀이 더 나오게 하기위하여 굴을 조금더 크게 팟다고 한다. 그후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리암의 "사리"는 부처 사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삿된 것으로부터 멀리한다는 사리(邪離)의 뜻이라 한다.

 

ⓑ조선의 고종황제가 심열로 고생하였는데, 청우스님이 사리암에서 100일기도를 주관하게 되었고, 100일 기도중, 꿈에 선인이 나타나서 임금의 머리에 침을 꽂아 주었고, 그 이후에 깨끗이 나았다는 것도 수많은 영험사례중의 하나라 한다. 1900년 고종의 황태자 순종이 중병에 걸려,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기도를 요청하였다. 이에 월초스님은, 청도 운문사 사라암에서 100일간 나반존자 독성기도를 올렸다한다. 80일정도 되는 날, 늙은 승려가 꿈에 나타나,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한다. 이에 감복한 고종이 월초스님 소원을 물어, 서울에 있는 퇴락한 수국사의 중창을 하게 되었다 한다(수국사는,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우리나라 유일 "황금사원"이다. 본 블로그 "기타 아름다운 사찰"부분 참조)

 

ⓒ사리암에 자주들린다는 사람이 쓴글에 의하면, "사라암이 기도를 잘받고, 한가지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소문을 들은, 어느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리암에 오면, 하루에 3천배를 하여 3일간 모두 만배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사람 사업이 너무 잘되었고, 너무나 잘되어 자신의 식사할 시간마져 없었다고 한다. 하도 손님이 많이오니, 어느날, "나반존자님, 이제는 옆집에도 손님좀 보내주세요"라고 하였다 한다. 그 이후로는 손님의 발길이 신기할 정도로 딱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후, 사리암에서 그 사람을 다시 보았는데, 그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절을 하지만, 아무리 절을 해보려해도, 힘이 들어 못하게 된다고 한다. 옆에서보는 사람이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나반존자(신령님)는 엄격하고 성격이 급하신 분이지만,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줄때는 확실히 들어 준다고 한다. 사리암의 영험에 대하여는 부산,경남지방에 많이 알려져, 매 주말에는 경남 각처에서 철야기도를 위하여 버스가 온다고 하며, 매월 초에는 서울 조계사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있다고 한다.

 

 합천 희랑대 삼성각(전각에 칠성, 독성,산신의 3분이 계심에도 영험하다 하여, 삼성각의 전각이름을 독성각으로 이름을 바꿈) ~신라말 "희랑"이 창건한 곳으로, 나반존자에 기도하여 부자가 된 이야기, 나반존자가 현신하였다는 설화등이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실제 고승모습인, 희랑대사 좌상을 조각한 옻칠 목각의 국보 333호 "초상조각"이 모셔져 있다

 

 경산 불굴사 홍주암 ~ 원효대사가 최초 수행한 "원효굴"이 영험 독성기도처이며, 김유신도 여기서 기도하여, 삼국통일의 비법을 받았다는 곳이다. 일출의 명소라 하여, 태양을 상징하는 홍주암이라 칭하였다 함 ⑤ 묘향산 중비로암 독성각  속초 설악산 계조암 삼성각~계조암의 삼성각은 영험한 독성기도처이며, 석굴은 나한기도처 ⑦ 도봉산(오봉산) 석굴암 나한전~ 삼성각이 아닌, "나한전"에 모신, 나반존자는 생식을 하므로, 스님이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5년, 기도를 의뢰한 신자 3사람이 의구심을 나타내자, 존자께서 몸에 생살을 붙여 보이므로서, 의구심을 떨쳐 냈다는 영험으로 유명한 나반존자 기도처이다(영험한 관음보살 기도처 부분~ 도봉산 3개의 석굴암 부분 참조), 등

 

3) 산신(산신령, 산왕, 산왕대신)~ 사업이나 장사를 하시는 분 사업성취기도. 산신기도는 소원 성취가 빠르다하여, 사업번창, 취업 및 진급, 부동산등 매매 및 학업성취, 건강을 바라는 사람들이, 각 사찰에서 자주 산신기도(각 사찰마다 다르지만 보통 매월 음16일)를 많이 하여 왔습니다. 삼성각 또는 산신각에서 기도하며, "산신님","00산 산신님","산왕대신님',"00산 산왕대신님'이라 부르며, 공물은 쌀등 일반적 공물 뿐만 아니라, 생수, 사탕, 빵, 그리고 생식할수 있는 오이,당근,미나리를 특히 좋아한다고 함. 산신이 데리고 있는 애기동자는 사탕을 좋아 한다고 합니다.

 

알려진 영험한 산신 기도처① 공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산신각 ~중악단 산신각(보물 1293호)은 한국 제일의 산신기도처로 알려 있다. 원래 조선왕실 3대 산신 기도처가 있었는데, 묘향산 "상악단", 지리산 "하악단"은 모두 소실되고, 계룡산의 "중악단"만 유일하게 남았다 ② 서울 우이동 용덕사 산신각 ~도선국사가 창건한 용덕사의 산신각은 용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있고, 용이 물고 있다는 여의주에 해당하는 바위에는, 도선사 마애불과 부부 마애불로 알려진 "약사여래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이 용덕사의 산신님은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산신님이 하산하는 날이라고 하는, 매년 음력 3월16일에는 서울 강북구청 후원으로 "우이동 삼각산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이름이 같은, “용인의 용덕사”에는 영험한 용굴이 있다. 이 블로그 중, 나한기도처 참조).

 

③ 태백시 태백산 망경사 ~단종비각과 함께 단종이 산신이 되었다는 "산령각"이 있다. 망경사는 사찰에서 10분거리에 있는 태백산 정상의 칠성하느님의 "천제단"도 있으며, 문수보살의 창건 설화가 있는 문수보살의 기도처 이기도 하다 ④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 ~영험한 산신 기도처 이기도 하다 ⑤ 양산 영축산 통도사 자장암 산령각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수행한 자장암은, 금개구리에 대한 설화가 있는 "금와공 바위"가 있다. 자장율사가 법당뒤 석간수가 나오는 곳에,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는 데, 이 금개구리가 벌, 나비, 거미 등으로 변하여, 암자 곳곳에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금개구리는 특별한 날에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는 그 모습을 보인다하여, "금와보살"이라 부른다 한다 ⑥ 삼척 두타산 천은사 삼성각  대구(경산) 팔공산 선본사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 보물431호)~약사불로 알려졌지만, 영험한 산신기도처로도 알려 짐. 

 

⑧ 청송 주왕산 주왕굴(산신각)~중국 진나라때, 자칭 주나라 주왕이라 부르던 반란군이, 신라까지 쫓겨와서, 신라의 마장군에게 죽은 후,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와 함께,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는 영험한 산신기도처.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청송 주왕산 국립공원은, 폭포와 기암절경, 단풍관광지로 유명하며, 인근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저수지인 "주산지"가 있다.  영동 백화산 반야-사 산신각~ 영험한 문수기도처로도 알려진 이곳 사찰의 뒷산은, 호랑이 형상의 너덜지대가 있는데, 이 호랑이가 산신으로 화현하여 있다는, 산신각은 영험한 산신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강원 고성(속초) 금강산 화암사 삼성각~ 미시령인근에 있는, 화암사의 미타암(전)은 영험한 “지장보살 기도처”이고, 화암사의 삼성각은 영험한 “산신기도처”로 속초에서 유명하다(자세한 내역은, 위, 영험한 지장기도처 ⑧번 참조) 북한산 보현봉 평창동 산신각(불교 소속 사찰이 아닌, 마을에서 조성한 독립된 영험한 산신각) 등등

 

삼신할머니 ~고래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수명(출생과 사망)을, 주로 관장하는 데, 생명과 수명을 관장하므로, 성모님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애기를 점지해 준다는 삼신할머니를 데리고 있는데, 삼신할머니에 대하여는 2가지 설이 있다.

 

①삼신할머니의 "삼"은 포데기를 싼다는 뜻의 말인데, 이 "삼"의 원뜻은 인간의 생명탄생과 수명을 의미하는 포데기로서, 이 포데기를 뜻하는 "삼"의 삼신할머니이다. 즉, 애기를 점지하라는 (인간의 출생과 사망을 관장하는)칠성하느님의 명을 받고 이를 이행하는 포데기할머니 신을 말함. 사찰의 삼신각의 칠성님과 신령님전에는 수명연장을 의미하는, 실타래를 놓아두기도 한다.

 

②삼신은 원래 산신(産神)을 뜻하는 말인데, (피를 만드는 할머니, 뼈를 만드는 할머니, 출산을 돕는 할머니)3분 할머니가 애기를 점지하고 출산을 도우라는, 천선인 하느님 명을 받았기에, 3명 할머니라 하여 삼신할머니라 함.

 

선녀(仙女) ~선녀는 천선인 칠성하느님의 궁녀인데,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며 춤과 음악에 능하다고 한다. 선녀는 머리 좌우에 높은 2개의 고리가 달린 모습의 혜어스타일을 하고, 직녀가 만든 바늘질 자국이 전혀없는 아주 부드러운 날개옷을 입고 있는데, 목욕을 특히 좋아하여 가끔씩 지상에 내려와 아무도 없는 곳인, 선녀탕에서 목욕을 한다고 함. (선녀와 나무꾼의 설화가 있음)

 

견우와 직녀 ~견우(소를 몰고 밭을 가는 목동, 여름철 남쪽방향으로 볼때 왼쪽 아래편인 즉, 남동쪽에 있는 독수리 자리의 "알타이르"라는 견우성. 한편 조선태조때인 1395년에 만들어진, 별자리 석각본으로 국보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민간에서 견우성이라 말하는 "알타이르"라는 별은 은하수의 범람을 관리하는 하느님 궁전의 하천관리청의 별이고,"알타이르"별보다 조금 아래인 염소자리의 "다비흐"별을 공식적인 견우성으로 표시하고 있음)와 직녀(베를 짜는 여인, 여름철 남쪽방향으로 볼때 왼쪽 윗편인 즉, 북동쪽에 있는 거문고의 자리 "베가"라는 직녀성)는 서로 사모하였다.

 

직녀는 하느님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 하였는데, 하느님이 무척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목동인 견우와 혼인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견우와 직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려 졌고,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아 1년에 1번, 칠월칠석에만 만나도록 했지만, 둘 사이로 흐르는 은하수 때문에 그마져 만날수가 없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잘아는 까마귀와 까치는, 1년에 딱1번 음력7월7일인 칠석날에 오작교(까마귀 "오", 까치 "작"의 다리)를 만들어,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서로 만날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새벽닭이 울고, 동녘이 밝아오게 되면 어쩔수없이 이별을 하게 된다. 또다시 1년간 견우는 소를 몰고 밭을 갈아야 하며, 직녀는 베를 짜며 제각기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운명이다. 칠석기도(~음7.7일/무병장수,가내안녕발원기도,수명과 자녀를 위한기도, 인연,만남,재회기도).

 

정한수 기도 ~①새벽 4시 전후로, 마실수 있는 깨끗한 물을 사발에 담아서, 밥상(또는 장독대)에 단독으로 올린후(촛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됨), ②북향(정확히는 북극성 방향)을 향해서, 두손을 모아 기도를 합니다. ③먼저, 자신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의 용서를 구하고, "하느님 000해 주세요, 하느님 000병 낫게 해주세요, 하느님 000도와주세요"//또는 칠성님 000해 주세요"​라며, 정성들어,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적당한 시간 반복합니다. 이 정한수기도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내려 왔으며, 이 방법이 이땅의 한민족 자손에게 전하신 하느님의 가르침이며, 자신의 기원을, 하느님께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무도로 유명한 경주 골굴사

 

 

인도 종교(브라만교 → 힌두교)의 변천 요약 ~ ① 당초 인도에는, 우주 만물의 창조신 "브라만(범신)"을 믿는 "브라만교(바라문교,베다교)"가 있었음.(브라만은, 성경에서 천동설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가짜 창조신" 야훼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우주 창조신"으로서의 범신을 말함)

 

→ ② 석가는 스스로 깨달음을 완성하고, 바라문교의 바라문들과 치열한 의견을 교환하며, 굴복시키고, "불교"라는 종교를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게 됨. 즉 "불교"시대가 열림

 

→ ③ 석가 사후로부터 약 860년 뒤인, 서기 320년경, 인도 굽타왕조에서, 예전의 브라만교에, 전래 민간신앙, 전래 토속명상과 불교의 일부를 통합하여 추가하고, 창조신 "브라만"에 더하여, 질서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의 삼신을 기반으로 한 힌두교를 창설하였다. 그 후, 힌두교는, 8세기에 “샹카라”에 의해, 대승불교 사상인, “범아일여”를 받아들여, 창조신, “브라만”과 불멸의 자아인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주장했다. 또, 11세기에 가서는, “라마누자”가 “신”에 대한 대중성을 주창하며, 지금처럼 수많은 신을 섬기는 힌두교가 되었다. → 즉, 불교가 힌두교를 표절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힌두교가 불교의 일부 내용을 표절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임.

 

탑 pagoda ~석가모니가 열반한뒤, 부처의 오심을 기념하며, 부처님 사리를 보관하는 장소로서 탑이 시작되었는데, 그곳에 넣어 두어야 하는 사리가 한정적이어서, 차후에는 경전, 작은불상, 보석등 기타 상징물을 "법신사리"라 부르며, 이를 넣어두는 장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탑의 모습에는 누각식(누각처럼, 안에 들어가서 예불을 할수 공간이 있는 탑)과 밀첨식(탑의 면적을 좁게하고, 장식을 조밀하게 지어 그 안에 들어갈수 없는 구조의 탑)이 있다.

 

부처님 오신날에는, 각 사찰에서 법요식과 제등행열등을 마친후, 마지막에 탑돌이 행사를 함으로서 대중에 회향을 한후, 그날을 마무리 하게 된다. 또 평소에는, 불자 또는 민간인들이 탑돌이(시계방향 즉, 우측으로 돌게 되며, 최하 3바퀴를 돌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새며 돌기도 한다)를 하면서, 각자의 기원을 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석가모니 ~왕자로 출생하였지만, 인간의 생노병사의 고통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큰뜻을 품고,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 고행후, 35세에 득도함. 그후 45년간 설법하며 5천여권의 경전을 남기고, 80세에 열반에 드심(석가는, 전생에, 이미 완성된, “호명보살”로서,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 설법하셨고, “자비심”으로, 중생교화를 위해, 오셨기에, 쉽게 깨침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경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생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몸으로(화신), 오셨기에 당연히 “육신”의 제한을 받아, 태어남과 죽음의 고통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불교의 4대축일~①탄신일(현재 네팔지역인, 카필라왕국의 슈도다나국왕(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BC 624년 음4.8일 탄생) ②출가일(BC595년 음2.8일) ③성불일(성도일/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날, BC589년 음12월8일) ④열반일(BC 544년 음2.15일. BC 544년이 불기의 원년이 됨)

4대성지~①룸비니(네팔/탄생) ②보드가야(인도/정각을 성취) ③사르나트/녹야원(인도/초전법륜지) ④쿠시나가라(인도/선택한 열반장소)

 

(석가부처님은, "율장대품"과 "초전법륜경"에서,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합니다. 즉, 초야에 전생을 보는 숙명통을, 중야에 업과 번뇌에 따른 미래를 보는 천안통을, 후야에 번뇌의 소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누진통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삼명통에의한,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고, 더 이상 윤회가 없음도 알게 되었다 합니다. 이와같이,초야,중야,후야의 시간을 "새벽별 보고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석가 생애~ ① 탄생~ 네팔, “룸비니”에서 탄생하였다(기원전 624년 음4월8일). 석가탄생은, 네팔 "카필라"왕국, 슈도다나왕(정반왕)의 왕비인, "마야부인"이,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 오는 꿈을꾸고, 임신하였고, 관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하던 중, “룸비니”에서 (당시의 역법으로)음력4월8일(현재의 역법으로는 음력2월8일에 해당), 석가를 낳았다고 한다. 생후 7일만에, 어머니을 여의고, 이모 손에서 자랐다. 16세에 “콜리야”왕국의 공주 “야소다라”와 결혼을 하고, 아들, “나후라”(라휼라, 밀행 제일. 석가아들. 십대제자)를 낳았다. 아들이 있으니, 왕국의 후계자 근심을 하지 않고, 29세에 출가 하였다(기원전 595년 음2월8일). 이후, 그 당시 수행자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육신을 학대하는 6년간, 고행을 하였으나, 정법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고행을 그만 두게 되었다. 이때 “수자타”라는 여인은, 오랜 고행으로 인하여, 빈사상태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석가를 만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따뜻하게 끊인, “우유죽”을 공양하게 되었고, 이를 먹은 석가는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② 정각을 성취~ 인도,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성취하였다(기원전 589년 음12월8일). 석가는, 전생에, “욕계” 제3천상인, 도솔천에서, “신”과 “천인”들에게 설법하시던 “호명보살”이었는데, 중생교화를 위해, ​중생처럼 육신을 가진, “화신불”로, 이 땅에 오셨기에, 쉽게 연기론을 바탕으로, “사성제”를 깨닫고, 중도사상(공사상, 비유비무, 색즉시공)으로, “진여”에 의한, “화엄세계”를 확인하는, 득도에 이르렀다(이후 생애는,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 참조). 

 

* “깨달음”이란? ~ 삶에는 “인연과보의 법칙”이 따르는, “생멸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본래문”인, “비유비무”(중도)로 존재하는, “진여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몸소 비추어 보는 것(조견)을 "깨달음"이라 말한다. 부처님은, 세계 최초로 “진여문”을 깨우치고, “오온”을 비추어 보신 후, "이제 어둠의 세계는 타파되었다. 내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하노라.며,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곧 “중도”(비유비무 / 방법은, 존재의 본질인, 비유비무를 비추어보기 위한, 8정도)이며, 중도의 내용이 “연기”이며, 이 “중도”(비유비무)와 “인연 연기”(사성제)를 깨치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 참조).

 

불경 ~5천여권의 경전은 크게 분류하여, 아함경,방등경,반야경,법화경,화엄경등이있고, 이에 더하여, 율장 논장이 있음. 아함경에는 장아함경,중아함경,잡아함경,증일아함경이 있다. 또한, 반야경 중에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줄여서, 금강경)이다. 대장경은 부처님 가르침인 “경장”, 계율인 “율장”, 연구 해석서인 “논장”을 “삼장”이라 하고, 이런 “삼장”의 모든 서적과 주석서를, 통털어 집대성한 것을 “대장경”이라 함.

 

한편, 5장,70경,1149수의 시로 구성된, 구도자의 물음에 답하는, 지혜로운 부처님 말씀을 모은책으로, 초기 불교경전인 "숫타니파타"가 있고, 질문자 없이 부처님 스스로 설법하여 전해지는 초기 불교의 계송 중에서, 실생활과 밀접하고 인생의 지침이 될만한 좋은 게송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엮은, 2권 39품 758개의 간결한 게송들로 구성된, 부처님의 경지와 지혜를 엿볼수 있는, 초기 불교 경전으로 "법구경"이 있다.

 

불교의 발전과 경전 ~① 부처님 계실때, 최초로 결집된, 구도자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의, 지혜로운 부처님 말씀을 모은 경전이 "슈타니파타" ② 석가 입멸 직후인, BC544년에 2차로 결집된 경전이 "아함경"(남방불교에서는 이를 "니까야"라 부름) → 인도는 방대하여, 각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부처님은 주요활동 지역인 마가다국을 중심으로한, 평민언어인, "마가디어"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함경에 속하는 경전은 2천여권에 달하는 데, 암송으로 전해지다가, BC5세기~BC4세기경 사이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짐.

 

③ 석가의 입멸 100년후(BC5세기인, BC450여년경)부터, 교리해석에 따른 의견차이로, 여러 교파가 갈라졌는데, 특히 BC400년경부터~BC200년경 사이에는 크게 11개의 "상좌부"와 9개의 "대중부"등 20여개의 교파로 갈라졌는데, 이 시기를 부파불교라 한다. 이 부파불교는 출가자와 승원 중심의 방대하고 수많은 논서 중심의 학문불교였다고 한다.

 

 남방불교, 상좌부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남방상좌부에 속하는 교파가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등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상좌부계의 법장부교리는 대승불교와 많이 일치한다고 한다. 남방불교는 출가를 전제로,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에 우선적 목표를 두고 있다.

 

 북방불교, 대승불교 ~BC2세기말 경에, 불교가 교단중심의 상좌부 불교로 흐르는 것에, 반발한 대중들은, 초기 불교의 석가 가르침의 근본인, 대중과 함께 한다는 자비심과 보살행 중심의 초기불교로의 복귀해야 한다는 여망으로 대승불교가 탄생함. 자신의 수행과 함께, 중생의 고통을 배려하는 자비심으로, "타인과 함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행을 기본으로 한다.

 

→ BC2세기말에 일어난 대중중심의 3차결집으로, 대중부의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등 대승경전이 "산스크리트어"로 완성됨. → 인도의 "카니시카"왕 재위시(AD140~170년)에, 지금까지의 상좌부불교와 대중부의 대승불교등 모든 경전을 총정리하는, 4차 결집이 이루어짐. → 중국, 한국, 일본등에 전해짐.

 

원본 불경의 언어 ~ 인도는 방대하여, 각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부처님은 주요활동 지역인 마가다국을 중심으로한, 평민언어인, "마가디어"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함경에 속하는 경전은 2천여권에 달하는 데, 암송으로 전해지다가, BC5세기~BC4세기경 사이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졌다. 남방불교의 원전은 대부분 "팔리어"로 쓰여졌고, 북방불교의 원전은 대부분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음. ①팔리어(성전어)~인도 아리안 계통의 언어로, 인도서쪽지방의 일반 민중이 쓰던 언어. 스리랑카로 전해진 상좌부불교가 동남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팔리어"는 성서러운 언어라는 뜻의 성전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됨.②산스크리트(범어)~인도 아리안 계통의 언어로, 상류층이 쓰던 고상한 언어. 대중부불교가 중국등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한자권에서는 경전의 "산스크리트어"를 상류층, 천상의 언어라는 의미로 "범어"라 번역함.

 

팔만대장경 (국보32호)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자,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며 만든 대장경.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후,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준비기간을 포함하여 16년간(실제 판각은 1237~1248년의 12년)의 국가적 대역사끝에 만든 대장경인데, 그 판수가 8만1258판으로, 8만4천개의 경전말씀이 실려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이 팔만대장경은 한글자 한글자 새길때마다, 세번절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든것으로, 그 글자의 새김이 모두 고르고 잘못된 글자가 없다고 한다. 중국,거란,여진,일본의 불경까지 모두 정리하므로서, 현재 없어진 중국 북송의 대장경 내용도 담겨 있다고 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해인사 고려 대장경판"은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 대장경~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장”, 계율인 “율장”, 연구 해석서인 “논장”을 “삼장”이라 하고, 이런 “삼장”의 모든 서적과 주석서를, 통털어 집대성한 것을 “대장경”이라 한다.

 

한편,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만든, 고려때인 1010년에 새긴 대장경판을 "초조 대장경판"이라하는 데, 이에 대비하여 해인사에 있는 대장경판을 재조 대장경판 또는 해인사 고려 대장경판 이라 한다. 이 "초조 대장경판"은, 그후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에 불타버렸는데, 그 후 만든것이 팔만대장경. 이때쯤인 신라의 황룡사 9층탑도(자장율사의 건의로 선덕여왕때인 643년 건축) 1238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림. 외세에 의해 침탈당한 우리 문화재인 "외규장각 도서, 직지심체요절"에 관하여는 아래의 "하나님 하느님 에수는 누구인가?" 블로그중 "절두산(병인양요)" 참조

 

범종 ~범종의 소리는 장엄하고 청명하여,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하며, 탐진치에 물든 마음도 깨끗히 하여, 참회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지옥중생들도, 그 장엄하고 청명한 범종소리를 듣고, 참회의 마음을 가져 극락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며 울리는 소리이다. 연말에는 제야의 범종소리를 33번을 친다. 이것은 사바세계의 모든 33천(도리천) 중생들도, 제야의 이 범종소리를 듣고, 편안한 마음과 참회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에서 33번을 치게 된다. 또 "법고"는 지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목어"는 바다와 물에 사는 모든 생명체, "운고"는 하늘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일깨우기 위하여 치게 된다.

 

사바세계를 의미하는도리천(33천)은, 욕계천상의 "사왕천"다음의 하늘세계로, 욕계의 2번째 천상이다. 33천 또는 도리천이라 불리는 32천의 상위에 "선견성"이 있고, 그 선견성에, 모든 33천의 천상을 다스리는 "제석천왕"이 계신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사바세계의 하느님과 같은 역할이라하여, 불교에서는, "제석천왕"을 "사바세계"의 하나님이라 한다(→ 아래의 블로그 리스트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중, 사후세계 도표" 참조

 

템플스테이 ~규모가 있는, 전국의 유명사찰에서 대부분 실시하는 사찰단기체험을 말한다. 아무런 종교적 차별은 없고, 휴식형(공양시간외, 예불참석여부등 모두 자유시간을 갖는다)과 체험형이 있으며, 당일형(2~3만원 정도), 1박2일형(휴식 또는 체험형 5~6만원)이 있다. 숙박은 편한 옷(법복등)을 제공하고, (화장실이 딸린)1인실 또는 다인실이 있으며, 식사는 대개 발우공양을 하지 않는다. 대개, 사찰예절, 새벽예불(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볼수 있다), 참선, 108배, 108염주만들기, 스님과의 차담등으로 진행된다.

 

단기출가 ~짧으면 일주일, 길게 1달정도 사찰 단기출가를 말한다. 오대산 월정사가 1달간의 단기출가 사찰로 제일 유명하고, 그외, 길상사 단기출가 수련회, 고창 선운사, 단양 구인사, 경기 남양주 봉선사, 경북성주 자비선사, 문경 봉암사(계획), 제주도 부혜사등이 있으나, 운영 여부는 직접 확인 해야 합니다. 그외 다른 큰 사찰에서도 운영하기도 하므로, 단기출가 사찰 확인과 그 운영 여부및 일정은 직접 사찰에 일일이 문의 해야 합니다. 또한, “템플스테이”, “단기출가”와 함께, 인터넷에, “시민선방”, “참선선원”을 치면, 여러 많은 사찰에서 운영하는,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하고, 언제든지 또는 장기간 머물면서, 수련을 할 수 있는, “선방”들이 많이 있다.

 

발우공양 ~많은 사람들의 공덕이 있는 음식을 받게 되어, 그에 보답하여 혼신을 다해서 마음을 닦겠다는 결심으로, 공덕의 음식을 한톨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먹은 그릇을 김치나 단무지로 닦은 물 마저도 마시는 것. 

 

부처의 모습 ~ 부처는 손모양인, 수인(무드라)으로 구분하고, 보살은, 머리에 쓰고 있는, 천관과 손에 든 장신구로 구별함(부처님이 입고있는 옷을 "법의"라 하고,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을 "천의"라 함).

 

비로자나불 법신불 대일여래("비로자나"는, 법성을 "의인화"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우주의 법진리 자체(법성, 불성)를 상징하는 부처님인데, 좌우측에 노사나불(보신불)과 석가불(응신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므로(법성, 불성), 비로자나부처님만 지권인을 할수 있습니다. "지권인"은, 부처와 중생, 무지함과 깨달음이 본래 하나("불이")라는 의미.

 

석가부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고, 사바세계의 중생에게 깨달음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적멸의 세계에 가신 부처님으로, 사찰에따라, 좌우에 관세음 보살과 지장보살이 있거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기도 하며, 수인은, 항마촉지인, 시무외인+여원인, 전법륜인, 선정인등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로, 관음보살, 지장보살 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심

 

아미타불 ~정토 극락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으로, 사찰에따라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있거나, 관세음 보살과 지장보살이 있기도 하며, 수인은, 중생의 근기에 따른, 9가지 아미타 "구품정인"의 수인으로 구분한다. 사찰에 따라 시무외인+여원인, 전륜법인(설법인)도 있음. 협시보살로,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또는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심

 

약사불 ~ 중생의 질병과 고통을 없애준다는 부처님으로, 왼손에는 약병이나, 약단지를 들고 있으며, 시무외인+여원인을 하고 있다. 협시보살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모심

 

미륵불 ~ 내세의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미래에 출현할 부처님으로, 시무외인+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사찰에 따라, 머리에 사각화관과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기도 함. 협시보살로, 묘량보살(대묘상보살), 법륜보살(법화림보살)을 모심

 

보살의 모습 ~보살은, 깨달은 아라한이 부처가 되는 마지막 단계인, 너와나 (인연연기로)한몸인, 모든 중생에게 복덕을 주기위해(자비심),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등 갖가지 보살의 이름으로 현신하여,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통력, 지혜로서 중생에게 이롭고, 갖가지 고통과 환난을 구제하고, 복덕을 성취하게 하며, 여러가지 방편(각각 중생의 수준이나 근기에 맞는 방법)으로, 중생을 정법으로 인도하고, 교화하기 위해 나선 분을 말한다. 이러한 보살이, 귀하며 자비로운 성격임을 나타내기 위해, 몸에 장식을 많이 한, 여성성으로 표현된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몸에는 하늘을 나는 천의를 입고, 목걸이, 귀걸이, 귀걸이, 팔찌등의 장신구와 손에는 연꽃, 정병, 법륜, 구슬등을 들고 있다.

 

관세음보살 ~대자대비의 자비심으로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 원을 들어 준다는 보살님으로,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의 입상이나 좌상이 있는, 보관을 쓴다. 손에는 감로수의 정병을 들거나 연꽃을 들고 있다. 또 그 이름처럼, 수많은 중생들의 고통과 서원을 동시에 듣고, 자비로서 도움을 준다고 하여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상징하여, 한국에는 드물지만, 여러 팔을 가진 관음보살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세지보살 ~지혜의 빛으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주고, 중생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보살님으로, 머리의 보관에, 보배병이 있는 천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이 들려있다.

 

문수보살 ~반야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님으로,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지니고, 연화대나 청사자를 타고 있다.

보현보살 ~원을 세워 이를 실천하는 깨달음의 지표인, 행원을 상징하는 보살님으로,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거나, 합장을 하고, 연화대나 코끼리를 타고 있다.

 

지장보살 ~지옥중생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겠다고 서원을 세운 보살님으로, 머리를 깍은 민머리에, 특수한 두건을 쓰고 있으며, 가사를 입고, 왼손에는 연꽃이나, 보배구슬을 하고, 오른손에는 주장자나 석장, 동자를 안고 있기도 하다.

 

미륵보살 ~미륵 보살은, 부처가 될 것으로 미리 수인받은 보살로서, 현재는 하늘세계인 도솔천에서 욕계,색계의 천인들을 대상으로 교화 설법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런 보살이 미래에 부처가 되기 전에, 어떻게 각 중생의 근기에 맞게 설법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할 것인가를 고뇌하는 모습으로 상징되므로, 그 모습의 표현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으로 대표된다. 미륵 상생보살은 도솔천에 계시는 모습이므로, 대체로 의자에 앉아 있거나, 걸터 앉아서 무릎을 세운 모습이다. 미륵 하생보살은 머리에 사각 또는 원형의 보관을 쓰기도 하는, 서있는 입상인데, 일정하게 정해진 수인은 없으며, 간혹 "용화수인"이라는, 꽃가지나, 꽃봉우리를 한손 또는 두손으로 받쳐든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약사보살 ~모든 중생 아품과 고통을 소멸시키고, 치유해주겠다는 서원을 하신 보살님으로, 손에는 약병을 들고 계신다.

나한 ~ 아주 뛰어난 아라한과를 얻은 나한(아라한의 약칭으로, 성자라는 뜻)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수많은 성자들을 말합니다.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소원을 성취시키는 독특한 능력과 높은 영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오백나한은 제각기 다른,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홀로 깨우치신 삼신각의 "나반존자"와 비슷한 분을 말함.)

 

삼신각 ~① 하느님, 칠성님을 사찰에서는 칠성부처님칠성여래 등으로 부름(천선, 하느님 : 인간의 생명과 수명관장) ~ 삼신각 가운데에 계시며, 일반 부처님 모습으로 표현한다. ② 신령님 (나반존자, 독성님) :학업, 취업등 기타 일반 소원성취 기도. 이런 나반존자(신령님)를 별도로 홀로 모신 전각이 "독성각" ~ 삼신각 좌측에 계시며, 흰 수염이 있는 신령의 모습으로, 바위에 앉아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산신님 (산신령, 산왕, 산왕대신) : 사업이나 장사 성취 기도, 기타 일반 소원성취 기도 ~ 삼신각 우측에 계시며, 백발 노인 산신의 모습으로, 높은 산의 소나무를 배경으로 선녀나 동자, 호랑이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 신령님과 산신님의 기도는 소원성취가 빠르다하여, 많이 찾고 있다).

 

부처의 수인 , 무드라 ~

지권인~ 양쪽의 손바닥으로, 각각 엄지손가락을 감싸진 모습의 주먹을 쥔 다음에, 왼손을 오른손 아래로 붙이면서, 왼손의 검지(집게 손가락)를 오른손의 속으로 넣어, 왼손의 검지와 오른손의 엄지와 맞닿게 하며,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진 모습의 수인. 법신인 "비로자나"만 할수 있는 수인입니다. 이는 부처와 중생, 무지와 깨달음도 둘이 아니고, "본래 하나"("불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한다.

 

 항마촉지인 (항마인, 촉지인, 지지인)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인데, 석가가 성도할때,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였다는 내용에서 유래한 수인이다. 그래서, 항마촉지인은 마군, 즉 악마들을 항복받는 손모양이라는 뜻입니다. 결좌부좌한 상태에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배꼽부근에다 대고, 오른손은 땅을 가르키며 무릎밑으로 내리고, 있는 모양.

 

 시무외인 ~ 중생들의 모든 두려움과 우환과 고난을 말살시켜주고 위안과 원을 들어 준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대자대비의 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른손(또는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이 보이게 밖으로 향한 모양입니다. ​이때 반대편 손은 주로, 여원인을 취한다(시무외인과 여원인은 모두 같은 의미인, 중생이 도움을 청하면 원을 들어주고, 베풀어 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원인 (시원인, 만원인) ~ 중생들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베풀어 주겠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대자대비의 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왼손(또는 오른손)을 가슴쯤으로 내려서, 역시 손가락들을 다 펴거나, 넷째, 다섯째 손가락을 꾸부리며, 손바닥을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때 반대편 손은 주로, 시무외인을 취한다(여원인과 시무외인은 같은 의미인, 중생이 도음을 청하면 원을 들어주고 베풀어 준다는 뜻)

 

 전법륜인 (설법인)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후, 최초의 설법인, 녹야원에서 설법할 때의 수인으로, 무한한 법문으로서 설법하시는 모습의 손모양입니다. 왼쪽손은 허리춤에서, 약간 펼친듯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위를 향하며, 왼손의 두 손가락끝을 오른손의 손목에 붙이며, 오른손은 가슴쯤 올린후, 펼치며 엄지와 중지를 맞대는 원의 모습으로, 바깥쪽으로 펼친다. 손가락 원의 모습은, 불교의 법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정인 (삼마지인, 삼매인) ~선정인은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하여, 선정삼매에 든 때의 손 모양입니다. 이 선정인은 원칙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에만 지을 수 있는 수인입니다. 그래서 선정인을 법계정인, 등지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결가부좌하고 손바닥을 편 채, 왼손은 배꼽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개어 얹어,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⑦ 아미타 구품정인~ (구품) 모든 중생은 모두 존귀하고,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하지만, 그 중생들의 지식 수준과 이해력은 천차만별이다. 이런 중생들의 천차만별인, 지식 수준과 이해력을 9단계로 분류한 것을, "구품"이라 한다. 즉, 중생의 수준과 성품에 따라, 중생을 상품, 중품, 하품의 3등급으로 나눈 후, 다시 각 등급별로, 상생, 중생, 하생으로 나누어, 총9등급으로 나눈 것이 “구품”이다. 이런 분류는, 중생을 각 단계에 알맞게 설법해야 모두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품을, 아미타 부처님의 수인(손짓 모습)에 적용한 것을, 특히 “아미타 구품정인”이라 한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사찰에 따라, “구품정인”이 아닌, “시무외인” 또는 “전륜법인”(설법인)의 모습으로도 표현한다)

 

“구품정인”의  상품은, 결가부좌하고 손바닥을 위로 편 채, 두 손을 포개어 얹어,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인 “선정인”과 비슷하지만, 두 손을 포개지 않고(배꼽 부분에 그대로 위치하며), 상품의 상, 중, 하생에 따라, 상품 상생은, 왼손, 오른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맞붙게 한다(상품 상생), 상품 중생은, 엄지와 “중지”를(상품 중생), 엄지와 “약지”를(상품 하생,) 각각 맞붙게 한다.  중품은, 두 손을 “가슴”까지 들면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편 채,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왼손, 오른손 모두, 중품의 상, 중, 하생에 따라, 각각 두 손 모두, 엄지와 집게(중품 상생), 엄지와 중지(중품 중생), 엄지와 약지(중품 하생)를 마주 댄다. ​ 하품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편 채,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하는, 중품처럼 하지만, 왼손, 오른손이, 가슴 아래 쪽에 위치하는 점이 다르다. 중품과 하품의 엄지와 각 손가락의 모습은 같다(하품 상생, 하품 중생, 하품 하생). 보통 사찰에는 “중품 중생”의 수인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중생을 각각 지식 수준과 이해력으로 구별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모든 중생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중생을 아우르며, 모든 중생을 안락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수인”이, 바로 “구품 정인”이다.

 

 천지인 ~천지인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의미하는 “수인”입니다. (“천지인”은, 부처님의 태어나신 모습 즉, "탄생불"의 손 모양과 같습니다. 탄생불은 어린이의 모습이며, 발가벗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천지인”은, 오른 손을 번쩍 치켜 올려 하늘로 뻗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땅을 가르키는 모습 입니다. (“항마촉지인”은, 결좌부좌한 상태에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배꼽부근에다 대고, 오른손은 땅을 가르키며 무릎밑으로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천지인”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마왕들의 왕복을 받았고, 하늘(천)과 땅(지)의(오른 손은 하늘로, 왼손은 땅으로), 모든 “신”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의 표현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생에 도솔천의 호명보살로 계시면서, 중생(인)을 구원하겠다는 큰 서원으로 이 땅에 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수인” 입니다.

 

 열반상(와불상) ~석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의 모습 그대로 입니다. 열반상은, 석가불의 열반을 상징하며, 머리를 북쪽, 얼굴은 서쪽으로 하고, 오른쪽 손과 오른쪽 어깨를 아래로 하고, 옆으로 누운 모습입니다(열반경).

 

서울 불암산 석천암 후면 칠성각모습. 우측에 북두칠성이 음각되어 있고, 언덕에는 수은등이 북두칠성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교는, 공자가 주장한, 현실적 정치 논리와 인간철학을 유교라하였는데, 동양에서는 불교는 정신적 문제를, 유교는 인간적 도리인 정치적, 현실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한편, "역" 즉, 역학을 주역이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주나라 때의 역학이라는 뜻으로 "주역" 또는 “역학”이라고 말함역학을 인간에 적용한 것을 “명리학”이라 말함.

 

그후, 중국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가 유교의 13경중에서, 4서3경을 집대성하여, 이를 "주자학"이라고 말하며, 이 주자학에 중국 주나라에서부터의 오랜 우주철학인 동양역학인 "주역(역학)"을 유교에 포함시킴. 즉, 동양역학을 주역(역학)이라 말하고, 주자가 뽑은 유교의4서3경을 주자학이라 말합니다. 즉, 주역을 유교의 주자학에 포함한 것입니다 (역학 즉, 주역과 풍수지리에 대하여는 맨 아래 목록 "사주와 사주팔자 풍수지리, 역학과 운명에 대해" 블로그 참조)

 

이런 주자학을 이어받아 더 깊이 들어간 것이 성리학인데, 인간에게는 이기 즉, 이성과 정기가 있으므로 이기론이라 하며, 이 이기론에 있어서, 이기가 하나로 있다는 이기일원론과, 따로 있다는 이기이원론의 논쟁이 유명한 퇴계학 논쟁입니다. 지식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다는 이러한 성리학에대하여, 유교의 경전중 대학과 논어만이 필요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라는, 지행합일을 주장한 것이 양명학입니다. 이러한 양명학은 조선에서 적극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리학은 지식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다. 양명학은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 실학 사상으로 발전

 

유교의 성리학과 불교, 기독교 비교~

 성리학에서, 이기 일원론은 육신과 정신 즉, "이기"가 "하나"이라고 주장하고, 이기 이원론은 육신과 정신은 별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유교 “중용”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삶의 지혜 또는 생활철학을 말한다. 반면에, 불교 “중관(중도)”은, “비유비무”(있는 것도 아닌,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상이 아닌, 상이 아닌것도 아닌)과 같은, 이 세상의 본질적 존재형식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② 불교에서는, 색과 공 즉, 육신과 영혼은 "같음"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다"라 합니다(비유비무). 즉, 중도사상으로 이것을 "공"이라 말합니다. 물질도 "공"이요, 영혼도 "공"인데, 그 "공"의 존재 형식은 "비유비무"의 존재이고, "비상, 비비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 즉, 물질과 영혼의 겉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공"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같음"라는 것입니다

 

[공사상/ 즉, 불교는 영혼(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기 이원론입니다. 그런데, 육신인 물질의 원래 본질은,  비유비무의 존재이지만, 겉모습은 물질이므로, “눈”이라는 물질을 통하여, 육신은 눈으로 볼수 있으며, 그 영혼(귀신)도 육신과 같은, 비유비무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육신인 물질을 통하여서는,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영혼(귀신)은, 물질인 “눈”을 통하여는 볼 수 없고, “영안”으로 만 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편, 현대물리학에서도, 물질(육신)이 비유비무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③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사실, "물질도 아니요, 공도 아님"을 말합니다. 즉, 본질적인 면에서,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라 말하는, 색즉시공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영혼은 물질인가? 아닌가? 물질도 아닌것이 존재하므로, 공도 아니다.. 석가의 업과 번뇌를 가지는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석가말씀)~ 저승세계와 귀신을 볼 수 없는 이유 -색즉시공, 비유비무  

 

(현대물리학) 불확정성의 원리~ⓐ현실적 거시세계 = 위치o+질량o = 물질 측정이 가능. ⓑ물질의 본질인, 미시세계는 = 위치o+질량x 또는 위치x+질량o= 측정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물질이라 말할 수도 없다(위치를 측정하면, 그 질량을 알 수 없고, 질량을 측정하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불확정성의 원리 공식에 의하면, “위치x운동량”이라 되어 있지만, 운동량은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측정이다. 운동량= 질량x속도. 그런데, 보통 말하는 물질 개념은, 움직이던, 움직이지 않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위치+질량이 특정되고, 위치와 질량이 있는 것을, "물질"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불확정성 원리 공식의 운동량 중에서, 속도를 빼면, 질량만 남는다. 즉, 물질은 “위치+질량”이다. 이것이 동시에 측정되어야 “물질”이라 부른다.

 

즉, 미시세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이젠베르크말씀). 석가 와 하이젠베르크 의 말씀이 동일함. 이것으로 노벨물리학상~. 즉, 현대 물리학에서는, 관찰이 되면, 존재하는 것이고, 관찰이 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공사상과 유사함 /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에서도, 물질(육신)이 본질적인 면에서, 비유비무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 색즉시공 = 비유비무 = 공 = 제행무상 = 양자역학 → 모든 존재는, 영속적 실체가 없으며, [① (불교) 인과,연기~ ② (양자역학) 관찰자~]와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양자역학에 의한,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논리)

 

* “눈”이라는 "물질"을 통하여, “비유비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영혼”(귀신)이나, “물질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영혼의 눈, 즉, “영안”이나, “열반"을 통하여, 저승세계, 귀신들 세계, 화엄세계를 볼 수 있다. 즉, “눈”이라는 “물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저승세계이며, 귀신들 세계이다. 나아가, “영혼”의 눈에서, 온갖 번뇌를 제거하여, “진여”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일심법계이며, “화엄세계”이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의 물결이 깨끗이 사라지고, (반야심경의 “조견오온 개공도” → “오온”이 “공”하다는, “비유비무”의 세계를 비추어 볼 수 있는)진실된, “해인삼매”의 눈, “참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고, 화엄세계이며, 부처의 세계이다. (ⓐ욕계~욕망으로 가득찬 이승과 저승세계. 욕망을 가지고 있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색계~욕망은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무색계~”색”을 버리고, ”비유비무”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신”과 “천인”들 세계).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은 같다며, "생사일여"라 말합니다. 삶과 죽음(귀신)은, 본질면에서는 (비유비무의 형태로 존재하는)“공”으로 같은데, 존재의 모습만 바뀐, 윤회의 한 형태라 하는 뜻입니다(존재하는 육신이, “허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허상”이라 말하는 이유는, 지금 있는 육신과 중생의 마음, 죽음 뒤의 영혼 조차도, 존재는 하지만, 항상 변화하는 "인과"에 의해 존재한다는 뜻으로, “진여”에 대비하여, “허상”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번뇌없는, 어떤 경우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래적 마음을 “진여”라 말하며, 이것을 "불성" 즉, “여래심”이고 “부처님 마음”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래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마음에 묻은 번뇌를 갈고 닦으면, 모두가 변하지 않는, 그래서 윤회도 없는, 부처가 된다는 것이 석가 말씀입니다)

 

[①인과”에 의해, “항상 변화하는 존재”를변화하지 않는 "진여"에 대비하여이라 말하며, ②“인과”에 의해,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에 대비하여, 일체 모든 것이, 비유비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본질적인 모습을, “”이라 지칭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 결코, “”가 아닙니다].

 

④ 성경을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는, 영혼(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기일원론에 해당한다. 육체와 영혼을 동일시 하므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과 동시에 육신과 영혼은 함께 소멸되고, 사후세계가 없다(귀신은, 천사의 변신인 마귀라 주장한다). 사후세계가 없으므로 “천국과 지옥”도 당연히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은 사람이 살아 난다는 육신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데, 이런 “불가능한 육신부활의 구원”을 “천국”이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죽음뒤, 실현 불가능한, 육신의 부활을 주장한다. 세상의 종말에, 실현 불가능한, 육신이 부활되어 죽은자가 살아나서, 좀비로 사는 것을 천국이라 말하며, 육신이 부활될 때, 그때, 심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기일원론에 해당하며, 세상이 종말되어, 실현 불가능한, 육신이 부활될 때까지는 천국도, 지옥도, 심판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는 종교이다. 이집트의 미이라가 실현 불가능한, 육신의 부활을 믿고, 삐쩍 말라 비틀어진 미이라 모습처럼, 육신의 부활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기"에 해당하는 논리입니다.

 

저승세계~ 사람이 죽은 후, 영혼(귀신)이 가게 된다는 사후세계를 말한다.

(유교)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면 되므로, 저승세계에 대해 모르며 알 필요없다. 유교는 사서삼경으로, 인간의 삶의 도리를 말하고 사후세계는 모른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죽으면 육신은 없어져도 그 혼은 4대정도까지 유지되고, 4대정도가 지나면, 그 혼의 기가 흩어지고 없어진다고 생각하여[인간에게는 (정신/기)과 (육신)이 있는데, 육신은 죽어도 그 혼은 자손의 4대까지 존재하며 영향을 주고 서서히 소멸하므로], 후손의 도리로서 4대조상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유교의 예법입니다. 

 

(불교)죽음 뒤의, 영혼(귀신)을 인정하므로, 저승세계가 있다. 그래서 사후심판을 한다는 염라대왕 등이 있고, 저승사자가 존재한다. 영혼(귀신)은 업에 따라 극락세계, 지옥세계가 있고, 욕계, 색계, 무색계 라는 육도윤회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저승세계와 귀신(영혼) 이야기는, 유교의 것이 아니라, 모두 불교적인 것이다(“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블로그 “저승세계 도표” 참조).

 

(카톨릭,개신교) 구약에는, “신”에게는 제사를 지냈지만, 인간죽음 뒤의, 영혼(귀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귀신은 천사의 변심인 마귀라 말한다. 사람은, 육신과 함께 영혼도 소멸되므로, 저승세계가 없고, 저승세계가 없으므로,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영혼이 소멸되므로, 당연히 "천국과 지옥"도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은 사람이 살아 난다는 육신부활을 의미한다그런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죽어서도, 또는 죽음 뒤의 육신부활도 불가능하므로, 천국, 지옥은 모두 거짓이다.

 

이집트의 미이라가 실현 불가능한, 육신의 부활을 믿고, 삐쩍 말라 비틀어진 미이라 모습처럼, 실현 불가능한, 육신의 부활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기"에 해당하는 논리입니다. 성경에서 영혼(귀신)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카톨릭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전세계 카톨릭 중, 오직 한국에서만 전도를 위해, 성경을 위반하며, 비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위일 뿐이다.

 

* 천국의 성~ 예수가 재림하게 되는, 세상의 종말에, 거룩한 예루살렘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루살렘의 성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12대문이 있다" (요한계시록21: 2) → (이스라엘 지파별 1만2천명x12지파= 14만4천명이 살수 있는 크기로, “하늘”에서 온다는, 예루살렘의 성을 말한다. 일명 “천국의 성”) →즉, 천국의 성은, 세상의 종말에, “예수”를 믿었던 자들이, “하늘”에서 내려 온다는, 예루살렘의 성(천국의 성)에서, 시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으로, “육신부활”되어, 살게 되는, “성채”를 말하고, 그 곳에서 “육신부활”되어, 사는 것을 “천국”이라 말한다(“성채”에, 유대민족 12지파가 아닌 사람은, 들어 갈 수 없다. 그런데, 하늘에서 “성채”가 내려 올 수 있을 까? 계시록의 “요한” ~로마의 왕 "도밀티아누스"에 의해, 펄펄 끊는 기름솥에 던져져, 인간 튀김이 되어 죽음).

 

카톨릭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이라는, "육신부활"은 실현 불가능하므로, "조로아스터교"를 본받아, 1439년, 죽은 자가 일시적으로 간다는 "연옥설"을 도입하였다(카톨릭에서 1439년 도입한, "육신부활"이 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머물게 된다는 "연옥"은, 성경에 없는 내용이므로, 개신교는, 카톨릭의 "연옥"을, "이단교리"라 말한다).

 

[종합] 기독교~육신과 함께 영혼 소멸(제사부정). 사후세계 부정. 사후세계를 부정하므로, 천국과 지옥도 없다. 오직, “불가능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육신부활”이 되어야, 천국이 생기는 좀비 천국신앙. 좀비로의 부활에 대비하여, 유럽성당의 지하에 유골을 보존하고, 매장시에는, 종말까지, 육신의 보존을 위한, 잘썩지 않는 화려하고, 페인트있는 목관의 매장문화. ②유교~ 자연과 융화되며 자연의 기운을 받아 자손이 잘되기 위해, 육신 잘썩기 위한 매장문화(4대까지 제사). ③불교~ 영혼은 저승에 가게 되므로, 이승에 대한 영혼의 미련을 떨치기 위해 화장문화(영혼을 인정하므로, 제사를 부정하지 않음. ⓐ욕계~욕망으로 가득찬 이승과 저승세계. 욕망을 가지고 있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색계~욕망은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신”과 “천인”들의 세계. ⓒ무색계~”색”을 버리고, ”비유비무”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신”과 “천인”들 세계).

 

도교~노장사상을 계승발전시킨것으로, 노장사상(노자와 장자 사상), 역학의 음양오행의술점성술불교사상유교사상을 짬뽕하여 만든것으로, "도"를 닦는 심신수련으로 불로장생 탐구와 기복을 통한 이익을 탐구한다. 이것을 종교화 한 것이 도교입니다.

 

(노자~마음을 비우고 바람처럼 물처럼 유연하게, 무리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무위자연을 말하며, 혼란한 세상에서 안전하고, 무난히 처세하는 방법론을 말함.이런 노자사상은 장자에게 계승되었다. 

 

장자~어떤 목적을 추구하거나, 사유하지 않는 “도”가 천지만물의 근원이고, 이런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는 저절로 발생하고 스스로 발전시키므로, 모든 “도”는 자연스러운 상태, 그대로를 말한다고 하였다. 즉, 무위자연이란, 영적인 “음”과 물적인 “양”이 조화를 이룬 상태로서, 이를 자연스럽고, 균형있게 발전되도록 추구하는 것을 "도"라 하였다)

 

옥황상제~ 도교 최고 신의 명칭이다. 도교가 종교화의 길을 걷다가, 도교의 용어인 “상제”와 유교의 용어인 “옥황”이 결합된 민중 친화적 용어의 결과물이다. 옥황상제는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신으로서 불가사의한 존재를 의미한다. 도교는 무위자연을 말하므로, 자연의 이치가 옥황상제이며, 옥황상제가 바로 자연의 이치라 말한다. 즉, “옥황상제”는 중국 도교에서 말하는 최고신의 명칭인데, 한국에서는 일부 무속인과 증산교에서도 섬기는, 최고신의 명칭이기도 하다.

 

마니교 ~ 페르시아인 "마니"가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를 가미"한 마니교(마니를 신으로)를 창시하였는데, 이 마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대운광명교(줄여, 광명교, 명교)가 되었음. 명교 즉, 일월신의 교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고, "주원장"이 이 세력을 이용하여 명(明)나라를 건국. 명(明)=일월(日,月)신=태양과 달의신 =일월신교는 원나라의 탄압에 비밀무술을 닦는등 무술을 많이 익혔는데, 무협지와 무협영화인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동방불패등은 이 시대가 배경.

 

배상제회 ~홍수전 청나라말기에, 자신이 야훼의 둘째 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며, 태평천국의 천왕이라며, "배상제회"라는 교를 창시하였고, 청나라에서 이를 탄압하자, 종교를 업고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 난은 1850년~1864년까지 14년간 계속되어, 약 2천만명~7천만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내전 유혈사태를 빚어, 청나라 국력쇠퇴의 원인의 일부가 됨.

 

"이홍장"은 1864년 태평천국의 근거인 난징을 공략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 공적을 계기로 이홍장은 중국의 외교를 장악하고, 중국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주도하였음. 이후 이홍장은 1882년 원세개(위안스카이)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였지만, 1894년 청일전쟁의 황해해전에서 패하여 일본과 시모노세끼조약을 맺게 됨.

 

[예수]~ 예수는 신화를 표절하여 창작되었기에, 예수 "탄생일"은, 죽은지 313년이 지나, 로마황제가 결정했고, 예수 "사망일","부활일"은, 325년이 지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하여, 예수가 "실존인물처럼" 조작되었다. 그후, 기독교(카톨릭+개신교)는, 창작된 예수의 “신격화”를 위해,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모방하여, 325년 “삼위일체설”, 553년에는 “십자가 대속신앙”을 도입하였다. 그후에도 카톨릭은 1215년에 “고해성사와 면죄부교리”, 1439년에는 “연옥설”을 추가하여, 종교개혁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1950년에는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마리아숭배” 교리를 추가했다(예수는 신화를 표절하여 창작된, 가상의 존재이다).

 

ⓐ 성탄일 ~ 중동신화를 표절하였기에, 성경에는, 3명의 "동방박사"가 출생을 지켜 보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년도와 탄생일이 없습니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일"을 기준으로 하는 태양신의 생일인,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을 본받아,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의 교회들은, 태양신과 같은, 12월25일을 성탄일로 하지만, 카톨릭 교회를 따르지 않는, 카톨릭과 "앙숙관계"인 러시아 정교회, 콥트교회에서는 1월7일을,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1월28일을 성탄일로 정하고 있습니다.(이로서, 예수도 태양신의 일원이 되었고, 예수가 "태양신"이므로, 기독교에서, 금식을 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어, 지구 북반부에서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오늘날 동지일은, 지구 북반부를 기준으로, 12월 21~22일 전후인데 반하여, 그 당시 동지일이 12월25일이었던 이유는, 그 당시 역법과 오늘날 역법의 차이 때문이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는 이유로, 생기는 기후 변화는, 인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리아 출산과 베들레헴~ 처형된 사도들은, 신약을 어떻게든, 구약과 연결시키고, 유대교 성지인,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으로 맞추기 위해, “12살의 미성년자 마리아”가 임신한 몸으로 나자렛에서, 유대교 성지인, 베들레헴까지 걸어 갔었고, 베들레헴에서, 3명의 동방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수의 탄생일은 성경에 없다. (12제자의 1사람인, "빌립"은, 자신이 예수를 만났고, 예수는 “나자렛”출신이다 라고 말한다(요한복음1: 45). 예수 탄생지가 “나자렛”인지, “베틀레헴”인지 알 수도 없다).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는 성탄일은, 예수는 죽었다고 주장한지, 313년이 지난,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정치적 판단에 의한,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자신이 믿던 미트라교의 태양신 "미트라"생일을 본받아, 성서에도 없는, 12월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결정한것으로, 예수의 탄생일을 “미트라”교의, 태양신 "미트라"에 맞춘 것입니다. 예수 "사망일","부활일"은, 325년이 지나, 카톨릭 공의회에서 결정하여, 신화를 표절하여 창작된, 예수가 "실존인물처럼" 조작되었다(카톨릭에서 “주교”가 머리에 쓰는 모자를, 지금도 “미트라”라 합니다).

 

ⓑ 예수 사망일 결정, 부할절 결정 ~예수 사망일은 성경에 없다. 사망일을 알아야, 예수가 "육신부활"한 날을 정할 수 있다. 기독교 "부활절"은, 죽은지 3일째되는 날에, 예수 시체가 벌떡 일어나는, "육신부활"하였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춘분이 지난뒤, 첫보름달이 뜬 뒤에 오는, 첫 일요일로 한다. 이런, 기독교 "부활절"은, 유대교 "유월절과 일치"하는 날이다.

 

(유대교 유월절)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난 해방과, 봄수확의 축제를 결합하여, 유월절을 지냈는데, 이런 유월절에, 봄을 기념하여 붉게 물들인 달갈을 상위에 놓는 관습이 있었다. 신약의 예수를 창작한지 325년이 지난, AD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결합"하여, 부활절을 정하였다고 한다. 이때, 유대교의 관습도 받아들여, 기독교(카톨릭,개신교)에서도 "달갈을 부활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화를 표절한 인물인, 예수가 실제로 "사망한 날"과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는, "육신부활한 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 탄생일은 313년, 로마황제가 결정하였고, 예수 사망일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하였다)

 

ⓒ 예수탄생 년도~ 성경에, 예수탄생 년도가 없으므로, 당초, “로마황제의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갔다” 또 “헤롯왕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2세이하 어린이에 대하여, 살해지시를 내렸다”는 성경내용을 추측하여, 그 해를 예수 탄생 년도, 즉, A.D1년을 정하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로마황제의 호구조사 지시는, A.D6년과 A.D14년 두번 뿐이었고, ‘헤롯왕’이 2세이하 살해지시 사실이 없었고, ‘헤롯왕’은 B.C4년에 이미 사망하였다. 이를 알게 된, 신학자들은, 계산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어, 이제는 예수의 탄생년도는 BC4년 쯤이라는 것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정설이 되었다.

 

⟹ (호구 조사때를 강조하면, A.D6년. 헤롯왕 사망시점을 보면 B.C4년, 헤롯왕의 2세이하 어린이 살해지시를 감안하면, 예수나이 2살때이므로, 예수 탄생은 B.C6년  탄생연도에는 A.D6년과 B.C6년 사이에, 무려 12년의 차이가 있다). 예수는 신화를 표절한, “가상의 인물"이므로, 당연히 성경에 “탄생일”과 “탄생년도” 기록이 없는데, 예수를 실존인물이라는 가정하에서, 성경에서 탄생년도를 억지로 추측하기 때문에 년도차이가 있다.

 

[예수탄생, B.C 4년이 “정설이 되었다”라는 의미는, 예수탄생 년도를,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전제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탄생을, 사실로 꾸미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소설을 꾸몄지만, “헤롯왕”은, 성경에서 주장하는, 예수탄생 년도의 4년전에 사망했는데, “헤롯”왕을 이용하여,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2살이하의 모든 아이를 죽였다는 소설을 썼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들”은, 신화를 표절한, 예수탄생을, 사실로 조작하기 위해, 예수가 탄생하기도 전인, 4년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궤맞추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족보~ 성경에는, 처녀수태 마리아와 별도로, 예수는 “유다지파”인, “베레스”의 후손이며, “다윗”의 후손이라는 "예수의 족보 명단"이 있습니다(마태 1:1~3, 누가 3:23~33). 그러면, “신약”성경의 내용이 상반되는데, 예수는, 족보없는 처녀 마리아 아들인가?(마태1:23, 누가1:26) 족보있는 유다지파 후손인가?(마태1:1~3, 누가3:23~33). 위 ①, ②번처럼, “누가복음”,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처녀인 마리아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구약의 예언에 맞추려고, 또다시, 다윗왕의 자손중에서 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이라는 다윗왕의 혈통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교의 이단인 “신약’은, 사도들이, 예수를 “실제의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 예수의 행적, “호루스”, “미트라” 신화를 따르면서, ①, ②번처럼, 역사적 사실에 꿰어 맞추어, 실제 인물처럼 조작하였고, 유대교의 “구약”과 연계하기 위해서는, 족보가 있어야 한다”는, 사도들의 강박관념에, “다윗”의 후손이라는, 족보까지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은 예수를 실제인물로 만들려고, 억지로, 역사적 사실에 꿰어 맞추고, 유대교의 이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예수족보”까지 만들면서, 앞뒤도 맞지 않는 억지 주장하다가 결국, 모두 처형당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역사 기록~ 예수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예수의 행적이나, 처형, 사망에 대하여, 세상에 너무 잘 알려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세를 떨쳤다는, “예수”의 행적이나, 처형, 사망에 대하여, 예수시절에 기록된, 고대사의 기록은 전무하다. 예수 생애인, A.D1년~A.D 30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예수 탄생예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동방박사가 탄생을 지켜보았다는, 예수 탄생사건, 물위를 걷고 기적을 행하였던, 예수 기적사건, 유대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예수로 인한, 혼란 소요사건, 예수 십자가 처형사건, 예수 육신부활과 승천사건 등,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대사의 기록은 전무하다. (이런 사건들의 성경 내용은, 이집트 태양신 “호루스”전설, 페르시아 태양신 “미트라”전설과 똑 같은 내용의 표절이므로, 이런 신화내용을 표절하여 창작된, “예수생애” 기록이, 고대사 역사 기록에 있다면, 그 역사기록의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예수의 존재와 그의 행적,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금방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에 퍼졌을 것이고, 유대지역 장관과 “시리아”에 있는 총독에게도 당연히 알려 졌을 것입니다. 장관이나 총독이, 이 놀라운 예수의 기적에 대하여, 로마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속합니다. 그 당시에는, 황제의 권위가 막강한 시대이므로, 당장 예수를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고, 로마 역사에도 예수의 행적과 기적에 대한 기록이 당연히 있었을 겁니다. 또한,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면, 유대지역 장관이 감히, 총독이나, 로마황제에게 보고도 없이, 독단적으로 예수를 심판하고, 처형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바울(사울)의 편지”이지만, “바울의 편지”는, “예수 전기”도 아니고,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아니며, 예수제자라 주장하는 자들의, “신앙증언”인, 성경내용일 뿐이다. (신약 중에서 가장 빠른 책은 사도 "바울"이 썼다는 "고린도 전서"인데, 그 책은 예수탄생후, 55~56년뒤인, A.D 55~56년경에 쓰여진 책이다.) 예수시절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제사장들은, 그렇게 유명세를 떨친, 예수의 생전 행적도, 예수의 “육신부활”도 왜? 목격하지 못했을까요? 온갖 기적을 행하여,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유대인들은 아무도 목격 못하고, 처형당한 사도들만, 예수 기적과 예수 육신부활을 보았다는 것은, 그들만의 소설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쓴, “바울” ~ 칼에 목이 잘려 사형장에서 죽음)

 

*빌라도~ 예수를 처형했다는 유대지역 장관이라는,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에 대하여, 그의 생몰연대나 생애에 대하여, 성경 이외에는, 역사 기록이 없다. 다만, 성경에는 A.D26~A.D36년까지 “빌라도”는, 유대지역 장관이었다고 한다(성경에, 예수 탄생당시는, 시리아 총독이 “퀴리노”였다고, 되어 있지만, “퀴리노”는, 예수탄생 한참 뒤인, 기원후 6년에 총독이 되었고, 예수 처형당시, 총독 밑의 유대지역 장관은, “빌라도”라 되어 있다). 현재 유대교 학자들은, “빌라도”의 실존 인물 여부와 관계없이, 성경에서 말하는, “산헤드린 재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빌라도”의, 예수 체포와 심문, 처형에 관하여,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냈다는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었으나, 그것은, 위작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이집트 태양신 “호루스”, 페르시아 태양신 “미트라”, 신화처럼,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도들이, 그 당시 유대지역 장관 “빌라도”에 궤어 맞추어(“빌라도”의 실존 인물여부와 관계없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역사적 사실처럼 꾸민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유대지역 장관 “빌라도”의 십자가 처형이 아닐까? 그렇다면, “빌라도”는, 사도들에 의해, ​있지도 않는 십자가 처형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 요세푸스(37?~95?)~ 유대 역사가 인데, 그는 갈릴리 지휘관으로 로마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로마에 투항하여, 로마군이 되었다. 로마군의 일원으로 유대를 상대로 싸워, 전과를 올리고, 로마시민권과 “플리비우스”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A.D 95년에, 성경을 토대로 하여, 유대 과거역사를 저술했는데, 이중 “플리비우스 증언” 부분에 있는, 예수에 관한 것은, 지금도 역사가들의 “진위”논란이 분분하다. 이 “플리비우스 증언”도, 그렇게 유명세를 떨쳤다는, “예수”의 행적이나, 처형, 사망에 대하여, 예수 시절에 기록된, 역사서가 아니고, A.D95년에, 성경을 토대로, 자신의 신앙믿음을, “유대 역사서”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나, 선지자들이, 예수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즉, 이 부분에서, 예수당시,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본적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의 “육신부활”을 사실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빙의, 방언~ 예수처럼,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신"에게 계속기도를 하게 되면, 주변에 귀신들이 모여들고, 귀신이 "신"인척하며 응답합니다.이것이 빙의이며, 방언입니다. 방치하면 조현병이 됩니다. 방언을 자랑하던 사람들, 지금 정신병 약을 먹고 있지요? 빙의한 영혼도 천도재의 대상이 될수 있지만, 강한 집착력을 보이므로, 원력있는 스님, 시중의 법사, 무속인에 의한 퇴치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 블로그의 글이, 너무 길어 부담스러우면, 영험한 기도처와 각 사찰의 영험 설화를 제외한, 아래 블로그 리스트 중, (①번 요약 발췌분) "불교사찰,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불교기도문, 천수경기도문인, "신묘장구대다리니경" 원문 해석은, 이 블로그 글이 너무길어, 별도로 구성하였으므로, 참고하세요)

 

*본 블로그의 내용은, 복사를 허용하므로, → "본 블로그의 일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경우,

① 본 블로그를, 컴퓨터를 통하여 읽고 있는 경우에는, (카카오톡 PC버전을 컴퓨터에 다운 받아서)컴퓨터에서 "카카오톡을 실행" 한 후, "알리고 싶은 부분"을 복사한후, 카카오톡 "채팅" 창에 "붙여넣기" → "전송" 하면 됩니다. ② 본 블로그를, 휴대폰으로 읽고 있는 경우에는, "알리고 싶은부분"을 복사한후, "카카오톡을 실행"하여, "채팅" 창에 "붙여넣기" → "전송" 하면 됩니다.

 

그외, 많은 지식정보를 습득할수있는, 본 블로그 글의 목록  

 

① 불 교사찰과 불교기도문, 부처와 보살의 모습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30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955604245 

(위 ①번 요약 발췌분) 불교사찰, 부처와 보살의 모습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3381205845

 

② 반야심경 원문과 해석, 유식사상과 공사상에 대해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2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58711173

(위 ②번 요약 발췌분) 반야심경, 유식사상과 공사상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3381987313

 

 하나님 하느님 예수는 누구인가? 가짜 하나님이지요?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31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2397419172

(위 ③번 요약 발췌분) 하나님 하느님 예수는 누구인가?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3378895139

 

④ 사후세계 도표, 저승도표,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의 모습 ~ 위 ②번 후반부에, 통합 됨.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18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37515554

 

  신묘장구대다라니경 : 천수경 기도문, 불교 기도문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0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955604245

 

 사주와 사주팔자 풍수지리, 역학과 운명에 대해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19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57432806

(위 ⑥번 요약 발췌분) 사주팔자와 풍수지리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3398339256

 

 휴대폰 핸드폰 카톡 카카오톡 사진과 문서를 컴퓨터 usb에 저장, 옮기기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1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58575329

​​​(위 ⑦번 요약 발췌분) 카톡사진 컴퓨터, usb에 저장하기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3398430030

 

 진리라 말하는 성경의 진실과 문제점, 성경책 구약과 신약 ~  동일 내용으로,   번에 통합 됨.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9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950795123

 

 설악산 공룡능선 등산 오세암 망경대 등산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5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68995188

 

 중국 황산여행 황산트레킹 황산등산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4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68168986

 일본 후쿠오카 온천 자유여행

다음 :  https://andsing.tistory.com/23

네이버 : https://blog.naver.com/andsing/221568254929

 

 

본 블로그의 맨 아래의 1번부터~11번까지의 번호를 클릭하시면 바로가기가 되고, 없는 것은 검색하시면 됩니다.